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2017/3/5)-요한계시록(15)
버가모 교회에 주신 말씀
계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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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의 은퇴하신 어느 목사님을 만나 이야기 하는 중에, 이 목사님이 묻기를 ‘목사님, 천국이 분명히 있겠지요?’ ‘아니 목사님이 돼가 그렇게 물으시면 어떡합니까? 천국은 분명히 있지요.’ ‘그렇지, 천국이 분명히 있지, 만약에 천국이 없다면, 우리가 이 땅을 어떻게 살까? 어떻게 이 땅에서 견디어 내지?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으니, 이 세상에서 버티어 내지, 안 그러면 어떻게 살까? 나는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빨리 천국에 가고 싶어!’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같은 공감을 했습니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예수 믿는다고 힘겹게 살고, 돈 없이 가난하게 사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목회자들은 평생 교회 안에서 목회하면서 말씀만 연구하고, 말씀만 전하다가 은퇴하면 다 가난하게 됩니다. 목사님들이 공부를 못했습니까? 지식이 없습니까? 은퇴한 후 왜 가난합니까? 평생 돈 버는 일을 한 것이 아니고, 말씀 전하는 일만 했으니, 돈이 생기는 일이 아니잖습니까? 오직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사는 자들이 그리스도인 아닙니까? 성도에게 천국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삽니다. 무슨 소망으로 삽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서 성도들의 부활을 말하면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로다.” 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천국이 없고,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국 가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다 지옥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어 새사람이 되면 다 천국 갑니다. 이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성경인 것입니다.
여러분, 왜 예수 믿지요? 왜 교회에 나오지요? 예수 믿고 교회에 다니면 건강해집니까? 물론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건강하게 하시면 건강해 집니다. 돈 많이 벌고, 성공하기 위해서입니까? 물론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그렇게 됩니다. 모든 꿈이 이루어지고, 소원이 성취되기 위해서입니까? 물론 하나님이 복을 내려 주시면 그렇게 됩니까?
그러나 예수 믿는 핵심이 뭡니까? 하나님 나라입니다. 천국입니다. 성도가 돈 버는 목적도 하나님 나라요, 성공도 하나님 나라요, 우리의 소원을 이루는 것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요한계시록을 공부하고 있는데, 요한계시록의 핵심이 뭐예요? 우리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우리 성도는 고난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왜 고난을 겪습니까? 고난을 안 겪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데, 왜 고난을 겪습니까? 천국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고난을 겪는 것입니다. 천국을 버리면 안 되기 때문에 고난을 겪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으면 고난이 없고, 편안하게,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 수 있는 겁니다.
옛날 초대교회 때는 예수 믿으면 잡아다가 가두고, 고문하고, 칼로 목을 치고, 십자가에 못 박아 메달아 놓고 햇볕에 말려 죽이고, 불에 태워 죽이고, 쫓겨 다니고, 숨어 살고.... 이게 고난이고, 이게 순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이제는 내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이 세상 생활과의 싸움입니다. 세상 문화와의 싸움입니다. 아무도 내가 예수 믿는다고, 욕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는 순교가 바뀌어졌습니다. 물론 아직 이슬람 나라들과 북한 같은 나라에는 총살하고, 죽이는 나라들도 있지만, 대부분 죽이는 나라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교묘하게 사탄은 예수 못 믿게 하는 문화로 만들어 가고, 환경을 그렇게 만들어 갑니다. 우리는 세상 문화와 환경에 이기지 못하여 예수를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사모함이 점점 사라지고, 먹고 사는 문제, 세상에 문화에 점점 빠져들게 합니다. New age 운동, 종교다원주의, Post modernism, 경험주의, 실존주의, 이성주의, 이런 시대정신을 만들어 내어서 절대 진리라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다 상대적이다. 그래서 성경은 곧이곧대로 믿는 책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교훈만 잘 건져내면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거부하거나 부인하지는 않지만 기독교도 많은 비슷한 비중을 가진 여러 진리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이 시대는 기독교만을 절대 진리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를 부인하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를 인정합니다. 성경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만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만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모든 것에도 구원이 있고, 진리가 있다고 인정합니다. 