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2017/01/15) - 요한계시록(8)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을 본 자
계1:10-16 17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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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뵙고, 그 임재를 체험할 때,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더욱 온전해 집니다. 이 시대의 최고의 희망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개인적인 희망들이 있겠지만, 올 새 해의 여러분의 최고의 희망이 무엇입니까? 그 무엇보다 우리의 최고의 희망은, 주님이 우리에게 충만하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에게 임하시기만 하면 다 되는 겁니다.
모든 문제는 주님이 임하시면 다 끝나요. 지금 성령으로 임하시면.. 우리 영혼의 문제가 끝나고, 장차 재림으로 임하시면.. 우리 육체 뿐 아니라 우주의 모든 문제까지도 끝납니다. 그래서 우리의 한결같은 기도의 제목은 사도 요한처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가 되어야 합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어떻게 임하시든지, 임하시면 복이 될 텐데, 사람들이 세상 것만 추구하든지 아니면 낙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주의 영이 충만하게 임하시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 주님의 영이 임하시면 어떤 축복이 올까요?
오늘 본문10절을 보시면 사도 요한이 그 계시를 받은 날이 명확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주의 날”에 사도 요한은 성령 안에서 무언가를 봅니다.
여기서 주의 날이라고 번역이 된 말은 ‘큐리아케 헤메라’ kuriaκή hJmevra 입니다. 원래 구약에서도 ‘주의 날’, ‘여호와의 날’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신약에서도 ‘주의 날’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주의 날”은 예수님이 마지막에 재림하는 날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 주의 날을 즐겨 사용했고, 또 “그 날” 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 날”을 늘 사모했습니다.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도 주님이 오시는 “그 날”을 늘 사모하며 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이 “주의 날”은 예수님이 재림해 오시는 “그 날”이 아니고, 오늘날로 말하면 “일요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요, 승천하신 날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오신 오순절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시대에는 사도들부터 시작해서 이 일요일, 즉 오순절과 부활하신 날을 기독교인들의 공적인 “예배의 날”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요일을 주의 날로 정하고, 기독교 2천년 동안 변함없이, 이 날을 예수님께 예배하는 주일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날을 부인 하거나, 구약의 전통을 따른다는 명목으로 안식일을 예배의 날로 정해야 한다고 하면서 토요일을 예배일로 정하고 예배하는 이단들이 있는데, 그 이유가 그럴 뜻해 보이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이요, 오순절의 성령을 부인하는 것이요, 사도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도적 전승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교묘하게 기독교를 내 세우지만, 결국 기독교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이단들의 술책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되어 가서 매 일요일마다 에베소에서 있었던 주일 예배, 공중집회를 늘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밧모섬에 유배되어 와서 그 주일 예배가 그리워서 매 주일마다 개인 예배장소를 정해 놓고 마음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그러든 어느 날 주일에 사도 요한이 성령 안에서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듣습니다. 10절에 나오는 ‘성령에 감동하여’는 ‘엔 프뉴마티 ejn pneu'maτι’ ‘성령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그는 밧모 섬이라는 환난의 장소에서, 주일에,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본문 12절, 13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보시면서 그 모습을 한번 그려보십시오.
(계1:12-13) 『(12)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주의 날에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거기서 그는 일곱 금 촛대를 보았습니다. 일곱 금 촛대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교회라고 했습니다.
(계1:20)에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 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입니다. 일곱 교회는 일곱이라는 완전수를 써서 전체 교회, 교회시대의 모든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교회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서 계십니다. 인자 같은 이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인자 같은 이”는 (단7:13-14)에서 인용한 말입니다. 『(13)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다니엘서에서 다니엘이 왜 “인자 같은 이” 라고 했느냐 하면, 앞으로 오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니엘이 예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도 자기 스승이시고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어서 다니엘처럼 인용해서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바로 그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예전에 변화 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함께 본 바로 그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뒤에 계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40년 전에 변화산에서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보았던 그 분을 보면서 너무 황홀했습니다. 그래서 감히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분이 일곱 촛대, 즉 교회 사이에 계신 것을 본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저 하늘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앉으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세세토록 우리 교회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인지하셔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교회 사이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사도 요한을 부러워하십니까? 나도 그런 체험 한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시나요? 여러분, 우리는 지금 사도 요한과 똑같이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계신 분들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을 예배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예배하고 계십니까? 영과 진리로 예배하고 계십니다.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
여기에서 앞의 “영”은 하나님의 영이고, 뒤에 나온 “영”은 내 속에 와 있는 성령, ‘엔 프뉴마’와 같은 단어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진정으로 예배를 하고 계신 분들이면 여러분도 지금 사도 요한과 꼭 같이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계신 분들입니다.
