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요한계시록

2017,5,14(일) [요한계시록21]하나님의 보좌 앞에

☆ 주님의 머슴 2017. 5. 14. 15:44

주일설교(2017/5/14) - 요한계시록(21)

하나님의 보좌 앞에

4:1-2                                                                                                   483,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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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부터는 상황이 바뀝니다. 지금까지는 이 땅에서 본 환상이지만, 4장부터는 하늘의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끌어올려져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본 환상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땅에서 본 환상과 하늘에서 본 환상을 보여 주면서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여 주고 있는 이중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TV의 드라마나 여러 프로그램들을 보면 카메라가 여러 대를 가지고 여러 방향에서 촬영을 하는 것처럼, 요한계시록도 땅에 일어나는 일들과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여러 방향에서 촬영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다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2,3장은 지상에 있는 교회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상에 있는 교회들을 향하여 예수님 자신의 본 모습과 예수님이 누구인지 보여 주시고, 교회들의 잘못을 지적해 주시고, 그것들을 고치라고 경고와 권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기는 자들에게 천국의 위대한 약속들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2,3장의 이 지상에 있는 교회들을 향하여 이기라. 이기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일곱 교회를 향한 핵심되는 말씀이 이기라입니다.

 

이제 4장부터는 이 땅에 임할 미래의 사건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반드시 오신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의 막을 내리시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4장부터는 장차 되어질 일들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먼저, 성경 한 군데를 찾아 읽읍시다.

요한계시록 119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본 것지금 있는 일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 여기서 네가 본 것1장을 말합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계시를 받고,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본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 있는 일2-3장을 말합니다. 일곱 교회를 말합니다. 이 일곱 교회 이야기를 지금 있는 일 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일곱 교회가 현재 교회시대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장차 될 일4-22장까지 전체를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4-22장에 있는 장차 될 일이 본론입니다. “장차 될 일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은 11을 함께 읽으십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요한계시록 전체는 반드시 속히 일어 날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기록된 것입니다.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오늘 읽은 41절 하반절에서도 똑 같은 말씀입니다.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라고 합니다. 이게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4장부터는 장차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다시 오늘 본문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여기서 이 일 후에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meta; tau'ta (메타 타우타) 라는 말입니다. 후반절의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라는 말에서 이 후에 라는 말도 meta; tau'ta (메타 타우타) 라는 말입니다. 같은 말입니다.

 

그러면 이 일 후에라는 말에서 이 일이 뭐냐?

조금 전에 읽은 요한계시록 119을 다시 읽어 봅시다.

그러므로 네가 본 것지금 있는 일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가 본 것1장이고, “지금 있는 일2,3장이고, “장차 될 일4-22장이라고 했지요?

 

우리 다시 오늘 본문 1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그러니까, 이 일 후에나 후반절의 이 후에이 일2,3장에서 일곱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니까, 2,3장의 일곱 교회시대를 지난 이 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면 아멘!

 

1절은 요한계시록 전체의 중심 부분으로 넘어 가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이 부분은 장차 일어날 일의 출발입니다. 사도 요한은 성령 안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성령에게 이끌리어서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의 보좌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 땅에 끔직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모든 시작이 바로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시작 되더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고하신 분으로 위엄 가운데서 그 보좌에 앉아 계시고, 그의 통치를 아무도 대적하거나 흔들 수 없다 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앞으로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즉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은 하늘의 보좌에서부터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의 보좌가 컨트롤 박스입니다. 군대로 말하면, 본부인 사령부와 같은 곳입니다.

 

그 다음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라고 합니다.

우리 한글 성경에는 빠져 있지만, 원문에는 보라! Behold”, 헬라어 원문으로는 δο이두 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보니, 보라! 하늘에 열린 문이 있다라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이 문이 열리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이 아니고, 이미 열려져 있는 문을 보았습니다. 그 열린문을 보면서 감탄을 하는 것입니다. “보라!” 이것은 감탄사이지요?

상상을 해 보십시오. 내가 지금 요한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을 공부 할 때마다 내가 성경의 주인공이 되어 내가 거기에 참여해서 있는 것으로 상상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요한이 지금 하늘의 열린 문을 봅니다. 너무 황홀하고 감동적입니다. 정신 없이 하늘의 열린 문을 봅니다. 그런데 그 열린 문 안에서 요한이 처음에 들었던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을 듣습니다.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처음에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을 언제 들었습니까?

110절부터 읽으십시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우리는 이 말씀을 더 읽지 않아도 그 분이 우리 주 예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렇게 보고 싶었던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이 음성은 밧모섬에서 주일에 기도하다가 처음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음성을 듣고, 뒤를 돌아보았더니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의 본래의 모습을 봅니다. 신비로운 모습, 환상적인 모습을 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승천해 가신 후에 처음 만나는 장면입니다. 뒤에서 예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하늘의 열린 문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그전에 들었던 똑같은 나팔 소리 같은 음성으로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각 자가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만남이 일어나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밧모섬에 왜 갔습니까?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핍박으로 유배되어 갔습니다. 예수의 환란과 나라에 동참하는 자 라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기 때문에(1:9) 유배되어 갔습니다. 환경이 열악한 유배지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에 포로되어 가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에스겔 1장에 보면 에스겔도 요한처럼 그발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1:1) 했습니다. 에스겔도 열악한 환경인 포로생활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다니엘도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시고,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신 하나님을 만납니다(6:1).