이것이 현대사조요, 이것이 현재 우리가 접하고 사는 문화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만 주장하고, 기독교에만 빠져 있으면, 아주 천박한 사람, 아주 어리석은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융통성이 없기 때문에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취업하기도 힘들고, 사람들도 친하게 지내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아주 천박하고 무식한 종교로 홀대를 받습니다. 성경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무식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이것을 못 견디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적당하게 섞는 것입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서 적당하게 예수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 안 믿는 게 아닙니다. 교회도 열심히 다닙니다. 성경도 읽습니다. 교회에 와서 설교 듣고 은혜도 받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에 섞여서 적당하게 타협하면서 사는 겁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을 안 믿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도 열심히 섬겼습니다. 안식일도 지킵니다. 절기도 잘 지킵니다. 성전에 가서 제물도 드리고, 예배도 열심히 참석합니다. 그러면서 이방의 신들도 섬겼습니다. 이집트 신도 섬기고, 가나안 신들도 섬기고, 앗수르 신들도 섬기고, 바벨로 신들도 섬기고, 각 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신들을 다 섬깁니다. 그런데 이것을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이라고 책망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안 섬긴 것이 아닌데도, 하나님을 배신한 백성들이라고 책망합니다.
오늘 이 시대는 더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협하면서 살았던 것에 비하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사탄이 우리의 사상과 사고를 바꾸어 놓고, 붙잡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위대한 진리를 가지고 말을 해도 설득을 당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문화와 사상과, 쾌락의 삶이 우리에게 마약처럼 덮어서, 그리고 돈이라는 물질의 욕구가 사로잡아서 아무리 성경의 진리로 외쳐도, 우리 이성이 변하지가 않습니다. 아주 두껍게 악의 세력이 덮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시대에 예수 믿는다는 그 자체가 바로 순교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는 순교자의 신앙을 갖지 않으면 신앙을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과 같은 극도의 물질만능시대에 십일조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순교의 신앙이에요. 오늘날처럼 극도의 이기적이고, 쾌락의 삶을 추구하는 시대에 자기를 절제하고,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며 하루를 보내는 것은 순교의 정신이에요. 오늘날처럼 각종 미디어시대요, 타락하고 퇴폐적인 문화가 뼈 속까지 스며들어 있는 시대에 거룩하게 신앙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정말 순교의 신앙이 아니면 물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순교가 죽어야만 순교가 아니고, 예수 바로 믿는 그 자체가 순교인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바로 믿기가 힘든 시대요, 바로 살기도 힘든 시대입니다. 점점 갈수록 살기 어려워지고, 인간들은 점점 더 타락하고, 악해지고, 참으로 믿는 자들이 점점 줄어 들어가는 시대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날이 점점 더 가까워지면서, 예수님이 한탄하신 말씀대로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자가 올 때는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사도바울이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서 분명히 이렇게 말씀합니다.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또 디모데후서 4장 3-4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3)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여러분, 정신을 바짝 차리십시오. 이 시대는 바른 교훈을 받지 않습니다. 스승을 많이 두고 많이 배우지만, 그 귀를 진리에 두지 않고 허탄한 이야기만 듣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소리를 다 듣지도 말고, 다 믿지도 마십시오. 악한 소리, 우리의 영혼을 썩게 하는 소리들이 너무 많습니다. 특히 TV의 드라마도 우리 영혼을 썩게 합니다. 신문이나 방송의 뉴스를 다 믿지 마십시오. 신문, 방송의 뉴스는 20%만 믿으십시오. 요즘 대통령 탄핵을 위해 나오는 모든 뉴스는 100% 믿으면 안됩니다. 좌파들의 쿠데타입니다. 아주 계획된 쿠데타예요. 역대 대통령들도 다 그렇게 해 왔습니다. 권력이 있는 주위에는 항상 쥐꼬리 권력이라도 빨아 먹고, 이익을 빨아 먹기 위해 똥파리들이 달려드는 겁니다. 역대 대통령 주위에도 항상 똥파리들이 득실거렸습니다. 그 똥파리들만 잡아서 가두면 되지, 대통령을 탄핵시키면 안 되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비리를 저지르고, 뇌물을 받아 먹고, 비자금을 만들고, 개인적으로 착복 했는 게 하나도 없잖습니까? 오직 하나, 박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에 보수 중에서도 극 보수입니다. 극 보수였기 때문에, 좌파들이 이번 기회에 정권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대통령 탄핵 때문에 나라가 둘로 나누어지고, 극한 이념 대립으로 나라가 둘로 나누어져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듭니다. 제일 좋아하는 나라들은 북한이고, 중국이고, 일본입니다. 경제가 곤두박질치고, 세계에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이게 더 큰 문제입니다.
