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요한계시록

[스크랩] 5월7일,[요한계시록20]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2)

☆ 주님의 머슴 2017. 5. 7. 18:36

주일설교(2017/5/7) - 요한계시록(20)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2)

3:14-22                                                                                535, 359

====================================================================

요한계시록의 이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내용은 전체 요한 계시록의 요약입니다. 그 내용이 점진적입니다. 특히 이 요한계시록의 이 일곱 교회의 내용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현 교회시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후, 이 땅에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고, 앞으로 주님이 오실 때까지 존재할 전 세대의 교회들의 상태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상태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2-3장의 일곱 교회를 통해서, 지금 우리의 신앙상태를 점검해 보십시오. 지금의 이 신앙상태를 통해 앞으로 반드시 일어날 재앙의 날, 큰 시험의 날에 내가 피할 수 있을까? 우리 교회는 이 시험의 날을 면해 주실까 하는 것을 점검해 보게 하고, 우리의 현 위치가 어디쯤 있는가 하는 것을 알게 해 주기 위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도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지난 주일에 라오디게아 교회의 배경과 도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오늘은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말씀을 한 절 한 절 풀어서 설교 하겠습니다.

 

14절을 읽겠습니다.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나신 모습입니다.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요, 창조의 근본이신 이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앙상태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아멘도 없고, 충성도 없고, 참된 증인노릇도 없고, 예수님을 창조의 근본되시는 하나님으로도 믿지 않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들이 우리에게 성취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아멘이신 예수님이 있어야 합니다. 아멘이신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두지 말아야 합니다. 아멘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셔야 하고, 또한 우리가 아멘이신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아멘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모든 사역에도 믿음으로 아멘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믿음으로 아멘하여야 합니다.

 

아멘이 없으면 진실성이 없습니다. 아멘이 없으면 충성도 없고, 참된 증인 노릇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멘이 없으면 예수님이 창조의 근본이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멘은 우리 주님 예수님의 고유한 이름과도 같습니다. אמן 아멘은 헬라어로는 ληθινός 알레디노스 - ‘참되신 분’ ‘진실로’ ‘진짜로입니다. 예수님이 참됨, 진실, 진리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우리가 아멘 할 수 없고, 기독교의 신앙 그 자체가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아멘이 없다는 말은 내가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바로 이런 상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15,16절을 읽겠습니다.

(15,16)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그들 자신들 보다 그들에 대해 더 잘 알고 계시는 이가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 남들에게 모르게 하려고 안 그런척하고 살지만, 우리의 속 까지도 드려다 보시고 아시는 주님이, 오늘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상태를 분명하게 꼬집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신앙상태가 어중간한 상태입니다.

 

이 구절을 오해해서 믿으려면 확실히 믿고, 안 믿으려면 확실히 믿지 말라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뜻은 아닙니다. ‘차가울 거면 확실하게 차던지, 더울 거면 확실하게 뜨겁든지 미지근하게 믿지는 말라는 말입니다. 문맥을 잘 보시면 찬 것이나 더운 것이나 둘 다 좋은 것입니다. 단지 미지근하지만 말라는 것입니다.

히에라폴리스의 온천수와 골로새의 차가운 생수를 수도관을 통해 대다 먹던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은 그 말뜻을 금방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럼 미지근한 신앙이 무엇인지 알면 우리가 차든지 뜨겁든지 할 수 있겠지요?

 

그들을 미지근하다고 말씀하시는 근거가 17절부터 나오는 내용입니다.

17절을 읽으십시다.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을 부자라 했고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했습니다. 그게 왜 미지근한 신앙의 근거가 되느냐? 부자라 부요하여에 쓰인 단어가 헬라어 πεπλούτηκα 페플루테카는 직설법 완료시제입니다. 나는 부자인데 나를 부요하게 만든 것은 나다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자기의 힘으로 부자가 되어 스스로 만족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걸 미지근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호세아 128에 가서 부연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12:8)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내가 수고한 모든 것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내게서 찾아 낼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

그러면서 에브라임은 자랑합니다. ', 내가 정말 부자가 되었구나. 이제는 한 밑천 톡톡히 잡았다. 모두 내가 피땀을 흘려서 모은 재산이니, 누가 나더러 부정으로 재산을 모았다고 말하겠는가?‘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심지어 신앙의 성숙까지도 하나님의 인도해 주셔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의 종교행위를 자랑합니다. 자기가 이루어 놓은 경제적이며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모든 결과들을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교만해져서 자랑을 한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28절을 보십시오.

(2: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다시 호세아135-6절을 보십시오.

