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요한계시록

[스크랩] 2월19일,[요한계시록13]에베소교회에 주신 말씀

☆ 주님의 머슴 2017. 5. 7. 18:33

주일설교(2017/2/19)-요한계시록(13)

에베소 교회에 주신 말씀

2:1-7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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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게 하기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아래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해 내는 것이 천지 창조의 목적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창조라는 것은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며, 결국 종말론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창조는 종말로 이어지는 것이고, 그 종말이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과 끝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천지창조의 시작에도, 천지창조의 끝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든가, 그 삶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그 사람은 천국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하지 않았는 그 슈바이처가 아무리 훌륭한 실천을 하며 살았다고 해서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바른 신앙고백이 없고, 교리가 없이 아무리 훌륭한 실천을 하며 산다고 해도 절대 천국 갈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는 칭찬도 받지만 꾸중도 듣습니다. 그 꾸중의 내용을 보면 니골라, 발람, 이세벨, 자칭 사도, 자칭 유대인 등 이단 문제, 도덕과 윤리적인 문제, 나태함, 불신, 식어 버린 신앙, 여러 가지 교회의 모습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다양한 유혹이나 핍박에 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문화, 물질을 우선으로 여기는 사고, 풍요를 즐기려는 신앙, 이런 것들 때문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궁극적으로 이러한 공격은 누구에 의해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모두 사탄의 궤계입니다. 사탄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왜 천지를 창조하셨는지 잘 압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도록 하기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창조라는 것은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며 결국 종말론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창조는 종말로 이어지는 것이고, 그 종말이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목적이 완성되는 날이 사탄의 마지막 날입니다. 그 날은 사탄이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지는 날입니다. 그러면 사탄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지 못 하도록 방해를 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탄은 교회를 미혹하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에서 일곱 교회가 공격을 받는 모습은 바로 현재 지상에 있는 교회를 비롯한 전체 교회가 사탄으로부터 어떻게 공격을 받는 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교회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가 교회입니다. 일곱 교회의 모습은 바로 오늘 우리를 공격해서 신앙을 변질시키는 모습입니다. 이 공격에 대해 예수님이 어떻게 하면 교회가 변질되지 않고 방어해서 이길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곱 교회의 모습들을 보면서 현재 어떤 교회들이 성경이 경고하는 가짜 교회들인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여기서 주님께서 경고하고 책망하신 모습으로 가는 교회들은 모두 가짜겠지요. 가짜 교회와 진짜교회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건물이 초라하고, 교인 숫자가 적다고 진짜 교회가 아닌가? 건물이 화려하고 크고 교인이 많으면 진짜 교회인가? 돈 많이 벌고, 성공하면 진짜 교인인가?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통해서 건물과 교인의 숫자와 아무 관계없이, 성공과 실패와 아무 관계없이, 무엇이 진짜 교회와 가짜 교회인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각산동에 있을 때 어떤 분이 와서 한 번 예배 드리고는 교회가 이단 같습니다.” “왜 그렇게 보느냐?”고 했더니, 십자가도 작고, 건물도 가정집이고, 겉모양이 교회 같지가 않아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 주부터는 오지를 않았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보는 눈과 우리의 신앙관이 얼마나 물질적이고 겉치레인지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의 신앙을 검진할 때,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 뭘까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참 좋은 나라입니다. 모든 국민들에게 정기적으로 늘 건강검진을 받으라고 통지서가 날라 옵니다. 저는 건강검진을 받을 때마다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건강검진을 받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영적상태를 위한 신앙검진도 꼭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가장 귀한 것은 구원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놀랍고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 사람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갔다 바쳐서 구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 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

 

사람에게 재물과 쾌락과 명예와 권세는 무시할 수 없는 대단한 것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얻기 위하여 수고하고 애쓰고, 생명까지도 바칠 정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들이 주목하는 것은 이런 재물과 부귀와 권세와 같은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도라고 하면서 보이는 것만 추구하고 산다면 가짜 성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물리치실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4)고 했습니다. 은 보이는 것으로 물질을 대표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영적인 것을 대표합니다.

