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마가복음

36. 사천 명을 먹이심

☆ 주님의 머슴 2022. 7. 11. 17:29

<마가복음 묵상(36) - 2022/6/6>

36. 사천 명을 먹이심

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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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갈릴리 후기 사역을 보도하는 6:7-9:50의 연속 부분이다. 여기서는 귀먹고 어눌한 자의 치유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7:31-37 에 이어 칠병이어의 이적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이 이적 사건 역시 갈릴리 동편 지역에서 있었는데 귀먹고 어눌한 자를 치유하신 직후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일부의 사람들 중에는 본문의 이적 사건과 6:30-44에 나타난 오병이어의 이적 사건을 동일한 사건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전혀 다른 별개의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첫째, 주님 스스로의 분명한 확인이다(19, 20). 주님은 자신의 입으로 친히 두 사건이 각각 독립적인 사건임을 증명하고 계신다. 둘째, 떡의 갯수의 차이이다. 두 사건은 다섯 개와 일곱 개로 떡의 갯수에 있어서도 분명한 차이가 있다. 셋째, 먹인 사람 수효의 차이이다. 두 사건은 남자 장정을 기준으로 할 때 천 명의 차이가 있다. 넷째, 무리들에게 먹이신 날의 차이이다. 오천 명의 무리를 먹이신 사건은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가르치신 바로 그 날 이루어졌지만(6:35), 반면 사천 명의 무리를 먹이신 사건은 예수님께서 무리와 함께 계신 지 사흘이나 지나서 이루어졌다(2). 다섯째, 남은 음식을 담은 바구니의 차이이다. 오천 명을 먹인 사건에서 사용되었던 바구니는 코피노스(κάϕινο?)’ 로서 유대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개인 휴대용 작은 바구니이지만(6:43), 사천 명을 먹인 사건에서 사용되었던 광주리는 스퓌리스(σπυρίς)’로서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큰 바구니이다(8,9:25). 여섯째, 시간과 장소적 배경의 차이이다. 즉 오천 명을 먹인 사건에서는 사람들이 앉은 곳이 푸른 잔디위였지만(6:39), 사천 명을 먹인 사건에서는 위였다 (8:6). 이는 두 사건의 시간과 장소가 현저히 다르다는 것을 가리킨다. 즉 앞선 사건은 유월절이 임박하여 새싹이 돋아나는 초봄에 일어났으나 본 사건은 그로부터 상당 시간이 흘러 풀들이 말라버린 건기에 일어났다. 일곱 번째, 기적이 이루어진 직후 예수님께서 취한 행동의 차이이다. 오천 명을 먹인 사건 직후에 예수님은 무리는 물론 제자들과도 작별하여 혼자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지만(6:45.46), 사천 명을 먹인 사건 직후에 예수님은 무리들과만 작별하였을 뿐 제자들과는 작별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다음 사역의 장소로 배를 타고 이동하셨다(10). 마지막으로, 오천 명 먹인 사건은 유대인을 상대로, 사천 명을 먹인 사건은 이방인을 먹인 사건이다.

 

이상과 같은 정황들을 볼 때, 오천 명을 먹인 사건과 사천 명을 먹인 사건은 분명히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 이루어진 각각 독립된 사건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두 이적 사건은 이렇게 명백히 구분되는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주가 되신다는 점 외에는 그 영적 의미에 있어서는 오병이어의 이적과 동일하다.