(13:5-6) “(5)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알았거늘, (6)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이 등 따서고 배부르니까 하나님을 잊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이 정말 하나님을 잊었나요? 에브라임은 하나님께 계속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잊었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미지근한 신앙이 왜 옵니까? 교만한 신앙이 왜 옵니까? ‘나도 이 정도로 믿으면 됐다라고 교만한 신앙이 왜 옵니까?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왜 잊어버립니까? 등 따서고 배불러서 살 만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시시하게 보는 교만 때문이요,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는 불신앙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 중에 어중간한 미지근한 신앙은 주님이 가장 싫어하는 나쁜 것입니다. 신앙 중에도 가장 나쁜 신앙이 이 미지근한 신앙입니다. 특히 오래 믿었다고 하면서 미지근한 신앙은 아주 비참한 신앙입니다. 주님이 제일 싫어하는 신앙입니다. 몰라서 미지근한 것이 아니고 알면서도 미지근한 것은 주님을 불신하는 것이요, 주님을 무시하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을 예수님이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16절하)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7:22-23)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가장 무서운 책벌이 무엇입니까?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입니다. 미지근한 물이 비위를 상하게 해서 구토를 일으키는 것처럼, 미지근한 신앙은 주님이 제일 싫어합니다.

 

예수님이 토해 버린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지옥에 떨어진 영혼 중에 천국으로 갈 줄 알았던 자들이 많을 겁니다. 자기들은 우쭐대면서 교만했을 겁니다. 우리는 미지근한 신앙에서 자신을 속이면서 잘 믿는 줄 착각하는 자들이 되지 맙시다. 할렐루야! ) <한우를 토해 내는 이야기>

 

18절을 읽으십시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첫째는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둘째는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셋째는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말씀하시느냐 하면, 17절에서 나는 부자다. 부족한 것이 없다.” 라고 하지만, 실상은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기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돈이 있어서 자기들은 부자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그들을 부자라고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었고, 벌거벗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모르지만, 영적인 눈으로 보면,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었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누구한테 사라고 합니까? 예수님께 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금도 그냥 금이 아니고 불로 연단한 금입니다. 최고의 금입니다. 불순물이 없는 금입니다. 처음에는 공짜로 그 금을 주시지만, 그 받은 금을 잃어버리게 되면, 돈을 주고 사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파는 금은 불로 연단한 금만 팝니다.

우리는 부자라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실상은 너희가 가난한 자들이니 내게 금을 사서 부요해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금은 그냥 금이 아니라 불로 연단 한 금입니다. 그럼 불로 연단 한 금이 무엇인지 한번 보지요.

 

스가랴 139절입니다.

(13:9)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베드로전서 16-7절입니다.

(벧전1:6-7)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불로 연단한 금은 시련을 견디어 낸 믿음입니다. 성경에서 금을 말할 때는 믿음을 말하는 겁니다. 여기다가 불로 연단한 금은 시련을 견디어 낸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 믿으면, 예수님이 선물로 금 같은 믿음을 주시고, 세마포 옷을 입혀 주시고, 영적 눈이 열리도록 해 주십니다. 예수 믿기 전에 알지 못했던 신비로운 세계, 하나님 은혜의 세계, 신비한 말씀의 세계를 열어주셔서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예수 믿으면 주님이 다 공짜로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습관적인 신앙, 무뎌진 신앙으로, 은혜도 잃어버리고, 말씀도 잃어버리고, 열정도 잃어버리고, 미지근한 신앙이 되어서 믿음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리면 다시 공짜로 주시는 게 아니고, 이제는 내가 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련을 이겨내는, 핍박과 고난을 이겨내는 믿음을 사라는 것입니다. 산다는 말은 그만한 댓가를 지불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수고하고 노력하고 애를 써야 된다는 것입니다. 많이 기도 하고, 많이 말씀 듣고, 많이 헌금하고, 많이 예배하고, 많이 신실하고, 많이 주님을 사모하고, 그만큼 열심을 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것은 그만큼 댓가를 지불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19)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흰 옷도 사서 입어서 수치를 면하고, 안약도 사서 발라서 영적으로 다시 환하게 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옷에 대한 말씀이 많습니다.

 

(3:4)보면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흰 옷을 더럽혔다는 것은 믿음을 잃어버린 것을 말합니다. 옷을 더럽히지 않으면 합당한 자라고 인정해 주십니다.

 

계시록 79에 보면 “(9)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큰 소리로 외치며 찬양하는 모습을 봅니다.

(13,14)에는 “(13)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9:7-9)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은 어린 양 혼인잔치에 세마포 옷을 입은 자만 참여 할 수 있으며, “그 어린양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라고 하시는 것십니다.

