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2017/8/27)-요한계시록(32)
일곱째 인을 떼실 때
계8:1-6
============================================================================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요한계시록 1장부터 설교를 들으셨는데, 지금까지 공부한 요한 계시록의 간략한 구조를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8장부터 나오는 나팔 재앙의 대해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기억을 잘 더듬어 보세요. 요한 계시록 1장은 서론입니다. 계시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요한이 계시를 받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진짜 모습을 보여 주시고, 교회가 무엇인지, 예수님이 교회 속에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2장,3장에서는 이 땅의 교회들을 일곱교회라는 모습으로 보여주시고, 교회의 여러 가지 모습, 교회가 받아야할 고난과 핍박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이것은 교회가 들림 받아 올라가기 전까지 교회의 여러 가지 모습, 신앙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신앙상태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4장과 5장에서는 이미 천상의 완성된 교회를 한번 보여 줍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가 앞으로 가야할 곳이 ‘바로 저기다’ 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이 우주의 주인공은 어린양 예수님이다. 어린양 예수님을 끝까지 따른 자들은 모두 그곳에 함께 있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을 미리 당겨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6장에서는 드디어 첫 번째 인에서 여섯 번째 인을 떼면서 지금까지 있어왔던 연장선상에서 일어날 재앙에 가까운 징조들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두루마리 책을 예수님이 받아서 일곱 인으로 봉해 놓은 것을 떼시는데, 일곱 개 인을 다 떼어야 그 안 에 들어 있는 재앙이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인에서 여섯 번째 인까지는 아직까지 재앙이 아니고, 징조라고 했습니다. 징조는 앞으로 되어 질 일을 보여주는 예고라고 했지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주일에 여섯 나팔에 대해서 배울 때 좀더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7장은 6장의 마지막 절에서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구약교회의 구원받은 144,000과 신약교회의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흰 옷 입은 큰 무리를 보여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 앞에 설 수 있는 자들이다 라고 했습니다.
구약적으로 표현하면 144,000,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흰 옷 입은 큰 무리”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 예수 앞에 설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순교자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성도들이 전부 환난을 겪고 순교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순교해야 휴거되는 것으로 보여줍니다. 이것은 순교적 삶을 살아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순교적 삶은 예수 믿는다고 목 베임 당하고, 칼에 죽고, 화형식 당하고, 감옥에 가두고 굶겨 죽이고, 이런 것만 순교가 아닙니다. 순교적 삶은 이 땅에 잘 먹고 잘 살고, 고난당하는 것을 피하고 평안하게 쾌락을 누리며 살고, 돈 많이 벌고 성공하고 많이 가지는 삶에 목적을 두고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이 우주가 재창조되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옛 성품도 죽이고, 옛 사람을 없애고 새 사람으로 바뀌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엡4:22-24)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게 순교자적인 삶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아를 죽이고, 자기 생각과 자기 뜻을 죽이고, 내 뜻을 하나님께 반납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말씀에 붙잡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순교자적인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7장까지 배운 내용입니다.
그리고 8장으로 넘어와서 마지막 일곱 번째 인이 떼어지고 나팔 재앙이 시작됩니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두루마리 책 속에 담겨져 있는 재앙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9장까지 무시무시한 여섯 나팔의 재앙이 나오고 그 마지막인 21절에 가서는 ‘이러한 무시무시한 재앙에도 인간들이 회개하지 않더라.’로 끝이 납니다. 그렇지만 10장에서 말씀을 받아 먹습니다. 10장에는 복음이 적힌 작은 책이 등장합니다. 그것을 요한이 받아먹습니다. 요한은 성도들의 대표입니다. 이 말씀은 뭐냐하면 모든 성도들은 순교자적인 삶을 살면서 말씀을 받아 먹고,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말씀을 받아 먹는 모습을 보면, 입에서는 달았으나 배에서는 쓰다고 합니다. 복음은 그것을 받아들인 자들에게는 꿀같이 달고 감사한 것이지만, 그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은 쓴맛을 느끼는 것처럼 힘들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받고 이해한 자들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게 되는가가 11장입니다. 11장에는 두 증인이 등장하지요? 그 두 증인은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이 두 증인은 전 세계에 퍼져 나간 둘씩 둘씩 짝을 지어 보냄을 받은 전도자들을 대표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들의 죽음에 환호를 하고 장사도 지내주지 않습니다. 당시 고대 시대에는 죽은 사람의 장사를 지내주지 않는 것은 최대의 모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우리 성도는 이 세상에서 이러한 모욕과 대우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같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너만 잘났냐?’‘꼭 그렇게 믿어야 하나?’ ‘별스럽게 믿네!’ ‘왜 그렇게 배타적이야?’ 하면서 핍박합니다. 이런 대우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10장과 11장을 지나 11장 마지막에 가면 일곱 번째 나팔이 울려 퍼집니다. 그리고는 또 천상의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모습과 승리한 성도들의 모습을 살짝 보여 줍니다.