기독교인이 공산주의에 빠지고, 사회주의에 빠지고, 좌파에 빠지는 것은 기독교 정신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눈으로, 기독교의 영성으로 세상을 보면 잘못된 것이 보입니다. 오늘날 목사라고 하면서, 예수 믿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그렇게도 영의 눈이 어둡습니까? 촛불을 앞세워서 뒤에서 분열을 일으키고, 혼란을 만들어 내어서 정권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 눈에 안보입니까? 이 나라를 둘로 나누어 극한 대립을 만들어 몰고 가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정치인들 아닙니까? (열 받쳐서 설교가 옆으로 샌 것 같습니다)
본론으로 들어 가겠습니다. 오늘은 버가모 교회입니다.
12절에 보시면,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에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이것은 심판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9장 15절에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 재림하셔서 이 땅을 징벌할 때에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했습니다. 좌우의 날선 검은 심판의 도구입니다.
버가모 교회에는 타락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 판을 쳤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신앙과 풍습을 타락시켰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과 대항하기 위해서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검을 말씀, 또는 성경으로 해석합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 “전신갑주를 취하라”고 하면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7절)고 하십니다. “좌우에 날선 검”은 구약과 신약의 말씀입니다. “좌우의 날선 검”은 상하 좌우 어느 쪽으로도 찌를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율법을 어긴 사람들을 찌를 수 있는 율법의 칼날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복음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찌를 수 있는 복음의 칼날이 있습니다. 이 칼날들은 곪은 상처를 파헤쳐서 낫게 할 수 있는 칼날입니다. 이 칼날들은 아무리 굳은 마음도 찔러서 쪼갭니다. 아무리 단단히 묶은 메듭도 단번에 짤라 낼 수 있습니다. 이 칼날은 영과 혼과 육을 찔러 쪼개며 구분해 냅니다. 인간의 죄 된 습성과 죄 된 육신, 다른 영을 분리해 냅니다. 이 칼날 앞에는 피할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오른쪽으로 피해도 거기에 칼날이 있고, 왼쪽으로 피해도 거기에 역시 칼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칼은 어느 방향으로도 찌를 수 있습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이렇게 좌우의 날선 검은 인간을 수술하고, 해부하여 생명을 구원하는 구원의 말씀도 되지만, 반대로 심판하고 죽이는 멸망의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13절에 보면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했습니다.
버가모가 어떤 도시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버가모는 에베소, 서머나와 함께 소아시아의 삼대 도시 중에 하나였습니다. 에베소와 서머나는 항구 도시였지만, 버가모는 해안에서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내륙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버가모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1)버가모는 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로마의 총독이 공식적으로 머무는 곳은 바로 버가모였습니다. 2)버가모는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버가모에는 유명한 의과 대학교가 있었습니다. 또 버가모에는 20만 권에 달하는 책을 소장한 도서관도 있었습니다. 3)버가모는 이방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버가모에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수많은 신들 가운데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네 신들을 위한 신전들이 있었습니다(제우스, 아스클레피오스, 디오니소스, 아테네, Zeus, Asklepios, Dionysos, Athena). 이 가운데 제우스 신전은 고대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간주될 만큼 웅장했습니다. 특히 아스클레피오스는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상징은 뱀이었습니다. 버가모에 있었던 의과대학의 상징은 장대에 뱀이 휘감고 있는 마크를 사용했습니다. 그 유래로 지금도 의사들이 사용하는 마크는 장대에 뱀이 휘감고 있는 모습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버가모에는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이 세 개나 서있었습니다.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와 황제 트라야누스(Trajanus), 그리고 황제 세베루스(Severus)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버가모에는 이외에도 무수한 우상들이 있었습니다. 우상 천지인 도시였습니다.
