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요한계시록

2017,6,4(일)[요한계시록24]일곱 인으로 봉한 책

☆ 주님의 머슴 2017. 6. 4. 17:19

주일설교(2017/6/4)-요한계시록(24)

일곱 인으로 봉한 책 - 운명의 책

5:1-7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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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세 가지 하늘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첫째 하늘은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점령하고 있는 대기권 안의 하늘이 있습니다. 이것을 영어로 sky라고 합니다.

둘째 하늘은 대기권 밖의 별들이 빛나고 있는 하늘로 우리가 흔히 우주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이것을 영어로는 space라고 합니다.

셋째 하늘은 사도 요한이 올라가 본 하늘,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 고후12:2에 사도 바울이 이끌려 올라가 갔다 온 곳입니다. 우리는 지금 과학으로 우주를 정복하려고 하는 시대에 삽니다. 우주선을 보내서 우주를 탐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셋째 하늘은 우주 과학으로 정복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셋째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 영어로는 이것을 heaven 이라고 합니다.

 

사도요한은 4, 5장을 통해 이 셋째 하늘의 광경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셋째 하늘의 문이 열리면서 끌어 올려져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이 셋째 하늘의 놀라운 영광을 봅니다.

5장을 시작하면서 그리고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없지만, 헬라어 원어에는 καί(카이) 라는 연결 접속사가 있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And 입니다. 이 말은 4장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4장과 5장은 간격이 없습니다. 똑같은 하나님의 보좌의 장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4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 앞에 흰옷을 입고 승리의 면류관을 쓴 24장로와 즉 승리한 성도들의 대표를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곱 영인 성령,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상징하는 그룹들인 네 생물과 유리 바다가 펼쳐져 있는 장면을 공부하면서 하나님 나라 안의 이미 완성된, 승리한 하나님의 교회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5장으로 넘어왔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잠깐 언급을 했지만 4성부 하나님은 창조주시다라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면, 5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 주이시다라는 내용이라고 했지요?

 

5장에서는 드디어 일곱 인으로 봉인이 된 책이 나옵니다.

1절을 읽으십시다.

(5: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를 본 후 그의 모든 관심은 하나님의 손에 들려있는 책입니다. 그 책은 사도 요한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 책을 보니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습니다. 그 시대에는 책이라고 해봐야 양피지나 파피루스로 된 두루마리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져 있는 두루마리는 첫째는 하나님의 오른 손에 들려져 있습니다. 신비의 두루마리, 운명의 책이 하나님의 오른 손에 들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세 있고, 능력 있는 오른 손에 들려 있습니다. 그 누구도 손 댈 수 없는 책입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는 자만 가져오고 열수 있는 책입니다. 둘째는 이 두루마리는 안과 밖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빈틈없이 다 쓰여진 책입니다. 권위성, 최종성, 완전성입니다. 셋째는 이 두루마리는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습니다.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다는 말은 함부로 개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열리지 않는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사모하고, 영적으로 열린 자, 사모하는 자들에게만 열려져 깨닫게 되는 책입니다. 특히 일곱 인으로 봉해졌다는 것은 완전성, 완전히 봉해져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힘으로 절대로 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크린으로 일곱 인으로 봉한 두리마리 그림을 보자)

 

옛날에는 왕이나 지도자가 극비의 문서를 다른 사람에게 보낼 때는 그 문서를 둘둘 말아서 겉에다가 빨간 딱지 같은 인을 치고 그 위에 도장을 찍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누구도 중간에 전달되는 과정에 그 극비 문서를 볼 수 없습니다. 뜯어보면 사형이지요? 그런데 오늘 1절에서는 일곱 인으로 봉해 놓았습니다. 절대 아무나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요한계시록에 대한 영화를 본 일이 있는데, 이 일곱 인으로 봉인이 된 책의 인이 하나하나 떨어질 때마다 엄청난 대 재앙이 땅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그런 영화입니다. 그 책에 인이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그 책이 마술에 걸린 것처럼 재앙이 하나씩 삐져나와서 지상으로 떨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선입견을 가지고 요한계시록을 보면 안됩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은 전부 저주의 책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재앙만 내리고, 저주를 주는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축복의 책입니다. 천상의 교회,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는 소망의 책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책이 열리고 그 안의 재앙이 지상으로 쏟아져 내리기 위해서는 일곱 인이 다 떨어져야 책이 비로소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그 당시의 극비 문서의 두루마리들은 중간에 인을 하나만 칩니다. 그런데 본문의 두루마리는 일곱 인을 쳤습니다) 그리고 글이 안팎으로 썼기 때문에 두루마리가 다 펼쳐져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그 당시에 두루마리는 글을 안에만 썼습니다. 그리고는 안으로 둘둘 말아서 겉에다가 인을 쳤습니다). 일곱 인이 다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그 책 안에 들어 있는 재앙들이 막 밖으로 뛰쳐나오겠습니까?