그리고는 12장부터 들어가면 13장까지에서 사탄이 거짓선지자와 함께 이 땅을 후3년 반 동안 통치하는 모습입니다. 14장은 그런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과 그리고 악의 세력을 섬멸시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를 완벽하게 요약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세 장이 사실 요한 계시록의 핵심 장이요, 크라이막스입니다. 이 부분들은 그 때 가서 다시 상세하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러한 구조를 머릿속에 잘 넣어두시고 오늘의 본문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1절과 2절을 연이어 읽어보겠습니다.
(계8:1-2) “(1)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하더니, (2)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2절 앞부분을 헬라어 원어 성경으로 보면, '카이 에이돈’ 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내가 보매’라고 번역이 되어 있어서 두리 뭉실하게 되어 있는데, 원래 제대로 번역을 하면 ‘또 내가 보매’입니다. 계시록에 여러 번 등장하는 단어들입니다. 이 ‘또 내가 보매’라는 구절은 요한이 다른 환상을 이야기하기 시작할 때 항상 쓰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2절부터 6절까지는 “반 시간 동안 고요한 그 시간”에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일곱째 인을 떼니까 하늘이 반 시간 동안 고요했습니다. 겉으로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조용하고 평온했습니다. 그런데 내면에서는 2절에서 6절의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반 시간”은 짧은 시간을 말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인간의 시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반 시간은 헬라어로 (헤미오리온)인데, 이 말은 반을 의미하는 (헤미)와 시간을 의미하는 (호라) 라는 단어가 합쳐진 것입니다. 헬라어에서 '호라’ 라는 시간은 하나님의 시간을 말할 때, ‘호라’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이 환상 가운데서 본 시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용하는 현실의 시간이 아닌 겁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반 시간은 30분을 말하지만, 30분 동안만 고요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에게는 긴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신학자들 중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30년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전3년 반이라는 사람도 있고, 구약의 예루살렘성전에서 오전에 향을 피우는 시간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고요한 ‘반 시간 시대’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시간인 30분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으로 볼 때, 하나님에게 있어서 시간 개념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벧후3:8) 개념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느 정도 긴 시간인 것만은 틀림 없습니다.
이 시간 만큼만은 고요합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시간에는 내적으로 영의 세계에서는 일곱 나팔을 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는 7년대환난으로 들어가는 시기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마음이 아프셔서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폭풍전야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나 고요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평안한 태평세월이니까, 살기 좋은 시대인 줄로만 알고, 세상에 푹 빠져 향락을 즐기며 사는 겁니다.
우리가 구약성경 열왕기하에 보면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하기까지 너무나 태평스럽고, 살기가 너무 좋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앗수르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점령하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남왕국 유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이 유다 땅으로 쳐들어 오기 전 9년 동안은 전쟁도 없고, 태평세월이었습니다. 온 나라는 고요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유다왕국을 점령하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나라에서는 아무도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 한 사람이 있었지요? 그게 누구입니까? 예레미야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외쳤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왜요? 너무나 살기 좋고, 고요하고, 태평세월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이렇게 이해하시면 쉬울 겁니다. 고요함 속에서 준비하는 모습이 꼭 오케스트라의 연주회에 가면 처음에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튜닝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트럼펫, 트럼본, 팀파니 온갖 악기가 튜닝을 하는 소리는 그야말로 소음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본 연주가 시작되기 전에 그 모든 튜닝은 다 끝나야 합니다. 잠시 정적이 흐릅니다. 그리고 지휘자의 신호로 마침내 아름다운 연주곡이 흘러나옵니다. 이 고요함, 이 잠잠함은 어떤 아름답고 위대한 연주곡의 시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진행되는 순서를 자세히 보십시오.
1)예수님이 일곱째 인을 떼십니다. 그러니까 하늘이 반 시간 동안 조용합니다. 겉으로는 고요한 시간이지만, 영적으로는 차근차근 일곱나팔을 불 준비를 합니다.
2)하나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고, 일곱 나팔을 받습니다.
3)또 다른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습니다. 많은 향과 모든 성도들의 기도를 합쳐서 보좌 앞에 금 제단에 드립니다.
4)천사가 향로에다가 제단의 불을 담아 땅에 던집니다. 그러니까 우레, 음성, 번개, 지진이 납니다.
