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2017/3/19) - 요한계시록(17)
사데 교회에 주신 말씀
계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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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사데(Sardis) 교회는 죽어가고 있는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계시록의 일곱 편지는 교회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사탄이 교회를 어떻게 미혹하고 시험하는지에 대한 친절한 안내문이며 견책의 말씀들입니다. 그러면 사데 교회에게 ‘살아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죽은 자라고’ 경고를 하신 것은 오늘날에도 그러한 교회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사데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죽어있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할렐루야!
“1절 하반절에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라고 말씀합니다. 또 2절 상반절에는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3절에서 “일깨어” “일깨지 아니하면”, 이렇게 “일깨다” 라는 말을 두 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깨어있지 않다’ ‘잠자고 있다’ 라는 말씀입니다. “깨어 있으라,Wake up!” 라는 말입니다. 사데 교회는 영적으로 죽어 가고 있는 산 송장 같은 교회였습니다. 이것은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성령과도 거리가 먼, 오히려 성령을 부정하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사데 교회에 나타나시는 모습을 보십시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사데 교회에는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으로 나타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일곱 교회에 나타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 교회의 형편과 그 교회의 신앙 상태에 맞게 나타난다고 했지요. 일곱 교회의 형편과 신앙 상태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다 다르게 나타나십니다.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에 따라서 그 교회의 형편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느냐 하면, 만약에 나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신다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실까요? 나는 지금 이 일곱 교회의 모습 중에 어느 교회의 모습에 해당되는 성도일까요? 내 신앙 상태를 이 일곱 교회에 비추어 보면서 나의 신앙상태를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앞의 1장에서 “일곱 영”과 “일곱 별”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배웠습니까? “일곱 영”은 성령입니다. “일곱 별”은 교회의 사자입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이 사데 교회는 성령이 없는 교회입니다. 냉냉하게 식어 있는 교회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부정합니다. 오히려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짓고 있는 교회일지도 모릅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니까, 냉냉하게 식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하심을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기독교의 역사가 바뀌어진 것입니다. 만약에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가 임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다 끝나 버렸습니다.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는 기독교역사에 유일회적으로 한번 있었던 이야기이다. 그 후부터는 성령의 역사는 없었다. 이제는 그런 성령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은 성령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성령 운동하는 것은 다 허구다. 거짓말이다. 이제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운동은 없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의 꼬임에 빠져 속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이야기이고, 현재까지 기독교는 계속해서 성령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1907년에 평양 장대현 교회를 중심으로 부흥운동이 일어난 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지금도 중국, 아프리카, 남미, 심지어 이슬람권 나라들에서도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성령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성령운동이 식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특히 우리 한국 장로교회도 성령운동을 부정하고, 성령시대가 끝났다. 하면서 성령운동을 인정하지 않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사데 교회는 성령이 없고, 성령의 역사를 부정하고, 성령을 훼방하는 교회이기 때문에 “일곱 영”을 가지신 분으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일곱 영”이라는 말은 이사야서11장2절에서 표현한 것을 빌려온 말입니다. 거기에 보면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했습니다. 일곱 가지 사역을 하기 때문에 일곱 영이라고도 합니다.
-①여호와의 신
-②지혜의 신
-③총명의 신
-④모략의 신
-⑤재능의 신
-⑥지식의 신
-⑦경외의 신
이것은 완전한 성령의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점은, 생기 없고 죽어 가는 교회는 이 하나님의 성령이 필요합니다. 생기 없고 죽어 가는 교회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왜 “일곱 별”을 가지신 이로 나타나시는가? “일곱 별”은 “교회의 사자”입니다. 교회의 지도자, 교회의 목회자를 말합니다. 1장 16절에서도 사도요한이 예수님을 볼 때,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계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2:1절에서 에베소 교회에 나타날 때에도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계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오늘 사데 교회에서도 일곱 별을 붙잡고 계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저는 이것을 느낄 때가 참 많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목사님들을 꼭 잡고 계십니다. 목사님들이 주님의 손에 꼭 잡혀 있지 않으면, 이 험악한 시대에, 또 교회마다 목회현장이 광야와 같습니다. 평탄한 목회가 하나도 없습니다. 특히 이 대구 지역은 전국에서 목회하기가 제일 어려운 곳입니다.
목회 환경이 가장 열악한 환경이 대구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목사님들이 주님의 오른 손에 붙잡히지 않으면 목회를 못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를 가장 힘들게 하고, 대적하고 있는 곳이 이 대구예요. 제가 노회 재판국에 서기입니다. 내년에는 제가 재판국장을 해야 되는데, 그래서 전국 노회의 재판 건수들을 조사해 보니까, 우리 대구가 제일 많습니다. 또 같은 사건을 기각되면 또 올리고, 기각되면 또 올리고, 지금 3년째 그러고 있는 교회도 있습니다. 정말 강퍅한 동네가 이 대구예요.
