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2018/9/2)-요한계시록(73)
새 인간
계21:1-8 4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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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21장과 22장은 천국에 대해 분명하게 표현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 동안 4장에서부터 20장까지 보좌로부터 시작하여 보좌로 끝난 악의 심판은 완전히 종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축복된 삶에 관한 묘사뿐입니다.
본문 계시록 21장의 새 하늘과 새 땅은 사실 미래의 어느날 성도들에게 주어질 공간 적이며 장소 적인 곳입니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에게는 공간적이며 장소 적인 면 보다는 구원받은 성도의 상태에 더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1절에서 “처음 하늘과 처음 땅, 처음 바다는 다시 있지 않더라”고 하지요? 이것은 피조물의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나한테 끌어당겨 나에게 적용해 보십시오. 나 개인도 피조물인데, 축소해서 나한테 적용하면, 내가 처음 하늘과 처음 땅, 처음 바다인 것입니다. 이것이 없어지고 다시는 있지 않아야 됩니다.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됩니다(엡4:22).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려야 됩니다(골3:9).”
그러면 그 위에 새 예루살렘이 임재하여 내 속에 착상되어 붙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 품고,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성도인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여기 나타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 학자들 간에도, 이는 옛 것을 변화시킨 것인지, 아니면 옛것과 전혀 상관이 없이 새롭게 창조된 것인지 논란이 있습니다. 즉 ‘완전 소멸’이냐? ‘갱신‘이냐? 두 가지 이론을 내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새로운 세상이라는 점에서는 맞지만, 완전히 없애 버리고 새로 만든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변화로서의 하늘과 땅의 개념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구속의 원리와 같습니다. 우리 인격의 본체는 존속하면서도 본질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하늘과 처음 땅, 처음 바다”는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뀌는 역사를 바라보면서, 그 위에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 와서 한 덩어리가 되어 버리는 것을 보면, 오늘 우리의 인격, 우리의 본성, 우리의 인간성이 옛 것이 없어지고, 새 것으로 바뀌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도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피조물의 구속을 말씀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구속을 설명합니다. 피조물의 구속과 인간의 구속은 동일한 것입니다.
롬8:21-23에서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이 “새 하늘과 새 땅”이 장차 역사 속에 나타날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신령한 측면에서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이미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주 변혁과 인격 변화는 같은 구속원리에서 다루어집니다. 이처럼 성도는 예수 안에서 옛 것은 사라지고 새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마음의 보좌에 모시고 강력한 주권을 행사하실 수 있도록 더욱 겸손과 경외함으로 살아야 하고, 거룩의 영, 성결의 영이 위로부터 입혀져서 신부 단장이 일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을 사는 동안에 늘 하나님의 임재의식이 일어나야 되고,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 죄악된 것들,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지게 하는 것, 즉 옛 창조의 모든 것을 벗어 버리고, 생명수가 넘치며 하나님과의 친밀, 천국의 축복이 경험되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축복의 누림, 하나님과의 친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기도와 말씀, 예배, 하나님의 임재의식을 방해하는 불신앙적인 속성, 세상적인 속성, 세상으로 떠내려가는 삶을 경계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새롭게 되는 새 사람, 새 인격, 새 성품, 새 마음, 새 인생, 새 삶, 영적인 부분에서 새 인간론적인 부분에 대해 다루어 보겠습니다. 할렐루야!
먼저, 예수님 안에서 옛 것은 다 지나갔습니다.
1절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했습니다.
이 본문을 해석할 중요한 키는 고후 5장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했습니다. 또 한 구절을 더 찾아 본다면, 엡4:22-24의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런데 본문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옛 하늘과 옛 땅과 바다까지도 볼 수 없이 사라지고 없다 했습니다. 언제 사라졌습니까? 20장의 백보좌 심판 때입니다. 20장11절에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했습니다. 이미 13장에서 바다는 괴물이 출현한 곳이었고, 20장에서는 죽은 자들을 품고 있었던 처소로 묘사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바다는 세상이나 악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좌정하심으로 나 자신이 아담 안에서 입었던 옛 창조는 사라짐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게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경험입니다. 즉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이 아름다움은 경험, 이 아름답고 놀라운 체험은 위로부터 입혀지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내려와 내 심령 속에 착상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했습니다.