사도 요한이 주의 날에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유배되어 중노동을 당하는 환난의 밧모섬의 현실 속에서,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은 사도 요한 자신 속에 와 계시는 성령입니다. 그러니까 요한 자신의 프뉴마, 요한 자신의 성령입니다. 우리는 내 속에 성령이 오셔서, 내 속에 와 계시는 성령이 나를 위해 역사해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성령이 강하게 역사할 수 도 있고, 내 속의 성령이 약하게 역사할 수도 있습니다. 내 속에 성령이 없어서 전혀 성령이 역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순간, 성령이 와서 내 속에 딱 갔다가 붙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속에 와 계시는 성령으로 아니고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시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고전12:3). 오늘 사도 요한은 자기 속에 와 계시는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여 자기 뒤에서 말씀하시는 큰 음성을 듣게 되고, 40년 전에 변화산에서 보았던 그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내 속에 와 계시는 성령, 나의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면 오늘 사도 요한처럼 10가지의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10절에 사도 요한은 성령에 감동되어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팔은 성경에서 늘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됩니다. 하나는 항상 하나님의 백성들을 깨울 때 쓰던 것입니다. 잠자는 성도를 깨울 때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의 재림을 말할 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한에게 나타나시면서 잠자는 자를 깨우고, 재림을 알리는 것으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 땅의 모든 교회의 대표요, 모든 성도의 대표입니다. 모든 성들을 향하여 “잠자지 말고 깨어 있으라. 내가 곧 재림한다.” 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빛을 잃어 가는 이 시대의 교회에게 나팔을 부시는 것입니다. 점점 빛을 잃어 가고 있는 현대 교회를 향하여 “깨어 있으라. 곧 재림 하신다” 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1. (예수님의 모습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계셨습니다(1:13).
맨 먼저 우리 예수님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계셨습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입는 옷이 그 사람의 신분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발에 끌리는 옷은 제사장의 옷을 말합니다. 제사장들은 성전에 들어갈 때에 발 뿐 만이 아니라 신체의 어떤 부분의 살도 겉으로 나오면 안 되었습니다. 얼굴과 손을 제외한 모든 부분은 철저하게 가려져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이후 인간의 몸은 죄를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모든 부분을 철저하게 가렸습니다. 그래서 항상 제사장들은 머리에 관을 쓰고 발을 덮는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제사장의 옷은 성막과 같습니다. 성막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전입니다.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제사장이 성막을 입고 있다는 것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신 그 분의 고난과 죽음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제사장의 옷을 입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읽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사명은 백성의 죄를 대신 사해주는 것입니다. 죄 있는 자를 죄 없다 해줍니다. 모두 탕감하는 사명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도 담당하셨습니다. 다 탕감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확신입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예수님만 영접하면 어떤 죄인이든 다시는 죄를 묻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믿음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양심의 자유를 누리게 하십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3:17)
2. (주님의 모습은) 촛대 사이에 계셨습니다(1:13).
그 제사장의 옷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촛대 사이에 서 계십니다. 2장1절에 보면 에베소 교회에 예수님이 오실 때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모습”으로 오십니다.
“일곱 촛대”는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 거니시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교회는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건물은 예배드리는 예배당입니다. 여기서 교회는 성도 각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가 교회입니다. 내 속에 성령이 와 계셔서 우리가 성전인 것입니다.
(고전3:16)『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6:19)『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촛대 사이에 계신다는 것은 우리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의 영이 임하시면 임마누엘을 체험하며 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요14:20)『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마18:20)『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엡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여러분은 지금 혼자입니까? 주님과 함께입니까? 주님이 함께 하신 것을 경험하며 살아야 정상입니다. 이것을 '임재의식'이라고 하는데, 이처럼 행복하고 은혜로운 것은 없어요.
주님을 더욱 사랑하시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3. 예수님의 모습은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13절)
"가슴에 금띠를 띠고" 이 모습은 왕의 모습입니다(단10:5-6). 승리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잠깐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밧모 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은, 세상 군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만 왕의 왕, 만주의 주께' 속해 있습니다. 우리가 잠시 고난을 당하더라도, 우리는 승리하는 편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의 고난과 어려움을 기꺼이 인내할 수 있습니다.
