설교 원고/산상복음

25.[산상복음25]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능가하는 의(義)

☆ 주님의 머슴 2021. 3. 15. 17:59

주일설교(2015/11/08) - 산상복음(25)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능가하는 의()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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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예수님께 한 서기관이 찾아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22:36-40)

이 말씀은 십계명을 축소해서 둘로 나누어 놓은 것입니다. 십계명을 둘로 나누면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요, 둘째는 이웃에 대한 계명인 것입니다. 이 말은 율법을 크게 둘로 나누면 두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첫째부분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부분이고, 둘째부분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의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전케 하려 함이라”(5:17) 는 말씀도 바로 이 말씀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인간과의 관계를 완전케 하러 오신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인간과의 바른 관계를 깨뜨립니다.

 

기독교는 관계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13절부터 보면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14-19) 고 말씀합니다. 관계의 회복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의 회복을 하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장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관계입니다.

 

여러분, 거룩하게 되는 것, 의롭게 되는 것은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체험이 아닙니다. 성령은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체험입니다. 성령을 충만하고 받고, 능력 세례, 성령 세례는 위로부터 부어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실 때는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고,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 위에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령이 위로부터 부어지는 체험입니다. 율법을 지키는데는 성령체험이 도움은 되겠지요.

 

그러나 성결케 되는 것, 즉 성화(Sanctification)되는 것은 체험이 아니고,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관계에는 뭐가 들어 있습니까? 서로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친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4:15) 라고 하신 것입니다. 관계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이 예수님과 관계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의는 관계의 의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선함, 착함, 의로움은 예수님과의 관계의 선이요, 관계의 의입니다. 예수님과 관계를 떠난 의, 선은 그 속에 다 악이 숨어 있고, 이기적이고, 그 속에 자기의 영광을 먼저 추구하는 선이요, 자기가 만든 의요, 선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의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읽은 본문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

 

예수님이 가장 많이 책망하고 싫어한 사람들이 서기관(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책망했습니까? 먼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첫째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과 세리에 대해 하신 말씀의 내용을 보면, 바리새인들의 신앙이 어떠했는가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18:10-12)

 

바리새인은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곳에 우뚝서서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다는 것, 특히 저 세리와 같지 않은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일신상에 관한 일들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곧 자기는 착취자가 아니며, 부정한 자가 아니며, 간음자가 아니며, 저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이 말은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점을 인정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런 외적인 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대단하게 여기고 교만했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그들은 일 주일에 두 번 금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십일조도 철저히 드렸습니다. 마태복음 2323절에 식용식물(食用植物)인 박하(mint), 회향(anise), 근채(cummin)에 이르기까지 가졌던 모든 것의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추가해서 그들은 극히 신앙적이었고, 예배와 종교의식 준수에 매우 정확하고 엄격했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학자입니다. 서기관들은 바리새인 중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서기관들도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데 시간을 보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거룩함 때문에 눈에 두드러지게 유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말은 분리주의 자란 뜻입니다. 자기들 스스로 우리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자부하고 다른 사람과 분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해서만은 더 엄격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요구하는 그 이상의 엄격한 생활과 율법을 요구하고 만들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일 주일에 두 번 금식하라는 말이 없습니다. 스가랴 8:19에 보면, 그들이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돌아와서 포로생활을 생각하며 잊지 않기 위해서 “4월의 금식, 5월의 금식, 7월의 금식, 10월의 금식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일 년에 단 한번만 금식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점차 율법체계를 정교화(精巧化)하여 일 년에 한번만 하면 되는 금식을 일주일에 두 번씩 하라고 권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을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7:49) 하면서 죄인이라고 취급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윤리와 행동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한 율법을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로 모든 사람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모범을 칭찬하고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평민들은 , 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될 수 없어, 나는 소망이 없는 자야!“ 하면서 스스로 포기해 버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보고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7:19)라고 책망했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많이 책망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하면서 예수님은 무섭게 책망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도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 하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그러면 예수님은 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했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함께 깊이 생각해 봐야 하고,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의 하나로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착각하고 스스로 속을 가능성이 있는 문제들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위선자들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실재로 그들은 위선을 의식하지 못한 무의식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러한 위험한 착각에 빠진 자가 되기 쉽습니다. 의식하지 못하는 위선자들이 되기 쉽습니다. ‘나의 신앙생활이 바르게 하고 있다. 옳다.’ 라고 생각하지만, 너무나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무감각한 위선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기독교인이다라고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왜 이들을 아주 많이 책망했습니까? 그들의 종교가 마음의 종교가 아니라 전적으로 외적이고 형식적인 종교였습니다.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것은 왜 생깁니까? 상대방과 관계가 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날 때, 나와 깊은 관계가 안되어 있는 사람을 만날 때는 그저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 조심하면서 만나기는 하지만, 너무 오래는 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 나와 깊은 관계를 가진 사람을 만날 때는 적당한 선에서 만나지 안찮습니까? 만남이 좋고, 즐겁고, 헤어지고 싶지 안찮습니까?

 

이렇게 관계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자녀와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부부와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소중한 자들과의 관계는 너무너무 귀하고 소중합니다.

 

기독교인은 세 가지가 중요합니다. 첫째는 예배입니다. 둘째는 십일조헌금입니다. 셋째는 순종합니다. 이것은 관계입니다. 관계가 되어 있지 않는 상태에서는 형식적이고, 위선적이 되고, 억지로 마지못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요하면 반발하는 것입니다. 강요하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알아서 적당하게 하겠다는 겁니다. 관계가 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관계가 없으면 형식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반발하고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키면 반발하면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예수님 없는 예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신앙이었습니다.

 

셋째는 그러면 예수님이 원하시는 의는 뭡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능가하는 의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능가하는 의는 뭡니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 왜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은 의가 뭡니까? 예수님과의 관계의 의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관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런 의는 그저 형식적이고, 위선적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관계없는 선함, 착함, 윤리, 도덕은 다 위선입니다. 자기를 위한 의입니다. 자기를 내세우는 의입니다. 자기의 영광만을 만들려는 의입니다. 이런 의는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하고, 알아주지 않으면 기분 나쁩니다. 안 알아주면 선하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착함도 자기를 위한 착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관계의 의는 십자가의 의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피 흘려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의가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관계의 의는 형식적인 의가 아닙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의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의는 너무 너무 귀합니다. 애절합니다. 사모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믿음은 관계의 믿음입니다. 생명을 나눈 믿음입니다. 생명을 나눈 의입니다.

 

성경은 모두가 예수님과 관계를 말합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2:13). 이제는 예수님과 관계입니다.

예수님 아니고는 구원이 없습니다. 예수님 아니고는 바른 예의와 도덕과 착함, 선함, 의로움이 없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의 시금석이 뭡니까?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 한다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예수님과 생명을 나눈 친밀한 관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과 우리의 친밀한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비유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로,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