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2017/2/26) - 요한계시록(14)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
계2:8-11
25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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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의 계시이며, 장차 반드시 일어날 일을 계시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장차 반드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사탄의 권세를 다 멸하시고, 모든 구원 받은 성도들을 메시야의 나라로 다 데리고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이 땅의 교회들은 고난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누구입니까? 저와 여러분들, 성도들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재림해 오실 때가 가까워 올수록 점점 더 고난의 수준이 높아져 갑니다. 요한계시록은 주님이 재림해 오실 때까지 지상의 교회들이 점점 더 강도가 높게 고난당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세상과 타협하면 고난이 없겠지요. 그래서 고난이 없는 교회도 있고, 고난이 있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리고 고난이 심한 교회도 있고, 고난이 적은 교회도 있습니다. 너무 고난이 심해서 신앙이 식어져 버린 교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칭찬만 하는 교회도 있고, 칭찬을 전혀 안하고 책망만 하는 교회도 있고, 칭찬을 많이 하고 책망을 적게 하는 교회도 있고, 칭찬을 적게 하고 책망을 많이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세상과 타협하면 고난이 전혀 없습니다. 편안하게 잘 먹고, 잘 삽니다. 부요하게 삽니다. 이게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그러나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외골수로 신앙을 굳건하게 지키면, 심한 고난이 옵니다. 이게 서머나 교회요,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에서는 축복만 선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질의 축복을 받으라. 병 고침을 받으라. 성공해라. 행복한 삶을 살으라.’ 이런 말씀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고난 가운데서 신앙을 지키고, 이기는 것이 축복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물질의 축복을 받고, 건강의 축복을 받고, 세상에서 소원이 성취되고, 성공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배신 안 하고, 신앙을 굳건하게 지키는 게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물질의 축복을 받고, 건강하게 잘 살면, 예수님을 배신 안 합니까? 물질이 풍성해지고, 축복을 받으면 고난이 왔을 때 예수님을 버리지 않습니까? 신앙에 변질이 오고, 예수님을 버리고, 배신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에 변질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예수를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신앙을 지키고, 세상의 고난을 이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이겨라. 이겨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항상 염두해 두고 요한계시록을 공부해야 합니다. 할렐루야!
오늘은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에 두 번째 교회인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에 대해서 설교를 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의 은혜가 흐르고, 말씀에 깨달음이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탄은 에베소 교회처럼 은혜와 감사가 식어 버리게 합니다. 신앙이 식어 버렸을 때, 겉치레뿐인 신앙이나, 멋있는 폼만 잡는 교인이 되어 버린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의 교리나 좀 알고, 도덕적 윤리적 종교행위에 머무르게 해서 그것이 신앙생활인 줄 오해하게 만들어서 평생 교회에 다니고도 지옥에 가게 되는 그런 공격을 하기도 합니다. 교인은 교인인데 다 벌거벗은 교인, 겨우 무화과 나뭇잎 옷만 걸치고 있는 부끄러운 교인, 겉치레만 남은 교인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서머나 교회처럼 환난과 궁핍이 있지만, 세마포 옷을 입고 살아가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 안에도 잘 드러나지 않지만, 수 많은 교인들이 신앙을 굳건하게 지키고,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세상을 이기고, 사탄을 이기며, 믿음을 굳건하게 지키며, 빛나는 세마포를 입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오늘 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왜 우리가 예수 믿습니까? 왜 우리가 교회에 나와야 하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오직 하나 천국입니다. 천국에 소망을 두고, 천국을 꿈꾸며 사는 것이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광야 같은 세상을 통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서 하나님을 알아가며 거룩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은 천국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가 필요한 것을 얻어내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축복만을 추구하고, 풍요만을 추구하고, 내가 세상적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만 예수 믿다가, 그러다가 핍박이 오고, 고난이 오면, 교회를 떠나고, 예수를 배신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서머나 교회>
오늘 읽은 본문에서 서머나 교회를 보십시오. 서머나 교회에게 주신 말씀을 보십시오. 서머나 교회는 심한 핍박과 궁핍으로 시달린 교회입니다.