잠깐 지나면.. '만 왕의 왕, 만주의 주'께서 다스리시는 영원한 나라가 올 것입니다.
초림 때는 누더기 옷에 흠모할 것도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면, 이제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그 영광을 회복하시고 영광의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며, 그 모습으로 영광스러운 재림을 하실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계시록 19장에 보면 오늘 보는 예수님의 이 모습 그대로 재림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본 예수님의 모습은 장차 재림하실 때의 예수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4. 머리털의 희기가 양털과 같이 희고, 눈과 같이 희었습니다. (14절)
14절에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성령으로 임하시면 죄성까지도 처리하여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사1:18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우리를 양털보다 눈보다 더 희게 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늘도 우리 속에 계십니다. 그 예수님을 진실로 영접한 사람은, 자기의 모든 죄와 허물이, 눈과 같이 희어지는 은총을 입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5. 예수님의 모습은 그 눈이 불꽃같았습니다. (14절)
14절에 “그의 눈이 불꽃 같고” 라고 하십니다. 사물의 본질과 인간의 마음까지도 꿰뚫어 보신다는 말입니다. 심판의 모습과 세심하게 돌보시는 모습입니다.
공중기도 하시는 분들이 가끔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많이 하시는데 그게 무슨 뜻일까요? 불꽃같은 눈도 심판을 상징합니다. 그 분 앞에서는 감추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시며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의 삶을 관찰하시고 우리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19장12-14절에 보면 세상을 심판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불꽃같은 눈을 하신 심판의 예수님께서 발에 끌리는 제사장 옷을 입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옷에 피가 뿌려져 있습니다.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를 따르는 무리는 희고 깨끗한 옷을 입고 있습니다. 왜 그런 모습일까요? 이 모습을 머리에 잘 그려 보세요.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죄인들을 포도즙 틀에 놓인 포도들처럼 밟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의 발에 밟혀야 할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밟히셨습니다. 그 분의 옷에 피가 튀었습니다. 죄의 대가로 흘려야 할 이스라엘의 모든 피가 그 분께 튀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고 예수가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제사장이 아무리 금실 은실로 짠 좋은 옷을 입고 있다 하더라도 제사를 드리면 그 제물의 피가 옷에 낭자하게 묻게 됩니다. 제사장이 제물을 잡고 제단에 바치면서 그 옷에 피가 묻게 되는 것은 바로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계시록19장 15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으십니다. 그런데 그 포도에게 돌아가야 할 피가 전부 튀어서 예수님의 옷에 묻습니다. 그래서 그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은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있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원래 그 피는 그 뒤에 좇아오는 사람들 것이었는데 예수님의 옷에 그 저주의 피가 다 튄 것입니다.
이렇게 불꽃같은 눈은 포도주 틀을 밟는 것과 연결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심판과 함께 구원을 동시에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달라는 기도를 열심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시고 마지막 때에 그들에게 무시무시한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진노의 포도즙 틀을 밟듯 밟으실 것입니다. 피의 저주가 그 포도주 틀에 내릴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사랑하는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친히 담당하셔서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불꽃같은 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두 눈으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그 중에서 교회를 건져내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불꽃같은 눈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해 내실 그 불꽃같은 눈이 우리의 이 엉터리 같은 삶을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6. 예수님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습니다.(15절)
놋쇠는 능력, 권위, 주권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그 발이 주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고대 시대의 원수를 밟는 발은 원수를 굴복시키는 승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주석이 어떤 주석입니까? 풀무에 달구어낸 주석입니다. 풀무에 달구어냈다는 것은 고난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발이 주석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고난을 통과해서 얻어진 것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은 발은 우리의 완악함을 깨뜨리시는 불의 연단을 시사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내가 왕 노릇하지 못하도록, 하나님 앞에 겸손과 순종의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이 주님의 모습은.. 우리의 완악함을 깨뜨리시는 강력한 은혜를 뜻합니다. 주의 영이 임하시면 철저한 겸손과 순종의 사람이 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마귀에게는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요, 우리에게는 고난을 겪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겸손과 순종의 자세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7. 그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았습니다.(15절)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여기 물은 성령이요, 많은 물소리는 그 은혜의 풍성함을 가리킵니다. 성령과 함께하는 은혜의 풍성함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많은 물소리’라는 단어는 절대적이며 쉬지 않고 힘차게 나타나는 권위의 음성을 상징합니다. 그러한 목소리로 예수님은 교회에 말씀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끝없이 흘러내리는 말씀과 성령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은 능력이 있고, 힘이 있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음성으로 나오는 모든 은혜의 말씀은 '생수의 강'인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이, 충만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요1:16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8. 오른손에 일곱별을 쥐시고 계십니다. (16절)