5)큰 우렛소리, 큰 음성, 번개, 지진을 신호로 일곱 천사가 나팔을 불려고 준비합니다. 여기서 “준비하다”라는 헬라어 (헤토이마조) 는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는 7절부터 일곱 나팔 재앙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7년대환난이 시작이 된다고 보면 맞습니다. 이 일곱 나팔 재앙도 앞에 나오는 일곱인의 징조와 연장선상에서 나타나는 겁니다. 이 일곱 나팔재앙도 일곱인의 징조와 비슷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일곱 인의 징조보다 일곱 나팔재앙이 강도가 훨씬 강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 주일에 좀더 상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천사가 등장하고, 그리고 또 다른 천사가 나타나는데, 그 천사는 금향로를 들고 제단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천사는 성도들의 기도에 향을 합해서 그 기도와 향을 함께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여기서 이 다른 천사가 중보의 역할을 하지요? 천사는 성도들을 위해서 심부름하는 자들이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많이 하는 심부름이 성도들의 기도를 하나님 보좌 앞으로 올리는 일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천사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보좌하고, 성도들을 위해서 심부름하는 자들입니다.
구약의 대 제사장은 향로를 가지고 하나님의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이렇게 대 제사장이 향로에다가 향을 가득 담아서 지성소에 들어가서 법궤 앞에서 향연을 피웁니다. 온 지성소가 향연으로 가득찹니다. 이 때 밖에서는 사람들이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금 계시록 8장에서 그대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다른 천사는 지금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가진 향로에는 성도들의 기도가 들어 있습니다. 그냥 기도가 아니라 “모든 성도들의 기도”(3절)입니다.
그 성도들의 모든 기도가 하나님께 올려 집니다. 하나도 땅에 떨어 짐 없이 성도들의 모든 기도가 하나님께 올려집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드리는 그런 엉터리 기도들도 모두 하나님께 올라간다는 말인가? 네, 맞습니다. 모두 올라갑니다. 그런데 거기에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향을 덮어서 올려 보내십니다. 우리의 이 더러운 욕심과 탐욕과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온 악취가 나는 기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와 합쳐져서 향기가 나는 기도로 변하여 하나님께 올려지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입니다. 6장 10절에 “하나님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 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이 기도가 뭐라고 했지요?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열망이라고 했지요? 우리 성도들의 모든 기도는 바로 이 기도가 되어서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기도 응답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한 것이 되어서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병을 낫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을 때 그 병이 나음으로 해서 그의 거룩에 도움이 되고 그가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게 된다면 그의 병이 낫는 것으로 응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다시 건강이 돌아왔을 때 그가 전처럼 다시 하나님을 멀리하고 세상 것을 탐닉하는 자로 돌아갈 것이라면 그의 병이 점점 위중해 져 가는 것으로 응답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모든 기도는 하나님께 올라갑니다. 그리고 최고의 선으로 우리에게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온갖 핍박을 받던 성자들은 ‘하나님이 정말 자신들이 드리는 기도를 들으시긴 들으시는 것인가’하는 불안함과 초조함과 두려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성도들의 모든 기도는 하나님께 다 올라간다는 것을 모든 교회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응답은 가장 최선의 것으로 우리에게 내려온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 성도들에게 커다란 위로와 확신이 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본격적인 일곱 나팔 재앙에 들어가기 전에 성도들의 기도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는 복을 달라는 기도와는 전혀 다른 기도입니다. 이기적인 기도, 하나님을 졸라서 뭔가를 달라는 기도와는 다릅니다.
“하나님, 하나님 나라를 빨리 완성해 주세요. 저의 이 더러운 욕망과 지저분한 죄 속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고 싶습니다.”라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열망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뭐겠습니까? 앞으로 7년대환난이 오기 전에 우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우리의 삶에 내려오는 재앙들, 환난, 핍박, 곤고, 이 모든 것들을 다 이기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시점인지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7년대환난이 올 것이고, 전3년반 동안은 고난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기가 바로 기도해야 하는 시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예수님의 향연과 합쳐져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라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설교 원고 > 요한계시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7,9,10(일)[요한계시록34]처음 네 나팔 (0) | 2017.09.10 |
---|---|
2017,8,27(일)[요한계시록33]일곱 나팔 (0) | 2017.09.03 |
2019,8,20(일)[요한계시록31]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설 자들 (0) | 2017.08.20 |
2017,8,13(일)[요한계시록30]새 창조의 역사 (0) | 2017.08.13 |
2017,8,6(일)[요한계시록29]순교자의 삶 (0) | 2017.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