바로 이런 행정의 중심지요, 문화의 중심지요, 이방 종교의 중심지인 이러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13절에서 버가모 교회가 있는 곳을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 “사탄이 사는 곳”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버가모 도시의 뒷산에는 그 지방의 수호신 아스클레피오스를 위해서 뱀의 형상을 만들어 높이 세워 놓았습니다. 그래서 버가모 교회 성도들이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옛 뱀 곧 사단을 자기들의 머리에 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 사탄이 사는 곳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버가모 교회는 처음에는 순교를 각오할 정도로 신앙이 굳건했습니다. 처음 믿음은 너무 너무 좋았습니다. 13절 중반 절부터 다시 보겠습니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버가모 교회가 처음에는 황제 숭배라는 극심한 핍박 속에서도 자신들의 믿음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감독이요, 목회자였던 안디바가 순교했습니다. 로마는 본보기로 담임목사를 잡아다가 죽인 것입니다. 안디바는 놋쇠로 만든 황소 모양의 풀무에 갇혀서 불에 타죽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잔혹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버가모 교회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안디바를 가리켜서 “충성된 증인”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충성된 증인”이라는 말은 예수님께만 붙는 칭호입니다.
(계1:5)“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계3:14)“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이렇게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의 감독인 안디바에게, 예수님에게만 붙는 “충성된 증인”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버가모 교회는 처음에는 신앙이 좋았습니다. 황제 숭배도 하지 않고, 순교를 각오하면서 신앙을 굳건하게 지켰습니다.
그런데 안디바 목사님이 순교하고 난 후, 버가모 교회는 서서히 믿음이 식어졌습니다. 타협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하고 비슷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70년대까지는 신앙이 뜨거웠습니다. 온 산마다, 기도원마다, 교회마다 기도하는 자들이 넘쳐 났습니다. 80년대를 들어서면서 서서히 신앙이 식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이 식어지니, 이단들이 점점 더 득세하면서 판을 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믿음이 식어가고, 교인 수는 줄어 가고, 기도는 끊어지고, 이단들은 점점 늘어나 판을 칩니다. 교회에 새로운 교인 한 사람 오면, 혹시 이단이 아닌가? 신X지가 아닌가? 그리고 교인들이 이사 가거나 다른 교회로 가게 되면, 혹시 이 교회는 이단이 아닌가? 의심해야 하는 지경에 왔습니다.
버가모 교회에 안디바 목사님이 순교하고 난 후 얼마 안 있어서 그 당시 가장 영향을 끼친 이단 중에 이단인 그노시스(Gnosis,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니골당”이 침투해 들어 왔습니다.
