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2017/1/8)-요한계시록(7)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계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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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8절까지 요한 계시록의 서론이 끝나고, 2장부터는 본격적으로 일곱 교회에 보내는 말씀을 시작합니다. 그전에 1장9절부터 20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먼저 9절에서 10절은 요한이 교회에 자기의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성도가 이 세상을 어떠한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모든 성도들의 대표입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의 삶의 자세, 신앙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자기를 가리켜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소개하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요한의 소개일 뿐 아니라 바로 ‘성도란 누구인가?’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본문 9절에 있는 “예수의” 라고 번역이 된 ‘엔 이에수스’(ejn !Ihsou'")는 원래 ‘예수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예수의 환난과 예수의 나라와 예수의 참음에 동참하는 자다“ 라는 말입니다.
이 “예수 안에서” 라는 말은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union christ’ 입니다. 이 ‘union christ’(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잘 이해하시면 오늘 본문은 저절로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이 이해되지 않으면 이 요한계시록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구원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만 한군데만 찾아보겠습니다.
(롬6:3-5)『(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죽었고, 장사되었고, 다시 살리심을 받아 부활을 했다는 설명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면서 ‘세례’를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세례”는 물을 뿌리거나 물에 잠그는 일반적 세례 의식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한 물세례 의식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받은 의식으로 할례를 받은 것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의 표시인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세례는 다른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세례’ 라고 번역이 되는 헬라어의 단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밥토’(bavptw) ‘물에 담그다’‘물에 씻는다’ 라는 말과, 또 하나 성경에 나오는 ‘밥티조’(baptivzw) 라는 두 단어입니다. ‘밥티조’는 단순히 물에 담그는 행위가 아니라, 어떤 수단에 의해서 일어나는 변화 즉, 어떤 방법을 가해서 사물의 본질이나 성격이 변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헬라 사람들이 피클 만드는 방법을 써 놓은 책이 발견이 되었는데, 그 책에 의하면 피클을 만들 때 오이를 끓는 물에 담그고 (밥토), 식초용액에 오래 담가서 오이 성질을 바꾸는 것입니다(밥티조, 영구적인 변화).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세례(밥티조,baptivzw)는 물에 담근다는 의미보다는 담가서 변화된다는 것에 더 강조점이 있은 것입니다. 세례, ‘밥티조’는 어떤 외부의 영향으로 영구적으로 성질이 변화되는 것을 ‘세례’-‘밥티조’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례와 그리스도와 연합을 좀 더 쉽게 설명을 한 구절이 있습니다.
(고전10:1-4)『(1)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보세요, 홍해를 건넌 것을 성경은 이스라엘의 세례로 표현을 합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세례가 단순히 물에 젖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홍해를 마른땅처럼 건넜습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면서 신발도 젖지 않았습니다. 정작 홀랑 젖은 사람들은 애굽 군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이스라엘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 왕의 노예로 있다가 홍해에 빠져 그 애굽 왕의 종들은 다 죽고, 홍해를 건넌 후에는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의 종 모세에게 속하여 하나님을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살아 올라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허락하셔서 사랑하는 종 모세를 건져 내시면서 이스라엘을 그 모세 안에다가 넣으셔서 그들을 모두 모세로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여전히 그들의 실존은 불가능하고 불순종하는 애굽의 종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모세를 통해서 보시고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겨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것을 상징하는 것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구원하기로 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들이 여전히 불가능하고 불순종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안으로 집어 넣으셔서 의로운 예수로 여겨서 구원해 주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예수 안에다가 우리를 넣어버리십니다. 그래서 예수를 통해서 우리를 보십니다. 우리는 분명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부활 한적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킨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예수님 안에 넣으셔서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산 것처럼 여겨 주십니다. 말이 안 되지요? 그래서 성경은 복음은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자기가 어떤 인간인지 실감하고 지각한 사람들은 그 방법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요. 신학에서는 그러한 것을 “내포적 대신(inclusive representative)” 라고 합니다. 로마서로 가서 조금 더 자세하게 보겠습니다.
(롬6:8-11)『(8)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11절의 ‘여길 지어다’는 헬라어로 ‘로기 조마이(logivzomai)’입니다. 그 말은 그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여겨 주신다는 말인 것입니다.
(갈3:27) 『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왜 세례 받느냐?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받습니다. 세례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된 자들은 이제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자요, 그리스도와 합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접붙임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나무 가지를 잘라서 다른 나무의 표피를 가르고 거기에 붙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접붙임을 한 나무 가지는 이내 그 나무와 한 몸이 됩니다.
그 가지는 이제 그 나무와 모든 생명의 현상을 같이 하게 됩니다. 같이 바람에 흔들리게 되고, 같이 꽃을 피우고, 같은 열매를 맺습니다. 고통도 같이 겪고, 기쁨도 같이 겪습니다. 그 나무가 죽으면 같이 죽게 되고 그 나무가 땅에 묻히면 함께 묻히는 것입니다.