로마는 어떤 나라를 정복하면 그 정복지의 문화나 사상, 종교 등을 최대한 존중해 주면서 거기에 헬레니즘을 섞는 혼합정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이 유대 땅을 정복했을 때 유대인들의 종교인 유대교를 존중해 주었습니다. 그러한 로마의 정책 때문에 처음에 유대인들은 황제에게 직접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냥 황제에게 존경을 표하고, 황제의 건강을 비는 의미에서 의식을 행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로마 황제 밑에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고 기독교인들이 생기자 로마는 그것도 유대교의 일종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초기에는 로마에 의한 박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네로 황제가 정권을 잡고 로마를 불태우고 나서 그것을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 때부터 로마는 기독교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유대인들까지도 기독교인들을 신성모독으로 몰아세워서(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했으므로) 자기들끼리 잡아다가 가두고 패고 하는 것을 보면서, 로마는 기독교인들을 사악한 미신에 사로잡힌 미친 광신자들로 몰아세우기 시작했습니다.
‘타기 투스의 연대기’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네로의 정원에서 찢기고 불태워져 밤을 밝히는 연료로 사용되고 있을 때 그 정원에서는 그것을 보고 즐기는 자들을 위해 서커스가 공연되었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박해가 기독교인들에게 닥쳤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당시 상인들의 조합이었던 길드 조직에도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상인들의 조합에도 들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길드 조직은 상인들의 연합 집단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사업의 번창과 무역의 흥왕(興旺)을 위해서 제사를 자주 드렸습니다. 게다가 일 년에 몇 번씩 Trade Guild Festival이라는 것을 열어서 열심히 우상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그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돈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 돈조차 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그들은 길드 조직으로부터 외면을 당했고 장사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생계에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재산을 빼앗아 가도 죄가 되지 않았습니다. 더더욱 기독교인들이 미움을 받은 것은 기독교인들이 로마황제 가이사를 섬기는 신전에 내야 하는 돈도 바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그 당시의 경제를 움직이는 돈의 절반 정도가 신전을 운영하는데 쓰여 졌습니다. 당시도 그 신전을 유지하고 운영해 나가는데 엄청난 돈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필요한 돈을 거두어 들였는데 기독교인들은 돈을 안 내는 겁니다. 기독교인들은 가이사를 신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돈을 내지 않은 것입니다. 특히 서머나는 로마에 가장 충성을 했던 도시였습니다, AD26년에 로마가 티베리우스 신전을 세우기 위해 11개 도시를 놓고 심사를 해서 가장 충성스러운 도시를 뽑아 신전을 세웠는데 그 도시가 서머나 였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감히 그 충성스런 도시에서 황제를 섬기지 않겠다고 나서니 얼마나 미움을 받았겠습니까? 예수를 믿음으로 해서 서머나 교회 사람들은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 것입니다.
AD81-96년까지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로마를 다스릴 때는 더 심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을 신으로 생각했고 신처럼 숭배 받기를 원했기 때문에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지 않는 자들을 잔인하게 사형에 처하거나 유배를 시켰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때 유배를 간 것입니다. 이 유배지에서 요한계시록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가난과 핍박 속에 있던 서머나 교회의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편지를 시작하십니다.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처음이요 나중이라는 구절은 전에 말씀한 대로 모든 역사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의 손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주관해 가시며, 하나님께서 경영해 가고 계신 다 라는 말입니다.