 

우리가 만약 성도라고 하면서 에 목적을 두고 살고, 육신의 삶을 위한 목적이라면, 우리는 성도가 아니고 가짜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삽니다. 진짜 성도는 말씀을 먹고 삽니다. 그래서 진짜 성도는 말씀을 먹고 살기 때문에 육신을 위해서는 아무거나 먹어도 됩니다. 값비싼 것을 안 먹어도 됩니다. 배만 안 곱으면 되는 것입니다. 먹는데 욕심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기 위해서 배고픈 것을 선택해야 한다면 배가 곱아도 괜찮습니다.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가짜와 진짜는 무엇으로 구분합니까? 보이는 것에 집중하고, 보이는 것을 추구하고 사는 성도는 가짜입니다. 이게 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에 마지막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인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와 비슷합니다. 교회는 화려하고, 부하고, 겉은 화려하지만 가짜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는 우리에게 신앙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

에베소는 로마 속령인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고 번창하는 항구도시였습니다. 아시아주는 지금의 터키의 제일 왼쪽에 놓여 있는 지역입니다. 남자의 인구가 40,000명이 넘었고 전체 인구가 225,000명이나 되는 거대한 도시였습니다. 거기다 에베소는 로마에 대한 충성과 봉사를 인정받아서 자치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군이 주둔하지 않았고 가끔 총독이 방문해서 회의를 주재하고 가는 그러한 자유로운 도시였습니다. 에베소에는 카이스터 강이 흐르고 있었고 그 강에 무역을 위한 항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강이 주변 산들에서 내려온 침적(沈積)토 때문에 점점 강이 낮아져서, 그럴 때는 항구를 다른 곳으로 옮겨서 다시 도시를 재 정비해야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배경을 갖고 있는 에베소 교회이기에 5절에 있는 에베소 교회에 대한 책망의 부분에 회개치 않으면 내가 속히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라는 부분을 읽으면서 섬뜩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촛대가 옮겨지면 그 곳이 얼마나 황폐하게 되는지를 항구를 옮기면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에베소의 항구는 폐허가 되어 있고, 바다와는 10키로 가까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과거의 에베소항구는 이제 갈대가 무성한 늪이 되어 있습니다. 에베소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황무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촛대를 옮겨 버리면 황무지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에베소는 아데미 여신을 섬기고 있었고 아데미 뿐 아니라 많은 우상들을 섬기던 도시였습니다. 오죽하면 우상을 만들어 팔던 사람들에게 바울이 쫓겨날 정도였습니다. 바울이 기독교를 전파하면서 아데미 신을 섬기던 자들과 다른 우상을 섬기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되면서 우상 판매가 시들해 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에베소는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되기 전까지 목회를 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모시고 살았던 곳이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 에베소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도 요한은 에베소에서 목회하다가 황제숭모를 하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지중해에 있는 밧모섬에 유배되어 갔습니다. 이 밧모 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편지를 받는데, 처음 편지가 에베소 교회에게 주시는 편지입니다.

 

(2:2-3) “(2)내가 네 행위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일단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십니다. 여기서 쓰인 알다라는 단어는 기노스코(ginwvskw)가 아니라, 오이다’(oi\da)입니다. ‘기노스코는 우리 인간이 후천적인 교육과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되는 지식의 진보를 나타낼 때 쓰는 단어입니다. 반면에 오이다는 처음부터 완전하고 완벽하게 삶의 모든 사실들을 사진 찍듯이 아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게 내가 네 행위를 안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쓰인 행위는 엘가입니다. 이것은 복수입니다. 행위들을 안다는 말씀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실천에 있어서도 한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로 실천이 있는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주님이 칭찬하실 행위들이 많았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교회가 행함이 없지 않습니까? 행함이 없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많은 욕을 먹지 않습니까?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그러한 행함이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게다가 그 행함은 그저 하는 척하는 행함이 아니라 수고라고 예수님이 말씀해 주실 정도로 강도가 깊은 실천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수고는 한 두 번 하고 마는 수고가 아닌 지속성이 있는 수고였음으로 인내 가 있는 수고였습니다.

