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묵상(39) - 2022/8/1>
39. 희미한 믿음의 위험
막 8: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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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8: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8: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8: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8: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오늘날 교회가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가치가 상실되어 가고 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많은 기독교인들이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일상생활과 태도와 증거하는 일에 실패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가치를 잃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열심을 내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가장 핵심적인 교리를 참으로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이후부터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이 놀라운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교회는 침체되어 있었고, 율법에 얽매인 삶을 살기만 했지, 실제로는 구원의 확신, 믿음의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종교개혁은 초대교회 이후 교회가 알지 못했던 평강과 행복과 기쁨을 교회 생활에 다소간 불어 넣어 주었다. 이 모든 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중요한 교리가 재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진리는 마틴 루터를 즐겁게 해 주었고, 노래하게 했고, 결국 이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각오했던 것이다. 그 후 다른 사람들에게 이 놀라운 진리를 깨닫게 함으로 많은 사람이 이 진리를 싸웠고,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만약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놀라운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거나 모르고 있다면 기독교인이 아닐 수도 있다.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가련한 기독교인인 것이다. 만약에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이 놀라운 진리를 재발견하고 깨닫고 체험하면 가련한 기독교인이 아니라 기쁨이 넘치는 확신에 찬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다.
오늘 읽은 본문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다. 우리가 희미한 믿음을 가진 기독교인이냐? 아니면 밝히 보고 확신에 찬 기독교인이냐? 하는 것을 확실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벳세다’라는 동네에 가시니까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님께 왔다. 그리고 손을 대시고 안수하셔서 고쳐 주시기를 원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맹인의 손을 잡고 – 맹인의 손을 잡은 것은 앞을 보지 못하니까 손을 잡고 이끌어 주신 것이다 –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 사람의 눈에 침을 뱉으면서 그에게 안수 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다. 그 사람이 말했다. “예, 보이기는 합니다. 사람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입니다” 이에 예수님 다시 안수하시매 그 사람의 눈이 완전히 회복되어 만물을 밝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이 사건에 일어난 일들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 주님께서 눈먼 사람을 고치신 다른 예들이 있다. 예수님께서 눈 먼 사람을 고치실 때도 말씀 한마디로 고치신 일들이 있다. 주님은 그런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그에게는 불가능이란 없다. 다른 모든 병자들이나 장애자들에게도 말씀으로 고치셨다. 그러므로 그가 여기에서 행하신 일에는 분명한 깊은 의의와 목적이 있으시다.
성경에서 주님이 하시는 일에는 아무것도 우연이나 혹은 뜻하지 않게 되는 것은 없다. 주님의 모든 행동은 심사숙고 가운데 되어졌으며 예수님께 방법을 달리하실 때는 언제나 그렇게 하시는 데 대한 선한 이유가 있다.
어느 경우에든지 특별히 어려운 일이 있는 것은 없다. 병을 고치시는데에도 특별한 어려움이 있어서 다른 방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 자신이 의도하신 계획에 따라 어떤 교훈을 주시고 어떤 특별한 말씀을 주실 목적으로 방식을 바꾸시기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님이 행하신 모든 이적은 사건 이상의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비유도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님께서 중요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교훈을 나타내 가르치시기 위해 여기에서 눈먼 자를 치료하시는 방법을 다르게 하신 것이다.
이 사건이 중요한 교훈은 제자들을 위한 것이다. 더 나아가 교회의 성도들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고치시면서 제자들에게 실물 교육을 시키시는 것이다. 제자들이 앞으로 나가서 사역을 할 때, 또는 교회의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육신의 맹인도 있지만, 영적으로 보지 못하는 영적 맹인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다.
눈먼 자가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나 희미하게 보는 것이나 밝히 보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본다고 하지만 이거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이다. 밝히 보지 못하니까 사람을 보면서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전형적인 영적 맹인의 모습이다.
헬라어 원문에 보면 23절의 “눈”을 옴마타ὄμματα 로 옴마ὄμμα 의 복수로서 양쪽 눈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옴마ὄμμα 는 사물을 보는 기능을 하는 눈동자가 아니고, 그 눈동자를 덮고 있는 눈꺼풀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침을 완전히 눈을 감고 있는 그 맹인의 눈꺼풀 위에 뱉으시고 안수하신 것이다.
반면에 25절의 “눈”은 헬라어로 옵달무스ὀφθαλμοὺ 는 옵달모스ὀφθαλμό 복수이다. 두 눈을 말한다. 옵달모스ὀφθαλμό 는 눈의 기능을 말하는 눈동자를 말한다.