교회의 기둥은 목사님들이예요. 목사님들이 흔들리면 교회가 흔들립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목사님들이 성령에 충만해서 주님의 오른 손에 붙잡혀 있으면 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들 중에는 틀림없이 ‘지가 목사니까 목사 피알하려고 그러는 거지....’ 라고 오해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내가 목사이기 때문에 말씀하는 게 아니고, 성경대로 보십시오.
에베소 교회나, 사데 교회나 왜 예수님이 오른 손에 일곱 별을 가지신 분으로 나타나십니까? 이 두 교회는 교회의 주의 종들을 많이 대적하고 괴롭힌 교회들입니다. 이 교회들은 전통이 있고, 오랜 역사를 가진 교회들이기 때문에 목사님들을 목회하는데 힘들게 한 교회들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단 때문에 교회가 힘들어 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도 니골라당이 들어와서 니골라당의 행위를 따르면서, 교회의 목회자를 내 쫓으려고 하고, 비방하고 반대를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고린도 교회나 갈라디아 교회를 보면, 바울이 세운 교회 아닙니까? 그런데 거기에도 이단의 교리들이 침투해 들어가 바울을 비방하고, 대적했습니다. 그래서 쓴 책이 고린도후서와 갈라디아서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도 역사가 오래된 교회들이 다 목사님들을 대적하고 힘들게 합니다. 목회를 마음대로 하도록 놔두지 않습니다. 에베소 교회도 그랬고, 오늘 읽은 사데 교회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일곱 별을 잡고 계시는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처럼 목회자를 대적하고, 불순종한 때가 없었습니다. 앞으로 갈수록 점점 더 할 꺼예요. 사탄의 교묘한 계략은 주의 종들을 대적케 하는 겁니다.
주의 종들을 대적하고 불순종하는 교회들이 말씀인들 제대로 듣겠습니까? 하나님은 주의 종들의 설교를 통하여 말씀을 주십니다. 그런데 주의 종과 관계가 잘못되어 있으면, 말씀이 제대로 들리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말씀을 바로 받겠습니까?
그러니까 말씀을 제대로 안 받으면, 신앙은 점점 더 냉냉해 집니다. 그래서 신앙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는 죽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 “네 행위가 죽었다” 고 하시고, 2절에서는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데 교회는 외부의 핍박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단이 들어와서 교인들을 현혹시킨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내부적으로 싸움이 일어나고, 분쟁이 생긴 것입니다. 꼭 고린도 교회처럼 분쟁이 생겼습니다. 1절과 2절에 “행위”라는 말을 두 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믿는다 하면서도 행위가 없는 것입니다.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고 하십니다. 이 행위를 뭐를 말하는 것일까요?
1절 후반부에 주님께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I know your deeds’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에 행위가 복수입니다. 사데 교회는 많은 일들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위들이 그들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사데 교회더러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고 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사데 교회 내에는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다른 교회들처럼 이단들도 없었고 도시로부터의 핍박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부와 번영은 멋진 종교 활동을 일으켰습니다. 엄청나게 멋지고 커다란 예배당이 있었고 많은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사데 교회는 인기가 있었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사데 교회를 ‘살아있는 교회’라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실상은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하시는 것입니다. 사데는 아주 부유한 도시였기 때문에 시민들 전체가 도덕적으로 아주 문란했다고 합니다. 사데 교회가 바람직한 교회로 인정도 받고 인기도 얻고 유명했지만 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예배당 밖에만 나가면 그 도시의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이 문란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행위를 겉만 번드르르한 죽은 행위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데 교회는 칭찬이 없습니다. 이 사데 교회는 형식주의에 사로잡혀 있고, 자만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형식주의와 자만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은 자기는 잘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눈으로 다른 사람을 보면, 자기보다 다 못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나닐 때, 처음으로 교육전도사로 섬긴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주일날 아침에 화장실에 갔다가 화장실 청소가 제대로 안되어 있다고 고함치는 장로님이 있었어요. 교회 사찰집사가 청소를 제대로 안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누구보고 소리치느냐 하면, 부목사님보고 소리치는 겁니다. 토요일부터 주일까지는 사찰집사님이 너무 바쁜 거예요. 화장실 청소를 못한 겁니다. 그래서 부목사님과 우리 교육전도사 두 명이 화장실을 청소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교육전도사끼리 모여서 “먼저 본 사람이 먼저 청소하면 되지.... 장로쯤 되면, 교회 화장실 청소도 할 수 있는 인격과 신앙이 되어야 되지... ” 하면서 말한 기억이 납니다. 말만하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은 교회가 사데 교회였습니다.
