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묵상(38) - 2022/7/24>
38. 말씀의 누룩, 세상의 누룩
막 8: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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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4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8:15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8:16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8: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8: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8:19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8:20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8:21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1. 15절을 보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다. 여기서 ‘바리새인의 누룩’ 이란 바리새인들의 특징인 형식주의와 여기서 발생하는 독선과 위선을 가리킨다. 이는 눅12:1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는 말씀을 참고할 때 더욱 분명해 진다. 또한 ‘헤롯의 누룩’이란 세상의 이익에만 집착하는 세속적 탐욕을 가리킨다. 즉 주님은 제자들에게 형식주의와 세속주의를 경계하신 것이다.
종합해서 보면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너희가 나누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들이 집착해 있는 장로들의 유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고 그들처럼 교만하거나 외식적이거나 의식적이 안 되도록 주의하라.” 는 것이다. 그리고 헤롯당 사람들처럼 세상의 이익에 집착하고 탐욕과 세속주의에 빠지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는 “사두개인들의 누룩”이라고 첨가했고, 마가는 “헤롯의 누룩”이라고 첨가했다. 이것은 사두개파 사람들이나 헤롯당파 사람의 속성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경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는가? 먼저 성경을 보면 누룩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에서 다 사용되고 있다. 주님은 천국과 복음의 확장성을 말씀하시면서 누룩 비유를 말씀하셨다(마 13: 33).
그리고 본문에서는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부정적인 영향력을 말씀하시기 위해 또한 누룩 비유를 사용하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세상은 천국과 복음이 확장되어가는 장소인 동시에 악의 세력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가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의의 세력과 불의한 세력 간에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해 보여도 사실 내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영적 싸움이 전개되고 있는 치열한 전쟁터와 같다. 즉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나라가 각각 복음과 탐욕을 무기로 세상을 얻기 위해 첨예한 싸움을 벌이는 치열한 각축장과 같은 것이다. 이는 마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대기 가운데 차가운 공기와 따뜻한 공기가 각각 한랭전선과 온난전선을 형성하면서 대립, 충돌하면서 각종 돌풍과 폭우를 일으키는 현상과 같다.
우리 성도는 이런 영적 전쟁터에서 천국을 위해 부름받은 그리스도의 군사들이다. 그러므로 천국 복음이라는 누룩을 지닌 우리는 오늘 이 시간도 쉬지 않고 퍼져가는 세상 누룩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믿음생활을 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는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는 무서운 운동력이 있다고 했다(히4:12).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세상의 누룩을 피하고 주의하는 것은 물론, 한 걸음 더 나아가 말씀의 검으로 사단의 골수를 찔러 쪼개고 천국의 누룩으로 부패해 가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향기로운 누룩, 능력 있는 하나님의 군사들이 되어야 하겠다.
(고전5:6-8) “(6)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2. 15 절에 보면 주님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고 했다. 여기서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이란 그들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특히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와 헤롯당의 세속주의를 가리킨다. 이러한 형식주의와 세속주의는 바로 신앙생활에 치명적인 해악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 “누룩”이 무엇인가? 왜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을 먹는가? 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라고 하는가? 누룩은 음식물을 발효시키고 부풀리는 데 사용하는 효소이다. 밀가루 반죽 등에 이 누룩을 조금 넣어도 금새 발효되고 부풀어 오르게 된다.
또 하나님께 드리는 소제에는 꿀을 넣지 말라고 했다.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레2:11)
누룩과 꿀은 맛을 낸다. 누룩과 꿀을 넣지 않는 밀가루 반죽과 누룩과 꿀을 넣은 밀가루 반죽의 맛은 너무나 다르다. 쾌락과 향락, 즐거움, 기쁨을 의미한다. 하나님 말씀 안에서의 기쁨, 즐거움과 세상적인 기쁨, 즐거움은 다르다. 요즘은 “인생은 즐겨야 한다.” “즐기면서 살아야 한다.” 인생을 즐기며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무엇을 위한 즐거움인가? 세상적인 향락으로부터 오는 즐거움인가? 예수 없는, 말씀 없는 말씀 밖의 즐거움인가? 성도가 세상적인 향락과 쾌락에 빠지면 예수 없는 삶, 예배 없는 삶, 말씀을 떠난 삶이 된다.
그리고 누룩은 악한 교훈을 말하기도 한다. 누룩은 조금만 넣어도 금새 발효되고 부풀어 오른다. 파급효과가 엄청나게 크다. 악한 교훈의 영향력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심각하다.
