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2015/10/18) - 산상복음(23)
예수님과 율법(2)
마5: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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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5:17-18)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전케 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심으로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도리어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당시 많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오해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약화시키거나 수정하거나 없애버리려고 오셨다’고 오해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전케 하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롬3:31에서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랬고, 사도 바울도 그랬고, 율법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기독교인들에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기독교인은 구약의 율법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율법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왜 중요합니까? 왜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는 것입니까? 세 가지의 이유 때문입니다. 즉 율법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세 가지의 상태 때문입니다.
<율법이 인간에게 나타나는 세 가지 상태>
첫 번째는, 전혀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자연인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자연인에게 율법이 임할 때는 몽학선생으로 임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자연인은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율법이 몽학선생, 즉 가정교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연인에게는 몽학선생, 즉 가정교사로 나타나 예수에게로 갔다 붙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율법이 나타나는 두 번째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율법이 나타납니다. 이 사람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났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입니다. 구원의 씨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씨입니다. 이 사람에게 율법이 임하는 것은 목적이 다릅니다. 율법이 이 사람을 성화시키기 위하여 나타납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율법이 나타나는 것은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 믿음이 깊지 않고 육에 속한 사람이기에 이런 사람에게 율법이 나타나는 것은 성화시켜서 신령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성화된 신령한 사람입니다. 이 신령한 사람에게 율법이 임하는 이유는 율법이 상급을 일으키기 위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5장 6장 7장은 상 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이 세 개가 대단한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율법이 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중요냐? 이 세 가지 때문입니다.
이 율법이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든지, 인간에 대한 계명이든지, 사람에게 찾아올 때는 이런 상태로 오는 것입니다. 자연인에게는 율법이 나타나는 것은 구원으로 이끌기 위함이요, 이미 구원 받았으나 육에 속해 있는 사람에게는 율법이 나타나는 목적이 성화입니다. 성화시켜 신령한 사람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성화된 신령한 사람에게는 상급을 일으키기 위함입니다. 신령한 사람에게 율법이 나타나는 것은 그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은 받았으나 음란한 사람은 그대로 음란하고, 거짓된 사람은 그대로 거짓되고, 육에 속해 있는 사람은 그대로 육에 속해 있고, 그런 사람에게는 율법이 성화를 일으키기 위하여 나타납니다. 율법을 통하여 성화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성화된 신령한 사람은 성령이 육체까지 잡아 버립니다. 성령 받으면 내가 압니다. 육체까지 충만하다는 것을 내가 압니다. 성령이 하늘에서 내려온 힘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함으로 나에게 상급을 만들어 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구원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상급에 문제가 생깁니다.
율법이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화되어 상급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사도들과 위대한 성도들은 다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살았습니다.
율법을 예수님이 제 해석했습니다. 마태복음 5-7장은 율법 중에서 확대된 율법입니다.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자주 부딪치는 문제가 “율법이냐? 은혜이냐?”입니다. 율법을 강조하면, 율법주의자라고 하고, 은혜를 강조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 형식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는 율법을 귀하게 여깁니다. 은혜를 받은 자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요14:15절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14:21절에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율법을 사랑하고 율법을 지킵니다.
<율법을 다 이루신 분이 예수님>
왜냐하면, 예수님은 율법을 다 이루신 분이십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율법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항상 미완성품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율법을 완성시킨 것입니다.
롬8:3-4절을 읽읍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17절의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의 이 “완전케 한다” 라는 이 말과 18절의 “다 이루었다” 라는 말과 사도바울이 말한 로마서 8장 4절에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이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한다” 라는 이 말이 다 같은 의미, 같은 뜻을 가진 말입니다. “완전하게 한다. 다 이루다.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다” 다 같은 말입니다. “순종하여 성취시키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과 같은 말이 요한복음 19장 30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바로 직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다 이루었다” 라는 말입이다. “십자가를 통해 순종하여 성취 시켰다. 완전케 했다. 다 이루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행할 수 있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율법과 선지자”를 다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이 내 속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믿어지고, 아멘이 될 때에 율법과 나의 관계가 이해가 되고, 율법 앞에 자유로워지고, 율법을 뛰어 넘어 이기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율법을 알려면 인간구조를 알아야>
이 율법 문제를 바로 알려면 인간구조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영, 혼, 육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율법이 인간에게 적용될 때 인간이 영, 혼, 육, 이렇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율법이 이해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것과, 오늘 예수 믿어 구원 받은 자와 율법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을 확대 시켰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사람을 실제로 죽여야 살인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마음에 살인하고자 하는 마음만 먹어도 살인입니다. 음욕도 그렇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사람이 실제로 간음을 해야 간음죄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마음에 간음하고자 하는 마음만 먹어도 간음 입니다.
예수님은 왜 율법을 확대시켰는가? 마5-7장은 율법의 확대입니다. 율법을 확대하여 어떻게 하겠다는 이야기입니까?