 

6장에 들어가서 더 상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만, 일곱 째 인이 다 떨어져서 말려 있던 두루마리가 조금씩 조금씩 펼쳐지는 과정에서 812절의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까지는 재앙이라기 보다, 징조에 가깝습니다.

실재적으로 요한계시록에서 재앙 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곳은 918절부터 나옵니다. 그 전에는 진노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6장부터는 징조가 점점 커집니다. 강도가 세어집니다. 그러다가 본격적인 재앙이 내리는 때가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 ” ‘ 세 개가 임하는 때부터입니다. 그래서 본격적인 (재앙)91절의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부터 입니다.

 

(8:13) “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사는 자들에게 , , 가 있으리니 이는 세 천사들이 불어야 할 나팔 소리가 남아 있음이로다 하더라

이 때부터 본격적인 재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7년 대 환란의 시작이 어디서부터인지에 대해서 말할 때 함께 묶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 2절을 읽으십시다.

(2)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사도 요한이 보좌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의 오른손에 두루마리를 보고 있는 데, 힘 있는 천사가 우렁찬 소리로 외칩니다. “여기 누구 중에 저 두루마리의 인을 떼고 펼 분이 있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없는 것입니다.

 

3절을 읽으십시다.

(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목소리가 우렁차고, 힘이 있는 천사가 아무리 목이 터져 라고 외쳐도 하늘 위에, 땅 위에, 땅 아래, 그 어디에도 그 두루마리를 인을 떼고 펼 자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크게 울었다고 했습니다.

 

4절을 읽으십시다.

(4)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이 말씀을 종합해서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예를 들어,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날아가고 있습니다. 태평양 상공을 날아가고 있는데, 어떤 부인이 갑자기 애기를 낳으려고 합니다. 갑자기 진통이 시작되고, 주위 사람들은 웅성웅성 거리면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이 때 힘이 있어 보이는 덩치가 큰 승무원이 오더니 우렁찬 큰 소리로, “승객 여러분, 지금 승객 한 분이 애기를 낳으려고 합니다. 혹시 승객 중에 이 분을 도와 줄 수 있는 산부인과 의사가 안 계십니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비행기 안에 탑승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만큼 큰 소리로 외칩니다. 그런데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옆에는 한 남자가 어쩔줄 모르면서 안타까워서 막 울고 있습니다. 남편입니다. 이 남자가 왜 웁니까? 남편이거든요. 이 산모와 깊은 관계가 있거든요.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요한이 크게 웁니다. 왜 웁니까? 자기와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루마리는 열려야 합니다. 안 열리면 안되는 겁니다.

우리는 이 두루마리가 펼쳐져야 한다는 것에 중요성을 두지 않기 때문에 그 슬픔을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슬픔을 느낄 수 없는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그렇게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압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우리 구원 받을 성도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너무나 혹독한 시련과 환난을 당하면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길 갈망했습니다. 메시야의 왕국 건설을 위해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그 사모하는 왕국 건설이 이 두루마리가 열리지 않으면 좌절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눈물에서 우리는 그 펼쳐져야 할 그 두루마리의 내용이 얼마나 중요한 내용임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그 슬픔이 너무 커서 크게 울었다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두루마리가 다니엘에게 다니엘 12장에서 인봉하고 잘 간수하라고 했던 그 두루마리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 두루마리는 마지막 때까지 인봉하여 간수했다가 때가 되어 열려 져야 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12:1-10)