어떤 박해와 방해가 와도 참고 견디는 지속적인 수고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그 행위들수고와 인내는 인간적인 야망이나 자랑이 아니라 3절의 내 이름을 위하여 였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한 것들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대단한 실천이 있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유주의 신학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실천은 잘합니다. 슈바이처 같은 사람들 보세요. 슈바이처에게 예수님은 이 땅을 살아갔던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박애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슈바이처는 평생을 아프리카에서 원주민들을 치료하다 갔습니다. 슈바이처는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슈바이처가 아무리 훌륭한 실천을 하며 살았다고 해서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이슬람이나 불교인들이나 여호와의 증인들, 하나님의 교회, 신천지, 이들도 자기들의 교리를 퍼뜨리기 위해 실천을 많이 합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믿지 않는데 천국갈 수 있습니까?

바른 교리가 없이 아무리 훌륭한 실천을 하며 산다고 해도 절대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정통 교리마저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디모데-아볼로-브리스길라-사도요한 같은 성경에 나오는 쟁쟁한 인물들이 목회를 한 교회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3차전도 여행 때 삼 년간 머무르면서 두란노 서원에서 매일 5시간씩 2년 동안 기독교 교리 설교를 했던 교회입니다.

매일 다섯 시간이면 오늘 날로 따지면 보통 하루에 7-8편씩의 설교를 들은 것입니다. 거의 5000편의 설교에 해당하는 교리를 사도 바울로부터 직접 배운 사람들입니다.

 

일주일에 한 편씩 설교를 듣고 가는 Sunday christian들이 꼬박 안 빠지고 100년을 들어야 할 분량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성경공부하자그러면 제일 싫어합니다.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생기기 때문에, 말씀을 계속 들어야 신앙이 성장하고,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믿음을 생기게 하는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둘째는 선포되는 설교 말씀입니다. 설교를 많이 들어야 합니다. 셋째는 양심입니다. 이 세 가지가 하나가 될 때, 믿음이 생기고, 쑥쑥 성장하는 것입니다.

 

설교가 길다고 불만이십니까?

여러분들이 일주일에 다 합쳐 봐야 설교 듣는 시간이 얼마됩니까? 한 시간됩니까? 일주일에 한 시간도 안 듣고, 어떻게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유혹을 이기고, 신앙이 성장하겠습니까? 수요예배도 좀 나오고, 금요기도회도 좀 나오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야 신앙이 성장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그렇게 정통교리에 바로 서 있었기 때문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했고,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낼 수 있는 실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무엇을 책망하십니까?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이런 에베소 교회가 이렇게 책망 받아야 한다면, 오늘 우리는 얼마나 책망받겠습니까? 우리를 향하여는 무엇을 책망하실까요?

 

너희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처음 열심히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옛날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하여 갖고 있었던 열심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2:2), 밀월의 시간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열정이 식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가졌던 믿음, 열정의 감격이 없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2)그러나 그보다도 그리스도인의 교제와 형제에 대한 최초의 사랑, 최초의 아름다운 감격이 식어졌다는 것입니다. 초기에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서로 참되게 사랑하고 형제로서 단결했습니다. 처음에는 싸움도 없고, 마음이 쉽게 뜨거웠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신앙도 식어져 가고, 열심도 식어져 가고, 성도와의 사랑도 식어졌습니다. 성도 간에 서로 믿지 못하고, 불신하고,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하고, 서로 간에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고 서로 끼리 끼리 모이면서 서로 간에 불신의 벽을 쌓아 갔습니다.

 

신앙은 바른 신앙을 가졌는 것 같은데,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믿음 약한 사람을 무시하고, 멸시한다면, 사랑의 교제가 끊어져 버린다면, 내 바른 신앙의 댓가가 너무 큰 것입니다.