이 ‘사데’라는 지방은 고원지대입니다. 그래서 그 도시 전체가 요새화 되어있는 도시입니다. 동서남북 높은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산 위에다가 성을 쌓고 남쪽 한군데에만 입구를 만들어 놓아서 난공불락의 요새로 이름이 난 도시입니다.
그렇게 도시가 요새화 되다 보니까, 인구가 늘어나니까 그 성안이 좁아서 그 주변에 위성도시들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 전체를 다 합쳐서 ‘사데’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헬라어 원어에도 그렇고, 영어에도 복수로 Sardis라고 표기하는 것입니다. 사데는 아주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도시 아래로 흐르는 팍톨루스 (Pactolus)강에서 사금이 나고 있었고, 그 사금 덕에 최초의 금화를 주조한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허무스 평야의 풍요로운 농산물도 사데의 부에 일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난공불락의 요새가 두 번 완전히 파괴가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BC549년에 우리가 잘 아는 페르시아의 고레스(Cyrus)왕에 의해서, 그리고 BC218년에 안티오쿠스 대제에 의해서 점령당했습니다. 어느날 페르사아의 고레스가 이 성을 포위하고 있을 때, 어떻게 하면 이 성을 점령할 수 있을까를 고심하고 있던 중, 사데의 성벽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한 병사가 실수로 자기 철모를 떨어뜨리고, 그 철모를 찾으려고 절벽 아래로 내려 가서 그 철모를 주워서 다시 절벽을 기어 올라 가는 것을 보고, 몸집이 작은 사람이면 기어 올라갈 수 있는 틈바구니가 절벽 사이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날 밤에 일단의 몸집이 작은 사람들로 특공대를 조직하여 그 절벽을 기어 올라갔습니다. 그들이, 그 성 꼭대기에 도착했을 때 보초병들은 다 자고 있었습니다. 이 쪽으로 적들이 기어 올라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것입니다. 결국 사데는 페르시아의 고레스 군대에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약200년이 조금 더 흐른 후 헬라의 안티오쿠스 대제가 똑 같은 방법으로 이 사데성을 함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밤사이에 도적같이 침공해 온 적들에 의해 하루아침에 망한 전력이 있는 사데 성이기 때문에, 사데 교회를 향하여 예수님이 두 번이나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책망하시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도적같이 임할 것이라는 내용은 그런 사데 도시의 배경을 들어 그들이 이해하기 쉽게 경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2절, 3절의 “일깨다” 라는 말은 “ Wake up, 깨어 있으라“ 는 말입니다.
2절의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에멜론 아포다네인, e[mellon ajpoqanei'n:’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그 시제가 아주 시급한 상황을 다룰 때 쓰는 것입니다. 그대로 방치하면 곧 죽게 되는 아주 절박한 상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죽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되겠지, 안전하겠지, 평안하겠지, 이 정도면 됐다. 이 정도면 잘 믿고 있는 거야’ 하면서 자만하고 있다가 보면 죽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데가 자기들의 난공불락의 성임을 믿고 있다가, 15명의 특공대에게 속수무책으로 하룻밤 사이에 자다가 당한 것과 같이 되지 않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깨어야 합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만일 잠에서 깨지 않으면 주님께서 도적같이 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깨어있지 않고 준비하지 않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고 신앙 생활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도적을 맞듯이 맞게 될 것입니다. 도둑은 아무 기대 없이 준비 없이 있다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주님을 도적을 만나듯이 맞게 되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입니다.
(살전5:1-6) “(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죽어있는 자들에게는 주님이 도적같이 오시지만, 깨어 살아있는 자들에게는 그날이 도적같이 오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주님을 도적을 맞이하듯이 맞지 않으려면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냥 깨어 있으면 됩니까?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깨어 있는게 힘듭니다. 쉽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면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는 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합니까? 119의 소방수들이나 경찰관들이나 군대의 파수병들이나 병원의 응급실 의사들이 왜 밤에 깨어있지요? 그들이 맡은 일을 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괜히 깨어있는 것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슨 일을 하기 위해 깨어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요6:28-29) “(28)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여러분이 깨어서 할 일이 뭡니까? 예수를 바로 믿는 것입니다. 예배, 헌금, 구제, 선교 다 좋지만, 그게 죽은 행위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예수를 바로 잘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방심하지 말고 계속 깨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일깨어” 라는 말은 헬라어로 givnou grhgorw'n(기누 그레고론), 계속해서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헬라어의 현재형은 계속적인 진행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바른 해석은 ‘계속해서 깨어있어라’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깨어있지 못한 자들은 완전히 ‘죽은 자’ 아니면 ‘죽어 가는 자’ 라는 것입니다.