(12:1)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12:2)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12: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12:5) 나 다니엘이 본즉 다른 두 사람이 있어 하나는 강 이쪽 언덕에 섰고 하나는 강 저쪽 언덕에 섰더니

(12:6) 그 중에 하나가 세마포 옷을 입은 자 곧 강물 위쪽에 있는 자에게 이르되 이 놀라운 일의 끝이 어느 때까지냐 하더라

(12:7)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쪽에 있는 자가 자기의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원히 살아 계시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지기까지이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

(12:8)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가 이르되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나이까 하니

(12:9) 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12:10)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마지막 때에 관한 예언을 하시고, 그 말을 간수하고 마지막 때까지 봉함하라고 하십니다. 마지막 때가 되어야 그 책의 내용이 밝혀질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다니엘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봉인된 책의 내용은 메시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심판과 구원의 내용입니다. 이 두루마리가 열려야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사탄은 멸망하고, 만유를 회복하여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두루마리가 열리지 않은 상태로 계속 있으면, 이 세상은 사탄의 지배를 받고, 이 땅의 교회는 계속 고난을 겪고, 핍박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메시아의 왕국이 만들어지지를 못하고, 성도들은 메시아의 왕국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반드시 열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루마리가 열려져야 하는데, 하늘에나 땅에나 땅 아래나 이 두루마리를 펼쳐 볼 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 우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말세를 사는 우리 성도에게는 이런 심령,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빨리 주님의 나라가 오고, 사탄의 권세가 다 소멸하는 날이 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루마리가 열리고, 주님이 오셔야 되는 것입니다.

 

5절을 읽으십시다.

(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그 때 24장로 중에 한 사람이 비로소 울고 있는 사도 요한에게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했습니다.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는 예수님의 애칭입니다. 예수님의 별명입니다. 어린양 예수님이 그 두루마리의 일곱 인을 떼시고 펼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라는 말은 예수님이 이긴 자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고난 당하시고, 질고를 겪으신 분이신데, 어떻게 이긴 자입니까? 십자가를 통해, 부활을 통해 이기신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승리의 제1호입니다. 우리 성도의 대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속도로 개통식이나, 기념관을 개관할 때에 대표자가 테이프를 끊습니다. 국민을 대표해서 테이프를 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예수님, 십자가로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이 우리 성도의 대표가 되어서 그 두루마리의 일곱 인을 떼시는 것입니다.

 

6절을 읽겠습니다.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그 때 사도 요한의 눈길이 보좌와 네 생물과 24장로들 사이에 서 있는 한 어린 양에게로 눈길이 갑니다. 거기에는 일찍 죽임당한 어린양이 서 있습니다. 일찍이 죽었던 어린 양입니다. 제물이 되어서 제사 지내버린 어린 양, 제물이 되어 버렸던 어린 양입니다.

 

보통 일반적으로는 신약 전체에서 어린 양을 의미 할 때는 ‘ὁ ἀμνς, 호 암노스 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요한복음 129절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할 때 암노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전체에 걸쳐 사도 요한이 사용하는 어린 양이라는 단어는 아르니온, ἀρνον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때 아르니온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고난, 죽음, 고통, 번민, 비하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어린 양은 지금도 살아 계시다, 그러나 희생의 자국을 가지고 계신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일곱 뿔을 가지고 계십니다.

뿔은 권세, 능력, 권력을 말합니다. 일곱은 완전수를 말하니까, 완전한 권력, 권세입니다. 이 땅에서는 완전한 권세, 완전한 권력이 없잖습니까? 이 땅에는 완전한 권력이 없습니다. 때가 되면 다 없어지고, 바뀝니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했잖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권력은 영원합니다. 영원한 권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일곱 뿔은 변할 수도 없고, 바뀔 수도 없고, 빼앗길 수도 없고, 영원한 왕이요, 영원한 권세자 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12, 13장에 가보면, 붉은 용, 사탄이 열 뿔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도 열 뿔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흉내를 내면서, 예수님보다 자기가 권세가 더 세다고 강조하면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속아서 다 따라가는 것입니다. 일곱 뿔 가지신 예수의 권세가 진짜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일곱 눈이 있습니다. 일곱 눈은 하나님의 일곱 영입니다.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도 일곱 눈이 있고, 주위에 있는 네 생물의 앞뒤, 네 생물의 날개에도 눈들이 가득합니다. 이것은 전부다 하나님의 신경망과 같은 겁니다. 이 눈들로 하나님은 온 세계를 봅니다. 하나님의 성령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은 성령을 공유하시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나라는 말입니다.