예레미야도 나라가 풍전등화 같은 위기 앞에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납니다(1). 모세는 40년 동안 호렙산 밑에서 목동 생활 할 때에 하나님을 만납니다. 바울은 특이하게 예수 믿는 성도들을 잡아서 옥에 가두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길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모든 제자들은 다 예수님 만난 체험으로 살아가지요? 성경의 인물들 뿐 아니고, 우리보다 앞서간 모든 믿음의 선배들은 주님을 만난 그 기쁨으로 살았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성령의 충만 함으로, 말씀으로, 주님을 만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둘째는, 열린 문이 있어야 합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이미 열려져 있는 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열린 문을 봅니다. 그리고 이 열린 문을 통해서 보좌 앞으로 이끌려 올라가기도 하고, 이 열린 문을 통해서 하늘의 영적세계를 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도 천국과 잇대어 있고, 소통이 일어나는 열린 문이 있어야 합니다.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외삼촌 집으로 가다가 벧엘이라는 곳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는데, 꿈에 하나님의 보좌까지 다다른 사닥다리를 보게 됩니다. 그 사닥다리에는 천사들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고, 그 사닥다리 꼭대기에는 하나님이 서 계십니다. 사닥다리 꼭대기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13)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28:13-15).

꿈에서 깬 후 야곱은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는 것을 내가 몰랐구나하면서 이곳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합니다.

 

야곱이 위기 때에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늘의 열린 문을 만납니다. 그 열린 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봅니다.

에스겔도 에스겔 11절에서 어려운 포로생활에서 하늘의 문이 열리며 하나님을 봅니다. 그리고 그 문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말씀을 받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열린 문이 있어야 합니다. 하늘의 열린 문이 나에게 있어야 합니다. 어려울수록, 힘들수록 나에게 열린 문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열린 문이 있어야 합니다. 하늘 문을 열어 놓고 사는 사람과 하늘의 문이 열리지 않은 사람의 인생은 뭔가 다릅니다.

 

휴지 중에 잘 풀리는 집이라는 휴지가 있더라구요. 휴지가 잘 풀려서 빨리 사용하게 한답니다. 그 휴지를 사용하면 집이 잘 풀린다는 뜻이겠지요? 그 휴지를 사서 쓰면 우리 집이 잘 풀립니까?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개인이든, 가정이든, 국가든 하늘에 열린 문이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 영적 세계로 향하는 열린 문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잘 풀립니다. 할렐루야!

 

요한계시록에서는 세 가지의 문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1) 천국 문입니다.

이것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자라면, 다 이 천국 문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혹 예수 믿는 다고 하면서 천국 문은 닫아 놓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나한테는 항상 천국 문이 열려 있다고 착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구원의 문, 천국 문이 우리에게는 열려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앞에서 배운대로 일곱 교회 중에 빌라델비아 교회에만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3:8) 라고 하십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하여 천국의 열린 문을 약속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천국의 열린 문이 있으시길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2) 예수님을 영접하는 마음의 문입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3:20)

마지막 때일수록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마음의 문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 두면 안됩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마지막 때에 나타나는 특징 중에 하나가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더 강퍅해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강퍅한 마음은 점점더 하나님과 멀어져 갑니다. 말씀이 스며들 틈이 없고, 은혜가 스며들 틈이 없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2-13) 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문이 열린 자, 열린 문이 있는 자가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받아 들이고, 주님의 은혜를 받아 들이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 들이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을 향하여, 천국 향하여, 주님의 은혜를 향하여, 주님의 말씀에 열린 마음의 문이 있는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계시의 문입니다.

일단 사람이 자기의 마음 문을 예수님께 열어드리면,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나타내 보여 주시고, 천국과 이 세상의 놀라운 사실을 드러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나에게 주어질 기업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나에게 주시는 큰 능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고, 알게해 주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더나아가서 예수님의 재림과 마지막 때에 관한 사건 까지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17-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에게 계시의 문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열린 계시의 문을 가지십시오. 할렐루야!

 

셋째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해서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 주님은 각 상황에 따라 나팔 소리 같은 음성으로도 말씀하시지만, 세미한 음성으로도 말씀합니다. 엘리야는 호렙산 한 굴에서 여호와의 세미한 음성으로 새로운 사명을 받습니다(왕상19:12).

요한계시록에는 주로 요한이 큰 음성을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작은 음성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다른 선지자들도 작은 음성, 세미한 음성을 많이 듣습니다. 나팔 소리 같은 음성, 큰 음성이라고 해서 잘 들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더 잘 못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귀는 너무 큰 소리도 잘 못 듣고, 너무 작은 소리도 잘 못 듣는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 육신의 귀로 듣는 것이 아닙니다. 영의 귀로 듣는 것입니다.