이 영지주의는 무 율법주의를 가르쳤던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마음대로 살아도 천국 간다.’ 이게 무 율법주의입니다. 영지주의라는 것은 ‘영적인 것은 고급한 것이고 육적인 것은 아주 저급한 것이어서 육적인 것이 영적인 것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러니까 육적으로 지은 죄가 영적으로 얻은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이 영지주의 자들은 교회 안에서는 아주 신실하게 종교 생활을 하다가 자기 삶의 현장에 나가서는 자기들 마음대로 사는 그런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막 살아도 구원받는 데 아무 지장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 믿고 구원 받았으니, 이 세상에서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 과거, 현재, 미래의 지을 죄까지 다 용서함 받았으니 이제는 무슨 짓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 육체는 더러운 것이고, 언젠가는 죽어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육체는 저급한 것이고, 육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 육체가 짓는 죄가 내 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제는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 술도 마음대로 먹고, 담배도 마음대로 피우고, 성욕도 마음대로 채우고, 이 사람 저 사람과도 관계를 가지고, 우상의 제물도 먹고, 우상에게 절하고, 이제 나는 자유를 얻었으니 내 삶은 자유를 누리며 산다.’ 이게 영지주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중에 “니골라” 라는 집사가 있는데(행6:5), 이 니골라 집사가 이 영지주의에 빠져서 그 사상에 물들어, 온 교회를 다니면서 영지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다녔습니다. 기독교에 영향을 주던 교회의 기둥 같은 일군들 중에 한 사람이 이단에 빠져서 온 교회를 다니면서 이단의 사상을 퍼뜨렸으니,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겠습니다. 예를들어 우리나라에 목사님 중에 아주 유명한 영향력 있는 목사님이 이단에 빠져 방송에도 나오고, 온 나라를 다니면 이단을 전파하고 다녀 봐요, 얼마나 파급 효과가 크겠습니까?
초대교회의 최초의 일 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이 이단에 빠져서 온 교회를 들 수시고 다녔습니다. 엄청난 영향을 주었습니다. 니골라가 일 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이니까, 절대로 이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에도 ‘니골당’이 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이 니골당을 미워했습니다(6절).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버기모 교회는 완전히 물들어 버렸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도 이 니골라당에 속해 있는 어떤 여자가 자칭선지자라고 하면서, 두아디라교회를 변질시켰습니다. 20절에 보면,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14절에 보면,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발람의 교훈이나, 니골라당의 교훈이나 다 같은 것입니다.
민수기 25장에 보면, 발람이 꾀를 부려서 모압 여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이고, 자기들의 신에게 제사 할 때, 이스라엘 남자들을 초청해서 푸짐하게 음식을 장만하고, 그들의 축제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모압 여자들은 몸에 기름을 바르고, 하늘거리는 잠자리 옷을 입고, 현란한 춤을 추면서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애굽에서 나온 후 40년 가까이 광야에서 살면서 만나만 먹고, 그런 축제와 그런 기름을 바르고, 현란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민수기 25장 1-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이렇게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에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 가장 큰 죄를 지은 것입니다. 발람의 꾀에 빠져 모압의 신전에 가서 절하고, 음식을 먹고, 축제에 참석하고, 모압 여자들과 음행을 즐겼습니다.
그래서 15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이와 같이” 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비슷한 방법으로” “비슷하게” 라는 뜻입니다. “니골라당의 교훈”도 “발람의 교훈”과 똑 같다 라는 것입니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그렇게 행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한 것 같이, 니골라당도 똑 같이 버가모 교회의 교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그 발람의 꾀에 넘어가서 음행하고 우상에게 절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은 것처럼, 버가모 교인들 중에 그 교리에 넘어가서 우상을 섬기고 행음을 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버가모의 여러 신전에는 여 사제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창기였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자들은 제물을 바치고 그 제물로 바친 고기를 먹는 것과 동시에 그 신을 섬기는 여 사제와 관계를 가짐으로 그 신을 온전히 섬기게 된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버가모 교회 안에 그러한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가 아니다. 영이 중요하지 육체는 중요하지 않다. 육체는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 하면서, 버가모에 있는 신전에 가서 행음하고, 그 신전의 제물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도 섬기면서 우상도 섬기는 혼합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잘 믿고 있는 것 같았고, 실제로 순교자까지 나왔는데, 속으로는 엉터리 교리에 젖은 가짜들이 득실거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 같은 것입니다. “발람”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이고, “니골라”라는 말은 헬라어입니다. 발람을 헬라어로 니골라라고 하고, 니골라를 히브리어로 발람이라고 합니다.