 

흰옷은 의의 옷, 구원의 옷을 말합니다. 이 옷을 벗고 벌거벗었다는 것은 믿음을 잃어버렸다. 구원을 잃어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는 겁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면서 자기의 영적 상태, 영적 상태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약을 사서 발라 자기의 영적 상태, 신앙 상태 똑 바로 볼 수 있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19절을 읽겠습니다.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여기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속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떠나버린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사랑한다라고 합니다. 너무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한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간곡히 부탁합니다. 그러면서도 엄한 명령을 합니다.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라고 하십니다.

 

사랑의 반대말이 뭡니까? 미움인가요? 무관심입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을 왜 책망하고 징계합니까? 다 사랑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책망과 징계가 있는 삶은 하나님께서 절대 포기하지 않고 계시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책망과 징계는 하나님의 열심의 증거입니다.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라는 구절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끌고 가실 것이므로 이제 그만 항복하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좇아가라는 말입니다. 할렐루야!

 

20절을 읽으십시다.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여기서 문은 무슨 문입니까? 마음의 문입니다.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모셔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예수님이 없는 자는 세상의 물질, 부귀영화, 욕망, , 명예, 사랑, 세상의 모든 것으로 꽉 차 있는 것입니다. 세상것에 온통 내 마음이 다 가 있으면, 내 마음의 문이 닫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에 들어 올 수 없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 믿을 때는 내 마음에 예수님 와 계셨는데, 세월이 흐른 후 이제 와서 보니, 내 마음이 세상 것이 꽉 차 있고, 예수님은 없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지 나도 모르게 예수님은 밖에 있고, 내 속에는 다른 세상 것이 꽉 차있습니다.

옛날 초대 교회에서는 예배 후에 식사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같은 동질이요, 같은 뜻을 가지고 있으며, 한 목표를 가지고 있고, 함께 교제하는 친구요, 한 공동체의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속에 들어와 함께 식사하면서, 함께 교제를 나누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 눈이 닫혔고, 영이 죽어서 이 사실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두고 있습니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양들 아닙니까?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10:26-27)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10:14-15)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양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양들은 다 마음의 문을 열고, 마음에 주님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이, 본문의 설교로 촉발되었다고 합니다. 190716일 주일 저녁예배 때였습니다.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는 평안남도 도사경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 날 저녁 집회에는 평양 장대현 교회를 섬기고 있던 길선주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설교의 제목은 이상한 귀빈과 괴이한 주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중심으로 한 설교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 밖에 서서 그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빗대어서 설교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날 설교의 요지는 이러했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이상한 귀빈>이십니다. 존귀하신 분이 비천한 땅에 오셨으니 이상한 귀빈이시고, 귀하신 몸으로 문 밖에서 오래 기다리시니 이상한 귀빈이십니다. 또한 전능하신 분이 문을 열어달라고 간절히 두드리시니 이상한 귀빈이십니다.

 

아울러 주인이 아니면서도 주인처럼 집안에 들어앉아 있는 사람은 <괴이한 주인>입니다. 자비하신 귀빈을 환영하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며, 간절하신 음성을 듣지 않으니 또한 괴이한 주인입니다. 그리고 굳게 닫은 방문을 열지 않으니 정말로 괴이한 주인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섬기고 있는 장대현 교회가, 그리고 자신을 비롯한 그날 집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바로 괴이한 주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그는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문을 여십시오. 문을 여십시오. 문을 열고 존귀하신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성령님을 영접하십시오.”

 

설교를 마치고 난 뒤에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여기 저기에서 아이고 아이고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통회 자복하는 소리였습니다. 교회 안은 순식간에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회개하는 마음으로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 날 예수님은 각자의 마음속으로, 그리고 장대현 교회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1907년에 있었던 평양대부흥운동은 그렇게 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올해로 평양대부흥운동은 110년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회개와 대부흥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행여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들어오시고 싶어도 들어오실 수가 없을 정도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세상적이며 지저분한 것들로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하고, 애통하는 심령이 되어야 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령으로 열심을 내어 예수님을 영접합시다. 그리함으로서 110년 전 활활 타오르는 불길처럼 강하게 일어났던 대부흥의 역사가 우리 교회에도 일어나고, 이 땅에 일어나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마지막으로 21절을 읽으십시다.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일곱 교회마다 마지막에 똑 같은 말씀을 반복하고 있는 말씀이 이기는 자에게는 ...” 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기는 자에 대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교회 시대에 모든 성도들을 향하여 이겨라고 하시는 겁니다. 세상을 이기고, 사탄을 이기고, 죄악을 이기고, 믿음을 지켜라 고 하시는 겁니다. 교회 시대에는 믿음을 지키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결 론>

한번 따라합시다.

세상을 이기자.

사탄을 이기자.

죄악을 이기자.

믿음을 지키자.

 

 

 

 


출처 : 대구영은교회
글쓴이 : 주님의 머슴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