악한 교훈은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사소한 것이라도 일단 한번 교회나 기독교 공동체 안에 들어오게 되면 순식간에 기독교 공동체 전체에 파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실로 악한 교훈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한번 오염되면 기독교 전체를 부패시킬 만큼 막강한 것이다. 개인에게도 악한 교훈은 신앙에서 멀어지게 하고, 타락하게 하고 변질시킨다. 한 인생을 완전히 치명적인 변질된 인생을 살게 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교회사를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교회사를 보면 교회는 외적인 핍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을 때 거짓 교사들의 거짓 교훈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었는데, 거짓 교사들의 교훈은 많은 성도들의 피를 흘린 박해자들보다 더욱 심한 해악을 끼쳤다. 왜냐하면 박해자들의 칼과 창은 믿음의 본질을 훼손하지 못했으나 거짓 교훈은 믿음의 본질을 훼손시켜 많은 성도들로 믿음에서 실족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박해자들의 핍박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거짓 교사들의 악한 교훈이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악한 교훈을 가지고 접근해 오는 거짓 교사들이 수없이 많다. 그리고 그들의 악한 교훈은 불행히도 진리와 유사한 모습을 띠고 있어서 여간 주의하지 않으면 구별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더하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위기는 외적인 압력과 박해가 아니라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판치는 이단들과 세상 문화의 교회 침투이다.
따라서 교회와 성도는 모든 교훈을 다 믿지 말고 그 교훈이 진정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것인지를 살피고 분별하며, 만일 그릇된 것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단호히 배척함으로 거짓 교훈이 교회와 성도들 가운데 침범하지 못하도록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겠다. 거짓 교훈을 구별해 내고 막는 일에는 우리가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지나침이 없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갈 2:4)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 도다"(딛 1: 11)
3. 은혜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17절부터 21절까지는 떡을 준비하지 못함을 염려하고 있던 제자들을 책망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보듯 주님께서는 이미 오병이어의 기적(막6 :34-44)과 칠병이어의 기적(막 8:1-9)을 통해 자신이 과거에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던 바로 그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셨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이처럼 풍성한 기적을 일으키시는 주님을 앞에 두고도 떡과 누룩에 대한 말씀을 듣자 떡이 없는 것을 염려하였을 뿐 주님의 진정한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즉 그들은 주님께서 넘치도록 여러 가지 표적을 통해 당신의 실체를 거듭 계시해 주셨건만 마음이 둔하여 깨닫지 못함으로써 주님이 말씀하시는 풍부한 영적 진리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이 말씀을 바로 이해하지 못해서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22:29)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막12:27)
우리가 말씀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이렇게 오해함으로 신앙생활을 잘못하게 된다. 오는 본문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오해함으로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면서 심히 논쟁했다. 본문의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라는 말의 원어 헬라어를 보면 διαλογίζομαι(디알로기조마이), “논쟁하였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들은 서로 ‘당신 때문에 그런 것이다’ 라고 논쟁한 것이다. 말씀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분열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잊어버리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면 믿음도 없어지고, 마음의 감사와 기쁨, 평강도 없어져 버린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너 때문이다’ 라고 남탓하는 소리가 내 입에서 나온다면 우리는 은혜가 없어져 가는 증거이다.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 주님의 안타까운 책망의 소리를 듣지 않아야 한다.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17절)
일찍이 공자는 “사람들이 매일 음식을 먹으면서도 정작 그 맛은 모른다.” 고 개탄한 적이 있다. 즉 공자는 감각이 둔해진 사람들이 매일 먹는 음식의 참된 맛을 분별할 줄 모르듯 학문의 오묘한 즐거움을 모르고 있음을 탄식한 것이다.
그런데 이는 비단 음식과 학문 뿐만이 아니라 영적 진리와 은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글자를 앞에 놓고도 읽을 줄 모르면 문맹(文盲)이라고 하듯이 영적 진리와 은혜를 앞에 놓고도 이를 느끼지 못하면 영맹(靈盲)이라고 불러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사람의 몸에 병이 들어 감각이 마비되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입에 넣어도 도무지 그 맛을 느끼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도 세상 근심과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병들어 있으면 하나님께서 많은 표적을 보이시고 은혜를 부어주셔도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다고 불평하기 전에 말씀으로 닫힌 눈을 열고, 성령으로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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