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묵상⑮>
15.참된 종교
막3:1-6
==================================================================
“3: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3: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3: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3: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3: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 하니라.“
4절을 다시 읽어보자.
“(4절)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쪽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이야기이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을 사용하지 못하는 장애자를 고치신 일 때문에 유대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바리새인들이 헤롯당 사람들과 의논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 아마 바리새인들은 권력이 없으니, 권력을 쥐고 있는 헤롯당 사람들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처형하려고 의논한 것 같다.
오늘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가운데 세우고 회당의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분명히 물으신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여기서 예수님은 분명히 대조함으로 묻는다.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분명히 대조적으로 물으신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기독교의 윤리적으로라도,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정상이요, 참된 종교이다.
참된 종교는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한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이단 사이비이다. 사회에 좀 먹는 종교이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해주는 것, 이것이 당연한 것이고, 정상적인 것이다. 그런데 안식일 규칙에 매여 이것을 악하게 보는 것이다. 아마 이것은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자기들의 권위와 위치가 흔들리는 것에 대해 불안감으로 예수님을 불의로 몰고, 신성모독으로 몰고, 유대교를 위태롭게 하는 자로 몰았을 것이다. 예수님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막2:27) 라고 하신 말씀에 비추어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런 악의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안식일은 주인을 만나는 날이다. 안식일은 주인에게 복을 받는 날이다. 그리스도인이 왜 행복한가? 왜 복된 자들인가? 주인을 만날 수 있는 날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나는 주인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보통 그런 주인이 아니다. 우주를 다스리는 주인이시다.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능력을 행하시는 주인이시다. 권세가 세세토록 있는 주인이시다. 부하신 분이 가난하게 되시고, 가난한 우리를 부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자기 생명까지도 십자가에 내어 놓고 구원 시키시는 분이시다.
1. 진정한 종교는 안식이 있는 종교이다. 또 안식이 있어서 그 안식의 주인이신 분을 찾는 것이 진정한 종교이다. 예수님은 또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1절). 앞에서 본 대로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자나다가 밀 이삭을 잘라 먹음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정통파 유대인들과는 큰 차이가 있음이 명백해졌다. 예수님이 또다시 회당에 간다는 것은 매우 용감한 행위이며, 그것은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없는 위험한 상태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이날도 안식일이었다. 안식일에는 모든 일이 금지되어 있었으며, 그리고 병을 고치는 것은 일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유대의 율법은 이 일에 대하여 아주 명확하게 또 상세하게 정해 놓고 있다. 의학적인 배려는 생명이 위험할 때만 주어졌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출산 중에 있는 부인은 안식일에 도움을 받았다. 목이 아파 음식을 먹을 수 없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당장 죽게 되는 병은 치료할 수 있지만, 그러나 죽지 않는 병은 치료할 수가 없었다. 또 몸에 상처가 났을 때에 더 악화되는 것을 방지할 수는 있지만 더 좋아지게 할 수는 없었다.
본문의 손 마른 사람은 당장 죽을 사람이 아니다. 지금까지 평생 손 마른 형편으로 살아 왔다. 안식일이 아닌 다음날 고침 받아도 된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사람은 진정한 안식과 평화가 있어야 되는 것을 아시고 계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음 안식일에 이 회당에 올 수 없다. 이스라엘 온 동네를 다니셔야 한다. 진정한 안식과 평안, 은혜와 축복은 다음으로 미룰 수 없다. 예수님께는 “다음에”가 없다. 언제나 현재가 중요하다. 예루살렘의 십자가까지 가셔야 하는 예수님께 “다음 날”이 있겠는가?
사람은 누구든지 안식이 있어야 한다. 교회를 왜 이 땅에 남기셨는가?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안식은 누구가 주시는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안식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교회를 통해 안식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2. 진정한 종교는 기꺼이 한 가운데 일어서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구원은 부끄러움이 있으면 안 된다. 생명을 얻는 것은 당당해야 한다. 부끄러움은 마귀가 주는 것이다. 부끄러움은 나약하게 하고, 예수님께 가까이하지 못하게 한다. 3절에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고 하신다. 2절에 보면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는 가 다 보고 있다.