 

한편, 이러한 칠병이어의 이적 사건을 통해서 본문에 담긴 구체적인 영적 교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만이 참 생명과 풍성한 삶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이다. 본문은 소위 칠병이어의 이적으로 불리는 주님께서 보리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이다. 이 이적은 이방 땅 데가볼리 지방에서 베풀어졌다. 따라서 이 이적은 뱃새다 지방에서 베풀어졌던 오병이어의 이적과 유사하지만 분명하게 구별되는 이적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유사한 이적을 이스라엘 땅과 이방 땅에서 각각 한 번씩 두 번 베푸신 것이다. 주님은 주님 앞에 나아온 자들을 결코 굶주린 상태로 돌려보내시지 않았다. 그분은 자신께 나아온 자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그것도 단지 몇 개의 보리떡과 몇 마리의 물고기로 말이다. 당시에 선생이라는 자들이 많았고 또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스스로 인류의 구세주로 자칭하는 자들이 수 없이 많았지만, 그들은 도리어 사람들을 억압하고 그들의 가진 것을 갈취함으로 사람들로 더욱 피폐한 삶을 살게 할 뿐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인간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 주님만이 인류의 유일한 대안이다. 그분만이 우리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실 수 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이를 위해서이다. 주님은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10)고 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참 생명을 얻고 풍성한 삶을 누리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 곧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사실 주님께서 두 번씩이나 비슷한 이적을 베푸신 것은 우선은 무리의 배고픔을 채워 주시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 안에만 참 생명과 풍성한 삶이 있음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사실 이 시대는 혼탁하다.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인간성은 더 악해지고, 더 극도의 이기적으로 흐른다. 더 큰 욕심과 더 큰 욕망으로 달려간다. 이런 때 일수 록 예수만이 우리 희망이요, 교회만이 희망이다. 말씀만이 우리에게 길을 알려 준다.

 

우리는 본문과 오병이어의 이적을 대하면서 이 사실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더욱 주님을 가까이하며 그분에게서 떠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은 당신께 나아오는 자들을 얼마든지 구원하시며 그 삶을 풍성케 하실 수 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 12)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3:20)

 

하나님은 성도의 모든 형편을 헤아리고 계신다. 2절과 3절은 굶주린 무리들에 대하여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먼저 2절을 보면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라고 하였다. 즉 주님께서는 사흘 동안 무리들에게 하늘의 복음을 가르치시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수중에 육신의 양식이 떨 어진 것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게다가 계속해서 3절을 보면 무리들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는 것까지 모두 알고 계셨으며만일 그들을 현재의 상태로 흩어 보낸다면 그들이 먼 길을 가는 동안 주려 기진할 것까지도 알고 계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성도의 형편을 섬세하게 헤아리고 계시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높고 높은 곳에 계시며, 더구나 성경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4:24) 육신을 지닌 우리 인간들의 온갖 애환과 아픔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보라. 주님께서는 하늘의 진리를 가르치시면서도 육신의 양식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셨고더구나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히 멀리서 온 사람들이 겪어야 할 어려움까지 헤아리고 계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형편에 대해 모르거나 무관심하신 것 같아도 이미 다 헤아려 알고 계신다. 그렇다. 우리의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인간들의 어려움과 아픔을 깊이 헤아리고 계신다.

 

우리 인간들은 같은 육신을 입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배부르면 절대로 배고픈 자의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의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지 않으시다. 즉 우리의 하나님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면서도 가장 비천한 자들 의 아픔까지 알고 계시며, 동시에 그들의 아픔을 당신의 아픔으로 느끼고 계시는 것이니다.

 

심지어 우리 주님께서는 죄가 없으시면서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사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친히 체휼하시기까지 하셨다(4:15).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처한 모든 형편을 미리 다 헤아리고 계실 뿐만 아니라 또한 도우실 준비를 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은 그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절대로 낙심하지 말자. 도리어 우리의 모든 어려움을 체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도움을 간구하자. 우리의 모든 형편을 헤아리시고 도울 준비를 마치신 하나님께서 어찌 우리를 어려움 가운데 내버려 두시겠는가?

 

긍흘이 넘치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간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여러분에게 도움의 손길을 펴시되 그 삶을 풍성케 하실 것입니다.

“(1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14)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33:13,14)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40:27)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처한 모든 형편을 미리 다 헤아리고 계실 뿐만 아니라 또한 도우실 준비를 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은 그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절대로 낙심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