오늘날도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은 ‘니골라당의 교훈’, ‘발람의 교훈’이 교회 안에 고스란히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아주 경건한 척 하지만 세상에 나가서는 믿지 않는 자들과 똑같이 삽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런 엉터리 교리들을 전해서 교인들을 타락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지도자가 바르게 전해도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고 여전히 엉터리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암8:11)“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마지막 때가 되면 교회는 많아지고 설교는 많아지는데 진짜 말씀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말씀을 바로 전하는 자도 드물어지지만, 바른 말씀을 깨닫는 자들도 드물어 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른 교리를 듣고 바르게 이해하고 바른 행위가 나오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 맞습니까? 한번 점검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세상에 나가서도 그리스도인답게 살아 내셔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런 삶이 나오고 있습니까? 안 나오고 계시다면 이를 악 물고 해 보는 것입니다. 물론 힘이 들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그것을 순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네, 성도의 삶은 순교라 부를 만큼 힘이 듭니다.
여러분이 선교하다가 목 베임을 당하는 것만이 순교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열심히 살아내는 것이 순교입니다. 순교자들이 왜 죽임을 당했습니까? ‘가이사가 주가 아니라 예수가 주’라는 것을 외치다 죽은 것입니다. 예수가 주라는 것은 ‘예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시므로 나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겠습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뜻에 맞게 사시는 것이 순교인 것입니다. 아니 어떤 면에 있어서는 칼에 목이 베이는 것보다 더 힘들 수도 있습니다. 칼에 목이 베이는 것은 순간에 끝나지만 우리는 우리의 인생 내내 그 삶을 살아내야 하니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래도 살아보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살라고 하셨으니까. 아무도 안 알아줄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 안디바의 이름을 기억해 주셨듯이, 여러분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불러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매일 매일을 열심히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17절을 다같이 읽으십시다.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이기는 자에게는 무엇을 주시겠다고 하십니까? 감추어진 만나와 흰 돌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감추어진 만나는 항아리에 넣어서 언약궤 안에 보관하라고 한 그 만나입니다(출16:32-34, 히9:4). 동시에 예수님 자신을 말합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만나입니다.
(요6:31-35) “(31)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51절에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만나입니다.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진 만나입니다. 복음서나 서신서를 보면 예수님이 감추어졌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지요? 그리고 천국의 비유에서도 천국은 감추어진 보화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렇게 감추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흰 돌은 뭡니까? ‘감추인 만나와 흰 돌을 주시는데 그 흰 돌에는 새 이름이 쓰여 있고 그 이름은 받는 자 밖에는 모른다.’ 고 말씀합니다. 성경에 보면 새 이름을 받은 자들이 있지요?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사래가 사라가 되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고, 시몬이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옛 이름을 대신 할 새 이름입니다. 신기하게도 이 돌을 받은 그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름을 알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으면 흰 돌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검투사들이 이기면 흰 돌에 이름을 새겨 주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긴 자는 감추어진 만나와 새 이름을 새긴 흰 돌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긴 자에게 예수님 자신과 나 자신만이 아는 새 이름을 새긴 흰 돌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과 자기만 아는 흰 돌을 가진 자만이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천국의 입장권입니다.
여러분, 이겨야 합니다. 세상을 이기고, 죄악을 이기고, 마귀를 이겨야 합니다. 이긴 자가 천국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을 지키십시오. 세상과 타협하면서 교회를 다니지 마십시오.
버가모 교회는 처음에는 잘 믿었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타협했습니다. 교회에 나오면 거룩한데, 세상에 나가면 믿지 않는 자들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처음에 잘 믿었는 것, 자랑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다 잘 믿을 수 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다 잘 믿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나도 모르게 서서히 신앙이 식어지고 변질됩니다. 과거에 잘 믿었는 것 자랑하지 말고, 지금이 중요하고, 앞으로가 중요합니다. 주님 앞에 갈 때까지 잘 믿으십시오. 할렐루야!
특히 우리 학생들은 학교 졸업하고, 군대 가고, 취직하면 신앙이 식어집니다. 교회에 안 나오는 것입니다. 끝까지 잘 믿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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