사람이 율법을 만날 때 이런 형태로 만납니다.
사람이 영과 혼과 육체가 있습니다.
창세기 4장13절에서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고 그 죄를 고민하는 것과 바울이 로마서 7장14-25절에서 죄를 고민하는 것은 같은 것입니까? 가인의 죄와 바울의 죄가 같은 것입니까?(함께 찾아 읽어봅시다) 바울은 죄 때문에 고민하면서 “내 속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내 지체 속에 또 다른 한 법이 내 마음에서 싸워서 내 지체 속에 있는 죄한테로 사로잡아 가는 것은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7:22,23) 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면서 8장 1절에서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라고 선언합니다. 죄 때문에 고민하면서 한 편으로는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선언합니다.
가인은 죄 때문에 이런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죄와 가인의 죄는 다릅니다. 다시 요한일서 3장8-9절입니다.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거듭난 자입니다. 구원 받았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아니하니 하나님의 씨가 성령입니다. 그 씨가 거함이요.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 이것 가지고 구원파 박옥수가 한국 교회를 사기치고 있습니다. 이 성경구절 가지고 사기 치는 것을 한국 교회가 이분설 가지고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범죄치 않는다.” 여러분 하나님께로 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 들어봐요. 죄 다 짓습니까? 하나님께로 거듭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늘 죽어도 천국 간다고 믿습니까? 죄 짓는 사람은 천국 못 갑니다. 이 말 들고 치고 들어오면 목사님들도 넘어갑니다.
여러분 죄 짓지요? 죄 짓는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것입니까? 하나님께로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말은 뭡니까? 이것은 육이 거듭났어요? 아닙니다. 혼이 거듭났어요? 아닙니다. 영이 거듭났어요? 그렇습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 그 씨가 내 영을 붙잡고 있어서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내 영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영이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한 번 거듭난 자는 혹시 육체와 혼이 죄를 져도 영은 죄에 가담하지 않습니다.
부부간에 가끔 싸운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까? 아이 참 안 싸우는 척 하지 말고,, 다 안 싸우는 척 하고 앉아있네... 다 한번씩 구라파 전쟁 하잖아요? 요즘은 저도 싸울 힘도 없어서 안 싸워요.
부부 싸움은 언제 잘 일어나느냐 하면, 꼭 토요일 저녁이나, 주일 아침에 그것도 교회에 올려고 할 때,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것도 별것 아니것 가지고 싸웁니다. 그러나 성도는 싸움에 참여하고 싶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그게 바로 영입니다. 할렐루야!
바로 그 씨가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싸움을 한 번 시작해 보면 알아요. 그것이 영이요 성령이 틀어 쥐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은 성령이 거하는 처소입니다. 성경에 인간에게 성령이 와 계시다고 하는데 성령이 어디에 계실까?
성령이 어디에 계실까 생각해 봤습니다. 성령이 팔에 있을까? 다리에 있을까? 다리 팔을 짤라도 성령은 내 몸 안에 있습니다. 팔 다리가 없어도 성령은 내 안에 있는 것을 보니 팔 다리에는 성령이 없습니다. 목을 짜르면 위에 있을까? 가슴에 있을까? 어디에 있을까? 반은 위에 있고, 반은 밑에 있을까?
이런 공상을 하다가 로마서를 읽다가 찾아냈습니다. 육체를 넘어, 혼을 넘어, 성령은 인간의 영 안에 있습니다. 내 영은 성령을 담는 그릇입니다. 이것입니다.
이해 되시면 아멘. 할렐루야!
그렇다면 인간의 영 속에 성령이 있는데 성령 세례가 임하여 버리면 어떻게 될까? 내 몸을 확대 점령합니다. 성령세례가 임하면 확대 점령해 버립니다. 성령이 임하면 내 몸을 성령이 확대점령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할렐루야!
사도행전 2장 17절을 읽으십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여기보세요. “내 영을 육체에 부어준다”고 하잖아요? 이 말씀을 잘못 오해하면 안됩니다.
따라합시다. 영을 적시고, 따라합시다. 혼을 적시고, 따라합시다. 육을 적시고, 이렇게 확대 점령한다는 말입니다. 이해되시면 아멘.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 받았으니 육체의 죄는 막 지어도 되겠네“ 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사도바울도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2)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6:15) 고 말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죄를 지을 수는 있어도 영은 죄에 참여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야 하는 전제가 있습니다.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내 구주로 믿어져야 합니다. 예수가 좋고, 예수만 생각하면, 감사하고, 신앙생활 할수록 점점더 우리는 성화되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늘의 상급을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자연인에게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성화시켜 신령한 사람으로 만들어 갑니다. 우리가 지금 구원 받았다면 율법이 요구하는 성화되어 신령한 성도로서 상급을 쌓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확대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확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를 신령한 성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신령한 성도에게는 율법은 확대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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