(롬11:17)『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 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우리가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께 접붙임이 되면,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함께 죽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함께 부활하게 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실 때 우리는 함께 그 곳에 앉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갈2: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만 연합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든 부분에 연합된 것입니다.
그 삶이 어떤 삶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환난의 삶을 살다 가셨습니다. 배신과 따돌림과 조롱과 핍박을 당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 그도 예수님과 똑같은 환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포악하기로 악명이 높은 도미티안 황제 때 사도 요한은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밧모 섬에 유배를 가서 그 열로 한 나이에 광산에서 부역을 했다고 합니다. 환난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로서 ‘예수 안에서’ ‘환난과 나라와 참음’ 에 동참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은 환난에 동참하는 자입니다.
이 ‘환난’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뜨륍시스’(qlivyi")라고 합니다. 이 말은 ‘억압’, ‘압제’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tribulation’입니다. 라틴어로는 ‘triblum’ 탈곡기라는 말입니다. 고대의 탈곡기는 아래에다 홈이 나 있는 철판을 깔아놓고 위에서 빗살무늬의 철판으로 비비는 것이었습니다. 성도의 환난은 그만큼 고통스럽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맞다 면, 여러분도 바로 그 예수의 환난에 동참하시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고 하시는 것입니다.
(요16:33)『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행14:22)『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딤후3:12)『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계7:13-14)『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예수의 환난에 동참하게 되어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환난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롬5:3-4)『(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3절에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라는 구절을 보세요. 거기서 즐거워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카우카오마이’(kaucavomai)입니다. 이 말은 ‘자랑하다, 뽐내다’의 뜻입니다. 성도는 환난을 자랑한다, 뽐낸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환난을 자랑할 수 있게 될까요? 이유가 4절에 나옵니다.
“~을 앎이로다.” 무엇을 알기 때문에 환난이 자랑이 됩니까? 그 환난이 인내를 이루어 내고, 인내가 연단을 이루고, 연단이 소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환난은 결국 소망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에 환난이 올 때 ‘아, 난 정말 그리스도인이구나.’하고 자랑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3절에서 환난이 인내를 이룬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인내”는 ‘uJpomonhv 휘포모네’라는 말로 단순히 ‘꾹 참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휘포모네’는 정절을 지키며 변치 않고 어디에 굳게 서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도에게 있어서 환난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 굳게 서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성령에 의해 거듭난 성도는 환난을 당하면서 힘들어하는 자신을 보면서 ‘난 정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고 있지 않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기도 하고 ‘이 세상에서 정말 의지할 분은 하나님 밖에 없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의 환난은 새로 거듭난 자기 안에 공존하는 죽을 몸, 옛 성품을 자꾸 쳐서 약화시켜줍니다. 그리고 겸손해지고, 자기 자신의 부족을 늘 느끼며,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열심히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환난을 겪으면서 육신을 약화시키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고, 하나님만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휘포모네’ 이며, 환난이 인내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욥42:5)에서 환난을 통과한 욥이 이렇게 고백하잖아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환난을 통과하고 욥이 한 말입니다. 환난은 우리들을 오히려 하나님 앞에 더욱 굳게 서게 만듭니다.
그리고 인내는 연단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연단(단련)이라는 말은 ‘dokimhv 도키메’는 ‘어떤 목적에 부합하도록 질이 검증된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철도를 만들 때 철로에 쓰일 쇠를 만들 게 됩니다. 그 쇠는 철로로 깔리기 전에 수십 톤짜리 하중을 견딜 수 있는지 미리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검증을 받아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 철로에 쓰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환난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인내는 그를 검증된 자로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단’-‘dokimhv 도키메’는 우리의 소망을 더욱 구체적으로 붙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 성도는 환난을 ‘자랑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를 보면 그 진리를 이렇게 동일하게 설명합니다.
(약1:12)『시험(peirasmov" 페이라스모스)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dovkimo" 연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그러니까 환난은 우리의 소망을 굳게 붙들게 만드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환난이 올 때 ‘성도들아 기뻐하라’ 하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도 동일한 명령이 나옵니다.