성경에서 오른손은 권능의 상징이요, 일곱별은 주의 종들입니다. 오른손에 붙들림 받는 종은 참으로 귀한 종입니다. 주의 종들은 다 주님이 오른손으로 붙잡고 계십니다. 이것을 믿는 자들은 담대히 목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오늘도, 당신의 종들을, 오른손으로 붙들고 계십니다. 마귀가 만지지 못하고, 세상이 엄몰하지 못합니다. 절대 안전한 피난처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더라도 말입니다. 요16:33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주의 종들을 힘들게 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주님이 종으로 세웠으면 주님이 오른 손으로 붙잡고 계시며,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즘 제가 설교 준비하다가 보면, 주님이 말씀을 주십니다.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주님이 전하고 싶어 하시는 말씀을 선포하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눅4:18-19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영적으로 “포로된 자, 눈 먼 자, 눌린자”을 회복하고, 은혜를 깨닫고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의 종의 말씀을 듣고 다 이렇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9. 그 입에 좌우에 날선 검이 나왔습니다.(16절)
검은 하나님의 말씀이요(엡6:17, 히4:12),
좌우는 분별을 암시하는 용어입니다(욘4:11, 출2:12).
주님이 임하시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생각과 의식까지라도 온전히 변화시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생각의 차이는 천지차이예요.
사55:8-9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은혜를 받으면 생각이 달라져요. 말소리가 달라져요. 신앙의 말, 믿음의 말, 사랑의 말, 은혜의 말 등, 하나님의 말씀을 합니다. 그러므로 은혜 받지 않고서는 결코 바른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계19장 15절에 보면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은 세상을 심판하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10. (주님의 모습은) 그 얼굴에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았습니다. (16절)
우리 주님은 빛 그 자체이십니다.
사도바울은 고후4장 4절에 “영광의 복음의 광채” 라고 했습니다. 6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빛은 바로 창세기 1장3절의 “빛이 있으라” 하셨던 그 빛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요1:4절에서는 말씀이신 예수님이 참 빛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우리도 그 영광의 빛을 받아 반사하여, 해같이 밝게/영광스럽게.. 빛을 비추도록 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주의 영이 임하시면 해와 같이 밝게 살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본의 아니게 마음과 얼굴이 얼마나 어둡습니까?
이 어둠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그보다 더 힘 있게 더 강력하게 비춰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마13:43에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영적 현주소가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성령으로 찾아오셔서 이 해와 같이 밝게 천국 생활을 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도 절망도 죽음도 우리 성도의 얼굴을 어둡게 할 수 없게 하십니다.
<결 론>
이 시대의 최고의 희망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개인적인 희망들이 있겠지만 그 무엇보다 우리의 최고의 희망은, 주님이 우리에게 충만하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주님이 임하시면 다 끝납니다. 지금 성령으로 임하시면.. 우리 영혼의 문제가 끝나고, 장차 재림으로 임하시면.. 우리 육체 뿐 아니라 우주의 모든 문제까지도 끝납니다.
그래서 우리의 한결같은 소망은 주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기도의 제목은 사도 요한처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가 되어야 합니다.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은 오늘날의 교회는 nominal christian으로 꽉 차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명목상의 신자들일 뿐이지 구원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가짜라는 것이죠. 영국의 위대한 설교자인 존 스토트 목사님도,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존 맥아더 목사님도 자신이 시무 하는 교회에서 설교를 하시면서 이 중에 진짜는 극소수라는 것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종의 기원을 쓴 ‘진화론’을 완성한 챨스 다윈은 케임브리지 대학 신학생이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했었고 목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신학을 공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공산주의를 만든 칼막스도 베를린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했습니다. 그가 신학교에서 써낸 요한복음 15장에 관한 논문은 지금도 신학생들이 참고하고 있는 논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째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삶으로 결론을 맺게 되었을까요? 여러분은 정말 자신 있으세요?
난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 무엇을 목표로 살고 있는가? 난 진짜 그리스도인이 맞는가? 매일 확인하셔야 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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