왜 서머나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를 이렇게 시작하시는 겁니까? 이 말씀은 ‘사탄이 지금 너희를 그렇게 힘들게 만들어 너희를 좌절시키고 낙담시키고 있지만, 그 모든 것도 나의 계획 아래 있는 것이다, 그러니 힘을 내라, 내가 반드시 너희를 이기는 자리로 끌고 갈 것이다. 그러니 힘내고 이겨내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머나 교회에는 예수님이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자요, 역사의 종말에도 계실 자이며, 모든 역사 전체를 지배하시는 자며, 동시에 십자가의 죽음에서 다시 사신 자” 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십니까? 서머나 교회가 심한 고난을 겪고 있기 때문에, 심한 고난을 겪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나도 심한 고난을 겪었다. 그러나 부활했다. 너희도 그렇게 될 것이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가 받은 칭찬>
사탄이 교회를 환난과 궁핍으로 공격을 할 때 왜 하나님께서 말려주지 않으십니까? 처음이요 나중이시라면서, 역사의 주관자이시라면서 왜 안 말려 주시지요? 그러고는 뭐라고 하십니까?
(계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예수님께서 네 환난과 궁핍을 아신다고 합니다. 분명 장사도 못하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핍박도 받고 있는 것을 아시면서 말려 주시기는커녕 “사실 너희는 부자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부자라니요.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여러분, “성도의 부” 가 뭔지 아십니까? “성도의 부”는 절대 이 땅에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소유’로 측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런 것을 ‘부’라고 하지 않습니다.
(눅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 이야기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한 부자가 밭에 소출이 너무 많아서 고민하다가 창고를 더 크게 지어서 쌓아 두기로 하고 자기 스스로 ‘내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을 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많이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는 자는 진짜 부자가 아니다’ ‘부요치 못한 자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부자인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너는 가련하고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니에요. 그들은 부자였어요. 그런데 왜 그들보고 가련하고 가난하다고 말씀하십니까? 성경이 말하는 ‘부’는 그런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부’는 뭡니까?
(히11:24-26) “(24)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애굽의 모든 보화 보다 더 큰 재물이 무엇이라고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 수모가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큰 재물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가 당하는 환난이 우리의 재물입니다. 예수님께 순종하기 위해 물질적으로 손해 보는 것이 우리의 재물입니다. 그들이 부자입니다. 이 역설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 땅에서 나타나는 하늘의 부요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사느라 이 땅에서는 조금 손해보고, 핍박 받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로 살아내는 그러한 사람을 부요한 사람이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만이 진정 모든 풍요의 원형인 하늘의 것을 영원히 누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 때문에 가난해 지고 예수 때문에 핍박을 받고 있는 서머나 교회에게 ‘너희가 실상은 부요한 자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런 부자는 되고 싶지 않지요? 이것은 믿음의 눈이 열려야 이해가 됩니다. 믿음이 없고,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은 사람은 ‘무슨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가난해서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부자란 말이냐, 사기치지 마라’ 이렇게 생각하고 말할 겁니다. 오늘날처럼 물질만능에 사로잡혀 사는 시대에는 더 웃기는 소리라고 하면서 웃을 겁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근본 원리로 돌아가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물질을 제일주의로 추구하고 의지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가 물질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것을 뭘 보고 아느냐 하면, 기독교는 신의 형상을 만들지 않습니다. 신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절하지 않습니다. 물질을 더 많이 얻는 것이 복이요, 힘이라고 생각한다면, 신을 더 크게 만들고, 신전을 더 웅장하게 짓고, 더 크게 만듭니다. 왜요? 거기에서 힘이 나오고, 풍요가 생긴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세상의 모든 우상은 다 그래서 생긴 겁니다.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기는 겁니다. 물질 제일주의로 추구하며 사는 자들인 것입니다. 지금은 불교의 절마다 부처를 높이 웅장하게 세우는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다 물질 제일주의와 관계가 있습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기독교는 보이는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더 귀하게 여깁니다. (롬8: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이 맞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이 가진 소유로 ‘그 사람은 가난하다, 그 사람은 부자다’라고 말하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진 게 없다고 창피해 할 필요도 없고 돈 좀 있다고 재고 뻐기고 할 이유도 없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신앙 가운데, 물질을 더 추구하고, 보이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기는 물질주의 빠져 있으면, 여러분들의 신앙은 자연히 식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내 마음 속에 물질이 더 많이 귀하게 차지하고 있으면, 자연히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게 되고, 믿음도 식어지고, 예배도 등한시 여기게 되고, 신앙생활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 돈 버는 재미, 다른 재미에 더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기업으로 받은 참 그리스도인들을 진짜 부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입니다. 그 분을 유산으로 받은 자들은 그 하나님의 모든 것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부자다, 부요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환난과 궁핍이 닥쳤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 가를 보면 그 사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금방 탄로 납니다. 가짜들은 절대 못 견딥니다.