(약1:2-4) 『(2)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peirasmov"페이라스모스) 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벧전4:12-13) 『(12)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페이라스모스)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들의 삶에 환난을 허락하십니다. 말려주지 않으십니다
(빌4:6-7)『(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고난을 없애 주신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너희들 원하는 것 다 들어주겠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도 변치 않는 평강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환난은 그러한 유익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아울러 그리스도인들에게 왜 환난이 필요하냐 하면, 우리는 세상과 원수인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계1:9절 후반부를 보시면 사도 요한이 왜 밧모 섬에 유배를 당하는 등의 환난에 처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확실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계1:9)『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왜 밧모 섬에 귀양을 가게 된 것입니까? 왜 요한이 환난을 당하고 있지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다 전에 그랬습니다만, 아담의 후손으로 오는 죄인들은 나면서부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자들을 당연히 못 마땅히 여깁니다. 모두가 한 통속이 되어서 죄를 짓고 있는데, 어떤 무리가 그 죄와 싸우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환난과 핍박에 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와 세상이 그들을 가만히 둘 리가 없지요.
(계20:4)『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사람들은 목 베임을 받는 것과 같은 고통에 던져 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환난에 동참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도 동참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해서 우리는 그 나라에 동참해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골1:13)『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약2:5)『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는 이렇게 이미 하나님 나라에 동참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 자체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제 Made in Heaven이 된 것입니다.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난 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하나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원수들 사이에서 천국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내가 천국을 가지고 악의 무리 속에서 견뎌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마음에 품고 십자가의 원리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 세상은 그 꼴을 도무지 두고 보지를 못합니다. 져 주고, 용서해 주고, 사랑해 주면 그들은 반성을 하거나 존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얕보고 더 밟아 버리는 세상의 힘의 원리로 우리 성도들을 대하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들에게는 환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로 이 땅을 살아야 합니다. 그 십자가의 원리로 통치되어지고, 그 십자가의 원리를 삶의 원리로 하여 사는 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 바로 교회요, 천국과 잇대어 살아가는 자들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그 하나님 나라는 완전히 우리 눈앞에 드러날 것이고, 나타나 보여지 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를 밟으면서, 꿈꾸면서 하나님 나라를 품고, 뜬 구름 위에 올라 타 있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성도들인 것입니다.
나라의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도 아니고 영토도 아니고 누가 다스리느냐? ‘통치권’ 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을 살면서 하나님의 통치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순종하기를 노력하는 자들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있고 그 통치에 순종하는 백성들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 나라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원수들, 대적들이 함께 공존합니다. 그래서 그 통치에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감수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사는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며, 그들이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눈에 보이도록 가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그들은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인내하며 각인의 눈이 그 나라를 볼 수 있는 바로 그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사도 요한이 9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그 분의 환난에 동참하고, 그 나라에 동참하며, 예수님의 참음에 동참합니다.
셋째는, 그리스도인은 같은 형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만 연합이 된 것이 아니라, 서로 서로와도 연합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한 몸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한 피가 흐르고, 한영을 소유하게 된 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자기를 가리켜 ‘너희의 형제요’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형제는 피를 나눈 사이가 아닙니까? 한 아버지를 둔 한 핏줄 아닙니까? 한 맏형을 둔 피붙이입니다.
(롬8: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맏형이십니다.
(히2:11-12)『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그러니까 교회는 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형제들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교회라는 곳에서 섬기는 하나님은 참 여러 종류인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형제들이 많이 싸우는지, 왜 그렇게 하나님이 여러 종류인지, 아버지 하나님이 여러 종류라서 씨가 다른 형제가 많은 것 같고, 어머니가 달라서 배가 다른 형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씨가 다르고, 배가 다른 형제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교회는 한 형제이잖습니까? 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잖습니까? 아버지는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고, 어머니는 하나인 성경 말씀이잖습니까? 그런데 왜 형제가 다릅니까?
여러분, 그래서 교리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피를 나눈 형제는 아버지에 대한 신앙고백이 하나입니다. 바른 교리 아래서 바른 아버지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형제 됨의 유일한 근거는 바른 교리입니다. 바른 교리 아래서 바른 하나님을 고백하는가? 그것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한 형제입니다. 한 핏줄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가 공존하는 교회시대를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정과 일터에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함께 어우러져 살아나가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또 하나의 가족이 있습니다. 이 가족은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 가족입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가 진짜 여러분의 형제들 자매들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가족관계의 개념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막3:33-35)『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교회가 예수의 참된 가족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고전12:25-26)『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이렇게 우리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이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가 모일 때 여러분은 자라나게 됩니다. 열심히 모이기를 힘쓰세요. 그래서 성경도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를 나눈 형제들이 자매들이 서로를 아껴주고 격려하고 조언해주며 서로의 시금석이 되어주고 하면서 자라 가는 것이 교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이미 영적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아직은 눈에 보이도록 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반드시 속히 올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인내하며 참아야 합니다. 흔들리시면 안 됩니다.
(마10:2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8:24-25)『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 지니라』
(계3:10)『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잘 참으세요. 잘 견디세요. 예수께서 이기셨습니다. 우리도 이깁니다. 반드시 이깁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사도 요한의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야 할 우리들이요,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하는 말씀의 요지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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