 

<은혜와 감사, 감격이 있는가?>

에베소 교회의 첫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를 바탕으로 한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 5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2:4-5)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바로 그 처음 사랑, 처음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행위이며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40년 후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이 편지를 받아 적을 때는 행위도 여전히 풍성했고 교리도 바르게 가지고 있었는데그것이 형식적인 행위요 형식적인 지식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바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행위로 이단들도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로부터 디모데, 아볼로, 브리스길라, 요한 같은 쟁쟁한 목회자들의 설교를 듣고 신앙생활을 해 온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외적인 완벽한 모습을 하고 있는 가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엄청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는데 그게 그냥 지식으로 끝나버리는 가짜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남들이 존경할 만한 행위들을 하는데 자기의 의를 쌓는 가짜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은혜와 감사가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서 나오지 않은 것들은 아무리 화려한 모양을 하고 있어도 책망 받아 마땅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아무런 감사나 감격 없이 하나님에 대해 많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대단히 공부를 많이 한 신학자들, 대단히 교회를 위해 헌금 많이 하고 큰 일을 많이 한 사람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높임 받는 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삶 속에 감사는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해 내야할 의무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 냈을 때 자랑이 난무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빚쟁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내가 이만큼 해 냈으니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칭찬하셔야 한다라고 은연중에 하나님을 빚쟁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나오는 것은 우리에게 허락된 은혜가 내 속에 믿음으로 녹아져서 감사와 감격이 흘러넘치게 되고 너무 감사해서 자연스럽게 그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분에 맞게 살고픈 욕구와 노력이 나오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내 마음속에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게 있으십니까?

 

그런 사람들은 절대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불가능한 죄인이었는지를 깨달아 알고 자신은 저 지옥의 가장 낮은 곳에 떨어져 버릴 존재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해 냈다고 해서 그것으로 하나님과 형제들에게 자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거듭난 사람들은 은혜가 뭔지, 믿음이 뭔지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절대 자기 공로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5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오른 편에 있는 양들에게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5-36) 하나님, 우리가 언제 그런 일들을 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나 지옥에 떨어질 왼편에 있는 염소들하나님, 우리가 언제 안 했습니까?” 그럽니다.

둘 다 행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쪽은 기억을 하고 있고, 한 쪽은 기억을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행한 행위는 자랑이 되지 않는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억을 못하는데 무슨 자랑을 합니까?

 

모래 위에 지은 집, 반석 위에 지은 집 둘 다 집은 짓습니다. 모래 위의 집이 더 화려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집을 지은 것이 구원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여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했고, 목사 노릇했고, 이렇게 기적도 일으키고 했는데, 나를 모르시다니요?’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는 너를 모른다. 모두 내게서 떠나가라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요. 여러분 안에 은혜와 감사가 있으십니까? 그게 있어야 성도입니다.

 

옛날에는 교회에서 사경회가 있으면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목포에서 평양까지 자기가 그 사경회 기간 동안 먹을 쌀하고 헌금하고 머리에 이고 지게에 지고 걸어서 그 사경회에 참석을 했다고 합니다. 너무 말씀이 듣고 싶어서 천리 길, 이천 리 길을 걸어서 며칠 말씀을 듣고, 감격해서 또 걸어서 목포까지 강원도까지 내려갔습니다. 무엇을 자랑하려고 그랬겠습니까? 그 분들이 난 걸어서 사경회 참석했다자랑하고 다녔겠습니까?

 

이렇게 교회가 많고 말씀이 풍성하다고 하는 오늘날 그런 열심과 처음 사랑은 다 어디 갔습니까? 모여서 기도하자고 하는데 외면합니다. 예배에 참석하라고 하는데 그냥 무시해 버립니다. 예배할 때 잠 하나도 못 이깁니다. 그게 감사와 사랑을 아는 자들입니까? 예배에 와 달라고 부탁을 드려야 합니다. “예배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합니다. 억지로 예배를 했으니 감사의 표시를 해야겠지요.

 

마음들이 다 강퍅해져 있고, 굳어져 있습니다. 은혜와 감사가 다 사라졌습니다. 내 마음에 안 들면, ‘교회에 안 나와 버리면 되지 뭐, 꼭 나와나 되나? 내가 교회에 안 나오면 누구가 손해인데, 나야 다른 교회에 가 버리면 그만이다..‘

이런 심보, 이런 고약한 생각을 하고 교회에 다니니, 무슨 은혜와 감사 있겠습니까? 이게 오늘 우리 나라의 교회의 모습이요, 교인들의 신앙상태입니다. 감사와 은혜가 다 땅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교회에 다니면 천국 갈 수 있습니까?

 

성경에 보면 천국 못 가는 사람들이 나오잖습니까?