(고전3:21) “(21)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22)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23)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성도들아, 잊지 말아라, 만물이 다 너희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약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세상에서는 가난한 자 같아 보여도, 그에게 믿음이 있다면 그는 진짜 부요한 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후6:9-10)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할렐루야!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맞다면 지금 있는 것이나 앞으로 올 것 모두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부요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비록 환난과 궁핍의 모습으로 보여 진다 해도 그 속에서 하나님을 배워 가는 자들을, 그 속에서 거룩을 배워 가는 자들을 ‘부요한 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가 받은 고난>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고난을 이야기하십니다.
(계2:9) “(9)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1)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궁핍했습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오..”
왜 환난과 궁핍했습니까?
서머나는 황제 숭배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황제 숭배를 철저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결코 가이사 황제를 자신의 주라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서머나 교회는 많은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핍박은 여러 가지 형태의 환난으로 주어졌습니다.
히브리서 11:36~37 에는 그 당시 성도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당했던 여러 가지 환난들을 이렇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그들이 궁핍한 이유가 환난 때문입니다. 핍박 때문입니다. 그 당시 서머나는 부요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궁핍했습니다. 왜 부요한 도시 서머나에서 서머나 교회는 궁핍해야만 했습니까?
(히10: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서머나 교회가 궁핍했던 이유는 핍박 때문이었습니다. 핍박자들이 그들의 산업을 빼앗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서머나교회가 물질적으로는 궁핍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으로는 부요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에 부요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에도 부요했습니다. 그들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에도 부요했습니다. 할렐루야!
2)서머나 교회는 유대인의 훼방이 심했습니다.
당시 서머나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정착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선민의식에 사로 잡혀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여호와의 총회”에 속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서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을 자칭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모임을 가리켜서 “여호와의 총회”가 아니라, 실상은 “사탄의 회당”일 뿐이라고 해습니다.
사단은 서머나 교회를 쓰러뜨리기 위해서 유대인들을 자기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자연히 사탄의 사주를 받은 유대인들도 여러 가지로 거짓 참소를 하면서 서머나 교회를 대적했습니다. 예컨대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로마에 대해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참소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가이사를 숭배하지도 않았고, 가이사에게 충성을 맹세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방화범이라고 참소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불로 세상이 심판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식인종이라고 참소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성만찬을 하면서 사람의 살과 피를 먹는다고 거짓말을 퍼뜨렸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 보아도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기독교인들에게 악하게 훼방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AD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당하고, 유대인들은 각 지역으로 노예로 붙잡혀 가고, 2천년 동안 나라 없이 흩어져 살게 되는 것입니다.
3)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예수님은 명령하십니다.
(계2:10) “(10)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① 예수님은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고 명령하십니다.
서머나 교회를 대적했던 자들이 유대인이었든지, 로마인들이었든지 간에 그 뒤에서 조정한 주체는 결국 마귀 곧 사탄이었습니다.