이런 세상의 한 가운데로부터 당당하게 일어서야 하는 것이다. 일어서는 자세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향한 고백이다. 그리고 당당하게 일어서서 “손을 내미는” 것이다.
3. 진정한 종교는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한다. 진정한 종교는 생명을 살리는 종교이다. 구원은 생명을 불어 넣고 살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세상을 살리고, 인간의 생명을 살리고, 죄를 죽이고, 마귀를 죽이고, 의를 회복하고, 선을 살리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어느 것이 옳은가?”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은가?”
기독교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종교이다. 교회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의를 회복하고, 죄를 죽이고, 마귀를 죽이기 위해 이 땅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교회를 통해 예수를 믿으면 생명도 살고, 가정도 살고, 자식도 살고, 사업도 살고, 국가도 살고, 민족도 살고, 다 사는 길이 열린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탄생하실 때에 동방으로부터 박사 세 사람이 예물을 가지고 왔다. 그런데 세 박사 외에 네 번째 박사가 있었다. 이 “네 번째 박사”의 이름은 “알타반”이었다. 벤허라는 영화에도 이 장면이 잠깐 나온다. 그는 메시야의 탄생을 알리는 그 특별한 별을 따라가기 위해 출발하였다. 그는 아기 예수인 왕에게 예물을 드리기 위해서 값비싼 사파이어, 루비, 진주를 가지고 떠났다.
그의 친구 세 사람 카스파, 멜키오르, 그리고 발다사와 만나기 위해 약속의 장소로 급히 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열병을 만나 죽어가는 나그네를 만났다. 시간이 지나면 세 친구들이 먼저 출발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알타반”은 머물면서 그 나그네를 도와서 병을 낫게 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시간이 늦어 세 친구들은 먼저 떠나 버리고 혼자가 되고 말았다. 가지고 있던 돈과 낙타는 그 나그네에게 주었다. 그래서 “알타반”은 사파이어를 팔아 사막을 여행할 낙타를 구했다. 아기 예수에게 사파이어를 드릴 수 없어서 매우 슬퍼했다. 그는 여행을 계속해서 드디어 베들레헴에 도착했다. 그러나 너무 늦어 이미 세 박사들도 떠나고 아기 예수도 부모와 함께 애굽으로 피난하고 없었다. 그 때는 온 베들레헴이 울음바다가 되어 있었다. 한 어린 아이를 학살하고 헤롯의 명령을 받은 한 병사가 왔다. 자기가 숙박하고 있는 집에 어머니가 울고 있었다. 병사들이 아기를 죽이려고 했다. 그는 손에 루비를 들고 내장에게 달려가 그 루비를 주고 매수해서 아기를 살려 주었다. 아기는 구원받았고, 그 어머니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루비가 없게 되었다. 아기 예수께 줄 수 없어서 슬퍼했다.
오랜 세월 동안 그는 왕을 찾아 다녔다. 30년 이상 지난 후에 예루살렘에 왔다. 마침 그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날이었다. 그는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이상하게도 그 분이 지금까지 자기가 찾는 왕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진주를 가지고 갈보리로 달려가 그 진주를 대장에게 주고 예수를 살리려고 했다. 갈보리로 가고 있는데 병사에게 쫓기고 있는 한 소녀를 보았다. 그 소녀는 “나의 아버지는 빚을 졌습니다. 그들은 빚을 갚기 위해 나를 잡아 노예로 팔려고 합니다. 살려 주십시오.” 하며 애원했다. “알타반”은 주저하다가 그러나 곧 슬퍼하면서 그 진주를 끄집어내어 병사들에게 주고 그 소녀를 해방시켜 주었다. 그러나 예수를 십자가에서 구원 시킬 수 없게 되어 매우 슬퍼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모습을 멀리서 보면서 “알타반”은 매우 슬펐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 지며 지진이 일어나고 천둥이 일어났다. 예수님이 운명하신 때였다. 그때 갑자기 기왓장 하나가 날아와 “알타반”의 머리를 때렸다. 그는 반쯤 의식을 잃고 땅에 쓰러졌다. 옆에 있던 소녀가 무릎으로 그의 머리를 베개 베어주었다. 그때 갑자기 그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주여! 언제 제가 당신의 굶주린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습니까? 또 언제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제가 당신이 나그네 되었을 때에 숙소를 제공하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혀 드렸습니까? 언제 옥중에서 병들어 있는 것을 보고 위문했습니까? 33년간 저는 당신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의 얼굴을 뵈옵지도 못하였으며 그리고 나의 왕 되시는 당신을 섬기지도 못했습니다. 준비한 예물도 하나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멀리서 조용한 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알타반은 미소를 지으며 죽어 갔다. 왜냐하면, 왕이 그의 선물을 받아 주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종교는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4. 진정한 종교는 사람을 완전하게 회복시킨다.(5절)