천국 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거듭난 사람, 성령 받은 사람, 이 사람을 사도행전에서 제자라고 합니다. 이 사람을 알곡 성도라고 하고, 옥토, 지혜로운 다섯 처녀, 반석 위에 지은 집, 오른편에 있는 양이라고 하고,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자라고 합니다.

 

거기에 비해 천국 못 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거듭나지 않은 사람,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 가룟 유다 같은 사람,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기적을 맛본 자들, 오병이어의 기적에 참여한 자들, 예수님이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 하실 때에 옷을 벗어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길에 깔았던 자들, 그러나 예수님이 붙잡혔을 때에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자들, 가시 밭, 자갈 밭, 길 가와 같은 자들,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다섯 처녀, 모래 위에 지은 집, 쭉정이, 왼편에 있는 염소, 한 달란트 받은 자입니다. 이런 자들은 천국에 못 갑니다.

 

<은혜와 감사가 없는 자에게 주시는 처방>

그 감사와 은혜에서 떠난, 메마른 행위를 하고, 머리만 커져있는 교회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처방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생각하라라고 하는 것은 그저 곰곰이 생각해 보라는 말이 아니라 그 헬라어 단어 mnhmoneuvw 므네모뉴오 입니다. ‘remember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현재 시제입니다. 계속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를 계속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 복음을 계속 상고하고 묵상하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금방 교만해 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기억하고 계속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도도 안 하고 성경도 안 읽고 무슨 배짱으로 신앙생활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로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연이어 처음 행위를 가져라“ ”처음 행위를 행하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둘 다 부정과거 시제입니다. 결단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김 유신 장군이 기생집 출입을 끊겠다고 결심한 후에 말 위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말이 김 유신 장군이 평소에 잘 가던 대로 기생집으로 향했습니다. 김 유신 장군이 잠에서 깨어 말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습니다. 그것은 말에게 책임을 물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러한 바른 선택에 대한 결연한 의지가 동반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그렇게 돌이켜 회개하고 행하는 자들이 알곡입니다. 가짜들은요? 조금 마음에 찔리기는 하겠지만 계속해서 그 개가 토해놓은 것 속에서 허우적거릴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십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공과 실패는 차후 문제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이 뭐라고 했습니까? 여러분 마음속에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고 했습니다.

 

노력하다가 실패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로 우리에게 옵니다. 그러나 성도는 거듭 실패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고통스러워하고, 번뇌하고, 좌절하다가 또 정진합니다. 그러나 또 연거푸 실패를 합니다. 성도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나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자라는 은혜의 필연성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하나님의 은혜로 쑥 성장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우리더러 이루어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루어 낼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실 일도 없었겠지요. 열심히 교육하고 훈련시키면 가능한 일이라면 예수께서 굳이 죽으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 가십니다. 거기에 우리의 열심을 동원시키시는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믿음에서 나온 처음 사랑을 모르는 자들은 가짜일 수 있습니다

은혜를 아는 자들이 이기는 자들이고, 이기는 자들만이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들만이 화염검(두루 도는 불 칼)으로 막혀있는 생명나무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아담과 그 후손들에게 막혀버린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우리에게는 열려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이 감격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여러분,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맞다 면 여러분은 이미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으며, 그리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진시황은 불로초를 찾아 헤매다가 결국 마흔 아홉에 죽었습니다. 충성스러운 신하 서복이 불로초를 찾으러 나갔다가 그게 불가능한 것을 알고 아예 중국을 탈출했습니다. 진시황은 동해에 신선이 산다고 전해 듣고 3000명의 소년 소녀들을 배에 태우고 보물들을 가득 실어서 불로장생 초를 구해 오라 시켰습니다. 그런데 의원 서복은 그게 터무니없는 일이라는 것을 일찍이 안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릴 것은 진시황이 누렸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하늘의 왕 노릇을 하실 분들입니다. 게다가 생명나무의 과실까지 드셔서 영원을 사십니다. 그 은혜를 입은 자들이 어찌 감사하지 않겠으며 어찌 그 신분에 맞는 삶을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은혜와 감사에 근거한 결단과 행위가 함께 나오는 자들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행했던 그 처음 사랑이 여러분의 삶 속에 다시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출처 : 대구영은교회
글쓴이 : 주님의 머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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