사탄은 시험을 통해 서머나 교회를 쓰러뜨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결코 서머나 교회를 쓰러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서머나 교회를 든든히 붙들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난의 기간은 ‘십 일 동안’ 이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십 일은 짧은 기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허락하는 기간이요, 하나님이 정하신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십일이라는 말의 의미는 ‘끝이 있다. 짧은 시간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잠시입니다. 그 환난의 시간, 궁핍의 시간은 우리가 영원히 누릴 하늘의 삶과 비교하면 잠깐이라는 것입니다. 종말에 주님 오실 때가 되면, 우리 성도는 고난을 겪어야 합니다. 주님은 성도들이 겪을 고난 기간을 감해 주셨기 때문에 잠깐 짧은 기간 동안만 고난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그 잠깐의 고통이 영원을 준비하는 훈련의 시간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그 고난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②예수님은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고 명령 하십니다.
환난의 시대에는 죽도록 충성하는 시대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 올수록, 종말의 시대에는 죽도록 충성하는 시대입니다. “죽도록 충성 한다” 라는 말은 충성의 강도(degree), 그리고 충성의 기간(duration)을 의미합니다. 잠시 잠간은 충성할 수는 있어도 계속은 충성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끝까지 충성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잠시 잠간은 예수 잘 믿을 수는 있어도 끝까지 계속 잘 믿기는 쉽지 않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것은 끝까지 강하게 충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무엇을 약속하십니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충성했으니까, 영화로운 “면류관”이 주어지고,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니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고후4: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현재의 환난은 경한 것입니다. 그러나 장래의 영광은 지극히 크고 중한 것입니다.
③“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고 명령하십니다.
(계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대필한 이는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편지가 각 교회에 전해질 때, 그 편지를 성도들 앞에서 읽어줄 사람은 각 교회의 사자입니다. 그러면 각 교회의 사자가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편지를 읽을 때, 교회의 사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분은 누구이십니까?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듣는 이의 귀를 열어주시고, 듣는 이의 마음을 열어주시는 것은 성령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각 교회의 성도들이 그 교회의 사자를 통하여 성령님이 하시는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순종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고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여기서 “이기는 자”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성도, 곧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신앙을 지킨 자입니다. 믿음을 버리지 않고, 더욱 철저히 지킨 자입니다.
이기는 자에게 약속된 축복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은 핍박으로 인해서 첫째 사망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둘째 사망의 해는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계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이기는 자, 곧 죽도록 충성하여 생명의 면류관을 쓰는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한번 죽을 뿐입니다. 그들은 첫째 부활에 참예하기 때문에, 둘째 사망의 해를 결코 받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더불어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계21:8)에 보면,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흉악한 자들이요, 살인자들입니다. 그들은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는 행음자들입니다. 그들은 점쟁이들입니다. 우상 숭배자들입니다. 그리고 거짓의 아비 사탄을 따라서 거짓으로 참소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결국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할 것입니다. 그들은 지옥 불에서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겪어야 할 둘째 사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이처럼 두 번 죽게 됩니다.
(계20:14-15)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
서머나 교회는 극심한 환난과 궁핍과 유대인들의 훼방 가운데서도 인내하면서 예수님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생명의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결론>
주님께서 일곱 교회에 주신 약속을 보세요. 어디 세상 적인 약속이 있습니까? 물질적인 약속이 있습니까?