큰소리로 말씀하시든지, 작은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든, 우리는 그 음성 듣기를 좋아해야 합니다. 요즘은 하나님의 음성 듣기 훈련도 있습니다. 세상의 소리에 마음이 빼앗겨 살고, 세상의 요란한 소리를 들으면서 따라 살아가는 인생들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사도 요한은 나팔 소리 같은 음성으로 이리로 올라오라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여러분, 사도 요한은 우리의 대표입니다. 그리고 예표입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이렇게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옵니다. “이리로 올라오라.” 하는 소리를 들을 때가 옵니다.

그런데 세상의 소리만 듣고 살다가, 우렁찬 나팔소리 같은 음성이든, 세미한 음성이든 우리가 못 들으면 어떡하지요?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중에 기회가 오면 하나님의 음성 듣기에 대한 설교를 하겠습니다.> 세상 소리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없습니다. 특히 인간들의 소리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없습니다. 내 심령에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여기서 이리로 올라오라.” 라고 하는 말씀은 휴거가 아닙니다. 제가 처음에 모르고 이것이 휴거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오후시간에 요한계시록 설교를 짧게 한번 했지요? 그 때는 모르고, 이 말씀이 휴거인 줄 알았습니다. 이 말씀은 휴거가 아닙니다. 휴거는 언제 일어나느냐 하면, 마지막 나팔을 불고, 예수님 재림 할 때 일어납니다. 이 말씀은 계시록 11장의 일곱째 나팔을 불 때, 그 때 휴거에 대해서 상세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요한에게 예수님이 이리로 올라오라.” 라고 합니다. 왜 올라 오라고 합니까? 장차 될 일들, 즉 앞으로 반드시 일어나게 될 일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반드시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41절에는 마땅히라고 되어 있고, 11절에는 반드시 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 같은 말입니다. 헬라어로는 dei'(데이)입니다.

역사 가운데 일어난 사건들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들은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임으로 반드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넷째는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요한계시록의 특징 중에 또 하나가 중간 중간에 성령의 감동으로, 성령으로, 성령 안에서라는 말을 자주합니다.

 

110절을 보십시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을 들으니

ejn pneuvmati(엔 푸뉴마티), “성령 안에서입니다. 21:10성령으로”, 17:3에도 성령으로엔 푸뉴마티입니다. ”성령 안에서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성령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게 아닙니다. 종말은 성령과 별개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성령 안에있지 않으면, 종말에 대한 눈이 열리지 않습니다. 병고치고, 능력 행하는 일에만 성령이 충만해야 되는 게 아닙니다. 성령이 충만하지 않으면, 보좌에 올라갈 수 없고, 볼 수 없고, 예수님을 만날 수도 없고, 열린 천국 문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종말의 비밀을 모릅니다.

 

사도요한은 늘 평소에 성령에 충만해 있었기 때문에 성령에 이끌림을 받아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올라갈 수 있었고, 주님을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고, 계시에 눈이 열려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한계시록이 열리고, 깨달아 지고, 종말 사건들이 깨달아지고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전부 성령에 충만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다섯째는, 보좌를 봅니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있는 것을 봅니다. 앞으로 요한계시록에서 진행되는 모든 사건들은 보좌에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보좌가 컨트롤 박스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 라는 것입니다. <이 보좌에 대해서는 다음 주일에 좀더 상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결론>

하늘에 열린 문을 통해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천상의 세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이미 완성되어 있는 천상의 교회가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이 계시고, 24장로와 천사들,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흰옷 입은 구원 성도들이 늘어나는 모습을 봅니다.

 

이러한 천상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고, 하늘의 열린 문이 나에게도 있고, “이리로 올라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장차 반드시 될 일을 볼 수 있고,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 안에서, 성령의 충만함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수준에는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구약의 성막을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첫째는 성막 바깥마당에 겨우 들어와 있는 단계입니다. 그냥 예배만 드리고 가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는 성막 안뜰, 즉 번제단이 있고, 물두멍이 있는 성전 마당에 들어와 있는 단계입니다. 번제단의 비밀, 십자가의 비밀, 회개의 은혜를 아는 정도입니다. 세 번째는 성소에 들어와 있는 단계입니다. 떡상의 비밀도 알고, 분향단의 비밀도 알고, 일곱촛대의 비밀도 압니다. 그래서 성소에 들어와 있는 신앙의 단계만 되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고,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 깊은 기도를 통해 기도의 신비, 기도의 은혜를 누립니다. 그리고 촛대의 비밀, 교회의 비밀, 교회의 신비를 알게 됩니다. 네 번째는 지성소에 들어와 있는 단계입니다. 언약궤 앞에서, 속죄소 위에 계시는 하나님, 좌우 그룹 사이에 좌정해 계시는 만군의 하나님을 뵙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지성소의 신앙이 최고의 신앙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사도요한이 그렇고, 이사야가 그렇고, 예레미야가 그렇고, 에스겔, 다니엘, 사도바울, 성경에 나오는 주님이 사랑한 사람들은 다 지성소의 신앙을 가졌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제 사도요한처럼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는 신앙이 되십시오. 할렐루야!

 

찬양 --> “왕의 지성소에 들어가” (E, 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