 

7절을 읽으십시다.

(7)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앞으로 예수님이 두루마리의 일곱 인을 떼실 때마다, 두루마리를 펼치실 때마다, 요한계시록에 있는 모든 일들이 하나씩 일어나는 것입니다. 종말의 모든 사건과 역사는 예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니엘서 12장을 다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이 두루마리를 인봉하고 잘 간수하라고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때가 되어 예수님이 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펼치셔야 하기 때문에, 어린 양 예수님이 하셔야 하기 때문에, 그 때까지 두루마리를 인봉하고 잘 간수하라고 했는 것입니다.

 

정리를 해 드리면, 일곱 인으로 인봉 된 이 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저주와 심판의 내용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부터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을 구속을 거쳐 마지막 완성의 이야기, 즉 복음이 기록되어 있는 책인 것입니다. 어떠한 것으로도 실패되지 않고 좌절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 질 하나님의 창조 목적, 구속의 완성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는 책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책의 인봉을 떼실 분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속의 완성,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책의 인봉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떼어진다.’라고 표현 된 것입니다.

 

종말도 어린 양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종말에 예수님에 의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일곱 인으로 봉인 된 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책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책의 인이 떼어질 때마다 저주와 심판의 사건들이 기록이 되고 있는가?

 

여러분, 복음은 단순히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항상 심판과 함께 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다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지만,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죄에 대한 심판을 동시에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복음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저주의 심판인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이 실패하고 상실해 버린 것들에 대한 형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곱 인이 떼어질 때마다 전쟁과 기근과 역병, 그리고 자연의 법칙, 우주의 파괴 등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번개와 뇌성과 음성으로 그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이루고 계신데, 그것이 악한 세상에는 심판이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외침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참 살기 좋은데, 뭐가 심판이고 뭐가 재앙이란 말입니까?’ 혹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인간들은 지금 열심히 과학문명과 교육과 종교 등을 동원해서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며, 또 그렇게 되어간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지만 세상은 지금 점점 파괴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그 타락한 욕심에 내어버려 두셔서 인간들은 점점 파멸의 끝으로 내 달리고 있습니다. 흉포화 되어 가는 범죄, 가공할 무기로 자행되는 전쟁, 자기 배만 불리려는 욕심과 나누지 못함에서 오는 기아, 산업의 발달로 인한 자연의 파괴, 그로 인한 생태계의 혼란, 이 우주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불구덩이 같은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도 실패 없이 모두 건져질 것이라는 것이 바로 일곱 인으로 봉인 된 책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한 복음의 이중적인 면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 속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남과 다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그 복음이 실제로 가시화 되어 이루어져 가는 삶이니까요.

예를 들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똑같은 재앙이 닥쳤을 때 둘의 반응이 완전히 반대로 나타납니다. 쌍둥이 빌딩이 폭파되었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회개를 하고 교회로 돌아 왔습니다만 세상은 두려워하고 분개하고 복수하기에 바빴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일곱 인 하나하나가 떼어질 때마다. 무서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일곱 나팔도 마찬가지입니다. 나팔을 하나씩 불때마다 무서운 사건이 하나씩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중간 중간에 천상의 모습을 보여 주면서 찬송이 울려 퍼집니다. 왜 천상의 모습을 보여 줍니까? 성도들이 이 땅만 보고 살고, 현실만 보면 낙심이 되니까, 천상의 교회, 보좌가 있는 곳을 보고 낙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상의 교회를 사모하고 주를 섬기고, 주님을 따라 살기를 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