마가복은 8장 24절에 예수님은 맹인을 고쳐주시는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이 맹인의 눈에 침을 바르시고 안수하신 후 “무엇이 보이느냐?” 라고 물으시니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입니다.” 라고 했다. 예수님이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았다고 했다. 예수님은 반쯤 고쳐주시지 않고 완전히 고쳐주셨다. 예수님은 구원을 반 정도만 시키시지 않는다. 기독교의 구원은 반쪽 구원은 없다. 완전한 구원이다. 기독교의 축복은 반만 주시거나, 찔끔 찔끔 조금씩 주시지 않는다. 앞으로 두고 보면서 잘 하는 가를 봐 가면서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완전한 구원이요, 완전한 은혜요, 완전 축복이다. 참된 종교는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요,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게 한다. 기독교는 완벽한 구원의 종교이다. 뭔가 부족해서 제 삼, 제 사의 또 다른 복음이 필요 없다. 기독교의 복음에는 뭔가 부족해서 다른 것을 더 보태야 할 필요가 없다.
5. 참된 종교에는 대적자들이 많다. (2,6절)
진정한 복음, 생명의 종교에는 사탄의 박해가 있다. 시험이 따르고, 고난이 따른다. 성경에는 시험과 고난과 박해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도 사탄의 시험으로부터 시작한다.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좁은 문이다. 생명으로 가는 길은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
참된 신앙인에게는 대적하는 자가 많다. 복음으로 살려고 하면 방해자가 많다. 그리스도인이 고난과 박해가 많다는 것은 그 만큼 신앙인으로 올곧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이다. 쭉정이 성도라면 대적자가 없다. 직장에서 동료나 상사가 그리스도인라는 이유로 방해를 한다면, 그 만큼 참된 성도라는 증거이다. 늘 회색지대에 있기를 원하는 자들은 반대자, 대적자가 없다. 가재는 게 편이라는 말이 있듯이 같은 부류의 계열은 연합도 잘한다. 세상의 여러 종교가 있지만, 같은 색깔의 부류가 많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르다. 교회는 다르다. 참된 종교는 반대자, 대적자가 많다.
참된 종교는 형식적이지 않다. 예수님은 율법전문가에게 두 가지 질문을 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은가?” 이 상식적인 것에 대해 묻는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 그러나 지극히 상식적인 것에 대해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 이 세상이다.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은가?”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헤롯당과 연합하여 예수를 죽이려고 했다. 어떤 계산에 의하더라도 사람을 죽이려고 생각하는 것보다 사람을 살리고 도우려고 하는 것이 더 좋은 일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종교가 의식이었다. 이것은 어떤 규칙, 법칙, 그리고 규율을 복종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기독교는 교회에 출석하는 것, 성경을 읽는 것, 식사 때 감사 기도하는 것, 가정예배도 철저히 드리는 것, 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외면적인 행위를 실행하는 것만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이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동정도, 희생할 생각도 없고, 엄정한 정통주의에 빠져 세상을 향한 귀머거리가 되고, 세상의 눈물과 아픔에 장님이 되어 있다. 기독교의 신앙에 대해 종교놀이만 행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종교는 봉사요, 섬김이요, 희생이요, 사랑이요, 낮아짐이요, 십자가요, 인간욕구의 부르짖음에 대한 자발적 응답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하나님 명령에 대한 응답이다.
'설교 원고 > 마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17.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 (0) | 2021.05.27 |
---|---|
16. 예수를 만난 사람들 (0) | 2021.05.27 |
14.안식일의 주인 (0) | 2021.04.24 |
13. 고난과 금식 (0) | 2021.03.22 |
12.내가 레위입니다. (0) | 2021.03.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