“이기는 자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해주겠다. 의의 흰옷을 입게 해 주겠다.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게 해 주겠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해 주겠다. 이기는 자는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해 주겠다.” 입니다. 어디 ’병 낫게 해주겠다. 부자 되게 해주겠다. 만사형통 하게 해 주겠다‘ 이런 말이 있습니까? 기독교의 진짜 축복이 무엇입니까? 성도는 요한계시록의 축복관으로 세상을 보고, 이 종말시대를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병 낫고, 부자 되고, 성공해도, 언제든지 예수님을 배반하고, 교회를 배반 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영원한 축복이라 하지 않습니다. 일시적이고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것을 축복인줄 알고 추구하고 좇는 자들은 언제든지 신앙이 변질되고, 교회를 버리고, 주님을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서머나 교회의 목회자요, 감독이었던 분이 폴리갑(Polycarp)이었습니다. 폴리갑이 순교하고 나서 얼마 안 되어, 서머나 교회는 인근에 있는 한 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는 이른바 『폴리갑의 순교기』(Martyrdom of Polycarp)라고 불려집니다. 그 편지를 통해서 우리는 폴리갑이 순교할 때의 모습을 자세하게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폴리갑은 사도 요한의 제자로 서머나 교회를 맡아 목회를 했습니다. 사도요한으로부터 이 요한계시록을 받았을 때는 폴리갑이 아직 서머나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을 때입니다. 폴리갑은 주후 155년 2월 23일 토요일에 순교당했습니다. 스승인 사도요한으로부터 요한계시록을 받은 후 60여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 때는 운동경기 때였고, 서머나는 인파로 들끓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신론자들을 없애라! 폴리갑을 죽여라!” 라고 하는 고함소리가 솟아 올랐습니다. 폴리갑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을 버리고 피신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선동하고 고함지른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 날은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경기장에 나와서 폴리갑과 기독교인들을 화형시키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폴리갑이 경기장으로 끌려 나왔습니다. 당시 서머나 총독이었던 스타티우스는 어려서부터 폴리갑과 친한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는 폴리갑을 살리기 위해서 원형 경기장 안에서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를 한번만 부인하라, 그러면 살려주겠다.’ 그 때 폴리갑이 그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86년 동안 한 번도 나를 모른다 하지 않으셨는데 내가 어찌 우리 주님을 모른다 할 수 있겠는가?”
성난 군중들이 폴리캅을 죽이라고 외쳤습니다. 폴리캅의 친구 스타티우스는 어떻게 해서든 그의 죽음을 막아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성난 군중들(특히 유대인들이 앞장서서)이 그를 장작더미 위에라도 올리라고 아우성을 쳐서 결국 폴리캅은 화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폴리캅이 총독에게 ‘당신은 지금 잠깐이면 타다가 꺼질 불로 나를 위협하지만, 죄인들을 위해 준비된 심판의 날과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을 당신은 어찌 피하려 하는가?’ 하고 오히려 그 총독을 불쌍히 여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군중들은 목공소와 목욕탕에서 나무를 가지고 떼로 몰려 와서 폴리갑을 화형시키라고 소리 찔렀습니다. 이 때 유대인들은 이 날이 안식일인데도 그런 짐을 운반함으로 안식일 규정을 어기게 되는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장작을 갖다 나르는 일을 앞장서서 하면서 시끄럽게 소리 지르면서 맨 앞장을 섰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화형대에다 묶으려고 했습니다. 그 때 폴리캅이 그들을 저지하면서, ‘나는 괜찮소.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두시오. 나에게 이 화형을 견딜힘을 주실 우리 주님께서 당신들이 나를 묶지 않아도 이 장작불에서 움직이지 않고 견딜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이요’
그리고 유명한 기도를 남겼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여, 당신께서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순교자의 반열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하게 하시어 내 몸과 영혼이 성령의 썩지 않는 축복 속에서 영생의 부활을 얻기에 합당하다고 여겨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는 저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들로 인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 영원한 대제사장의 이름으로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영광이 이제부터 영원히 있을 지어다, 아멘’ 이렇게 기도하고는 ‘뭘 하고 있는가? 어서 속히 너의 할 일을 하라’ 하고 오히려 서둘러서 죽었습니다.
오늘날 소아시아의 7교회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교회는 서머나 교회뿐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폴리갑 기념 교회로 오늘날도 그대로 존속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이 요한계시록을 통해 2000년 전에 요한에게 임했던 성령의 역사, 폴리캅에게, 서머나 교회의 교인들에게 임했던 성령의 역사가 오늘을 사는 여러분께도 동일하게 임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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