. 한 번, 두 번은 깨어 있을 수 있지요, 계속해서 깨어 있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한 번, 두 번은 잘 믿을 수 있지만, 계속해서 끝까지 잘 믿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밀어 주셔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성령이 밀어 주시는 겁니다. 성령이 없고, 신앙이 식어 버리면, 계속해서 깨어 있기가 어렵습니다. 사데 교회는 신앙이 식어 버렸습니다. 조금만 방심해도 금방 죽어가는 자들이 되어 버리는 것이 바로 치열한 영적 전투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이제 4절, 5절을 다같이 읽으십시다.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그런데 그렇게 총체적인 영적 괴사 상태에 있는 사데 교회에도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 몇 명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있었다고요? 성경은 ‘몇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a few people”, 많지 않은 작은 수입니다.
그들은 흰옷을 입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흰옷을 입고 예수님과 함께 다닌다고 하십니다. 흰 옷을 입게 되는 것은 그들이 합당한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그럴 자격이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위의 “옷”과 밑의 “흰 옷”은 다릅니다. 위의 옷은 지금 내가 입고 있는 겉옷입니다. 밑의 흰 옷은 나중에 주님이 입혀 주시는 빛나는 세마포 옷입니다.
헬라어 원문에 위의 옷은 iJmavtion(히마티온, 옷, 겉옷)입니다.
밑의 흰 옷은 leukov"( leukoi'", 류코스, 흰 옷을)입니다.
이사야 61장 10절에 “구원의 옷”과 “공의의 겉옷”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여기서 “구원의 옷”은 속옷으로 믿음을 말하고, “공의의 겉옷”은 신앙생활, 즉 행위를 말합니다. 성경은 옷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을 받으면 영적으로 두 가지 옷을 입게 됩니다. 구원의 옷인 속옷과 의의 옷은 겉옷입니다. 겉옷은 행위의 옷입니다. 이 행위를 늘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데 교회의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 겉옷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구원 받았다고 하면서, 옳은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옷은 더럽혀지기 마련인데, 더러워지면 늘 세탁해야 합니다. 성도는 늘 말씀으로 복음으로, 회개함으로 옷을 씻어 깨끗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에는 얼마 되지 않은 몇 명의 성도들만이 겉 옷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예수님이 흰 옷을 입혀 줄 것이고, 이 흰 옷 입은 자들은 “나와 함께 다닐 것이고, 그 이름을 생명책이 결코 지우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생명책에 기록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진다”(계20:15)고 했습니다.
그리고 생명책에 기록되려면 흰 옷을 입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흰 옷은 예수님이 입혀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행위의 옷, 의의 겉옷을 더럽히면 흰 옷을 입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고 하지만, 신앙생활이 뒷받침 되어 주지 않으면, 구원을 지킬 수가 없고,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19장 7,8,9절에 보면, 어린 양 혼인 잔치에 들어 갈 수 있는 자들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어야 되는데, 예수님이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세마포 옷을 입고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2장 11,12절에 보면, 임금님이 베푸는 잔치 집에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 온 자를 향하여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라고 하십니다. 이 예복이 바로 흰 옷입니다. 성도의 옳은 행실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바로 하셔야 합니다. 형식적인 신앙생활 하지 마십시오. 자만에 빠지지 마십시오.
사데 교회는 사람들에게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칭찬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데 교회는 사람들에게는 살아 있는 교회라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는 거룩한 척, 깨끗한 척, 잘 믿는 척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라고 하십니다. “네 행위가 죽었다.” “너의 온전한 행위가 없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사데 교회는 오늘 우리 한국 교회와 비슷합니다.
바른 복음을 깨닫고, 그 복음을 꼭 붙들고 날마다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는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행위가 예배당 안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도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그 행위가 나오고 있습니까? 예배당에 나와서 종교행위는 그럴듯하게 하면서 나가서는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형편없이 세상과 부화뇌동해 버리는 그런 죽은 행위, 이파리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 같은 신앙이 아닌지 돌아 보십시다.
“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5-6절)
우리가 사는 이 교회시대는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이 교회시대가 끝나고,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이 옵니다. 그때까지 늘 깨어 있고, 이기는 자, overcome, 즉 견디는 자, 극복하는 자가 되십시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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