정리해보면 예수님은 눈먼 자의 눈꺼풀 위에다가 침을 뱉고 안수하신 후, 눈꺼풀이 열린 상태에서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었다. “보입니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입니다” 이 맹인은 눈꺼풀이 덮혀 있다가 눈꺼풀이 열렸지만 정확하게 보지를 못하는 것이다. 희미하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두 번째로 이번에는 눈꺼풀이 아니고 눈동자에다 안수했다. 그랬더니 밝히 보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눈꺼풀을 뜨고 있다고 해서 다 보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눈꺼풀을 뜨고 있어도 영적 눈이 안 열리면 맹인인 것이다. 희미하게 볼 수 밖에 없다.
25절에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라고 했다. 헬라어로는 디아블레포διαβλέπω는 디아(δια)와 블레페βλέπε의 합성어이다. 디아(δια)는 ‘~를 통하여(through) 라는 의미를 지닌 전치사이고, 블레포(βλέπε) 는 ’본다‘라는 동사이다. 그러니까 디아블레포διαβλέπω 는 ’~를 통하여 꿰뚫어 본다‘ ’~를 통하여 간파한다‘ 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어떤 도움을 받아, 또는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의 능력으로 ’꿰뚫어 보는 것, 간파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등등, 확실하게 밝히 알고 깨달아야 한다.
(엡4:13-14)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믿음)과 아는 것(지식)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 중에 믿음으로 산다는 사람들 중에 눈먼 사람이 눈을 고치는 과정에서 첫 번째 단계에 머물러있는 사람들이 많다. 첫 번째 단계에 머물러 있으면서 이 단계가 믿음 생활인 줄 알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왜 믿음에 힘이 없는가? 왜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가?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면서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살전1:3)를 기억하고 있다고 했는데, 우리는 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없는가? 특히 믿음에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가? 우리는 열심히 믿는데 왜 믿음에는 힘이 없는가? 역사가 없는 믿음으로 사는가?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1장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가 눈꺼풀만 뜬 상태에서는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구원 받은 의인이다‘라고 생각하고 말하지만, 믿음으로 못 사는 것이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이 되어야 되는데, 안 되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눈먼 자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었다. 누구에게 물었는가? 지금 누구에게 묻고 있는가? 나한테 묻고 있다. 여러분은 무엇이라 대답해야 하는가? 아니 지금 현 상태에서 예수님이 물으시면 무엇이라 대답하겠는가? 교회는 성도들에게 말씀으로, 성경공부로, 설교로 영적 눈이 열리게 해야 한다. “주목하여 보고 밝히 보입니다”라고 해야 된다. 수십 번, 수천 번, 수만 번을 설교를 들어도 이 눈이 안 열리면 안 되는 것이다. 이 눈이 안 열리니까, 늘 희미한 상태에 있으니까, 천국이 안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슴에 스며들지 않고, 가슴에 새겨지지 않고, 내 눈동자가 그 쪽에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 있는 이유가 뭔가?
1)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나의 구주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와 중생의 사실을 확실히 깨닫지 못하고 믿어지지가 않기 때문이다.
2)기독교와 기독교인의 위치에서 실제적인 행복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 안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의지가 흔들린다. 믿음이 흔들린다. 기독교인이기를 원하면서, 기독교인으로 남아 있기를 원하면서 늘 신앙은 흔들린다. 믿음의 의지가 흔들린다.
오늘부터 24절의 눈꺼풀만 열린 상태에서 머물러 있지 말라. 25절의 상태로 나아가라. 24절과 25절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다르다. 24절의 상태는 믿음의 상태가 아니다. 기독교인인 것 같으면서도 기독교인이 아닌 것이다. 못 보는 것이나 희미하게 보는 것이나 못 보는 것은 같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희한 상태에서는 구원의 확신도 없고, 눈물나는 은혜도 없고, 믿음도 없고, 감사와 기쁨과 주님을 향한 소망과 평강도 없다.
그러면 우리가 확실히 밝히 보고 확실한 믿음에 서는 비결은 뭔가? 믿음의 연약성을 솔직히 시인해야 한다. 시인은 고백인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눈먼 자는 예수님이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물었을 때 무어라고 대답하는가? “잘 보입니다. 정말 잘 보입니다” 라고 했는가? 보이지도 않으면서 보이는 척했나? 자기가 보는 상태 그대로를 말했다. “예, 보이기는 보입니다만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님은 한 번 더 안수해 주신다.
우리는 주님이 한번 더 안수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이다. 야곱과 같다 창세기 32장에서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면서 “내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지 않겠나이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주의 사자가 야곱의 이름을 몰라서 물었겠는가? 무엇을 원하시는 것인가? 내 모습 그대로이다. “예 야곱입니다”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라”
우리는 믿음의 눈을 열자.
우리는 영적 눈을 열자.
눈꺼풀이 떴다고 해서 눈이 열린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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