그러니까 새 예루살렘 성은 사람들이 만든 건축물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새로운 땅 위에 완성된 새 성이 위로부터 내려와 안착하는 것입니다. 한 덩어리가 되어 붙어 버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전 것은 지나가고 보라 새 것이 되었을 때”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을 때” 위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새 예루살렘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성도, 즉 신부된 성도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인 아름다움이란 하늘 위, 즉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임을 발견합니다. 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아름다움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최고의 걸 작품입니다. 이처럼 영적 아름다움은 스스로 만들어지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입혀집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부분을 “옷 입고...” 라는 말로 많이 표현했습니다. 롬13:14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했고, 골3:12에도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했고, 또 엡4:24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했습니다.
이 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신부인데, 이 신부를 누가 이토록 아름답게 하셨나요? 신랑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엡5:26-27에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죽으심과 부활의 공로에 근거한 성령의 은혜가 위로부터 입혀지기 원해야 합니다.
주님이 예비하신 예복을 입지 않으면 쫓겨납니다. 우리는 새 예루살렘의 모습에서 진정한 영성이란 옛 창조에 속한 것은 사라지고 새 창조를 덧입는 것이요, 개체가 아니라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부름 받은 한 몸으로서의 교회라는 공동체적인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 아름답게 신부 단장이 된 즉 옛 창조에 속한 것이 제거되고 새 창조로 입혀질 때 어떤 복이 주어질까요?
1.하나님께서 함께 사심을 경험합니다.
3절에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동거동락 함을 미래만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현실에서도 누릴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준비만 하십시오. 영적으로 성숙하면 그 분의 임재를 실재로 풍성히 경험하면서 삽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내주내재라고 하는데 정확한 표현은 ‘내주내재를 경험한다’ 라고 함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내주내재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험하는 것은 다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도 고센의 풍요로움을 경험했습니다. 광야에서도 엘림의 축복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오래 머물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미숙한 믿음의 상태에서도 필요에 따라 놀라운 임재를 경험케 하십니다. 이 경험이 때로는 비교적 장기적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늘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장성하지 않은 심령의 지나친 만족은 자만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 신부의 수준에 이르게 되면 새 예루살렘과 잇대어 있는 연결된 경험이 되고, 영원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이 땅에서 영원한 것을 신앙 안에서 미리 맛보는 것 뿐이지, 완성이나 전부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만하게 된다면 그 풍성한 임재의 경험을 상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임재의 경험은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어야 합니다.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신분의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엡4:13).
2. 다시 옛 창조의 슬픔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4절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했습니다.
이처럼 은혜 안에서 살면 진정한 행복과 만족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 풍요로움을 누리면서도 행복을 모릅니다. 그것은 아직도 옛 창조에 붙잡혀 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바벨론에서 3차에 걸쳐서 귀환했습니다. 1차에서는 겨우 5만 명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지만 아직도 세상에 마음 두고 살아갑니다. 그 결과는 불행입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이제는 옛 창조의 슬픔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직 영적으로 덜 됐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모든 것이 새롭게 인식되어 복이 되어 다가옵니다.
5절에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했습니다.
여기 만물을 새롭게 하심은 장차 피조물이 새롭게 변화되고 회복될 것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은혜 생활을 하면 현재의 환경은 변한 것이 없지만 만물이 새롭게 보이고 만사가 은혜와 축복이 되어 내게 다가옴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롬8:28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했습니다.
이러한 은혜는 전에도 주어졌지만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만사에 대한 시각이 바뀌어 좋은 것도 은혜요 나쁜 것도 은혜로 다가옴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인식의 변화입니다.
4. 생명수가 넘치게 하십니다.
5-6절에 “.....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하셨습니다.
요7:37-38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하신 것을 비로소 풍성히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들어가 안식을 얻고 복을 누리기까지 과정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이 과정을 잘 통과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속사는 이런 신령한 일의 예표입니다. 가령 출애굽이 택함 받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믿게 되는 중생을 향한 과정이라면, 광야는 말씀 붙들고 내가 온전히 죽어지고 참 신앙으로 생활화되는 성화의 과정입니다. 이 과정이 있을 때 비로소 믿음으로 가나안의 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축복을 말씀하시기 전에 왜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하셨을까요?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고 소개하십니다. 하나님은 시작한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이 생명수는 성경에 약속하신 것이요, 예수 안에서 이루신 것이며, 믿는 자에게 주셨고, 그리고 반드시 온전히 주어질 항구적인 축복입니다. 할렐루야!
5. 하나님의 친밀함과 그의 자녀로서 상속을 받습니다.
7절에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했습니다.
이 “이기는 자”라는 용어는 계시록에서 여러 곳에 나타납니다. 특히 2장, 3장에서 일곱 교회를 향하여 반복해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여기서 “이기는 자”의 의미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 교회를 떠나지 않는 것, 세상과 악을 이기고 핍박과 고난을 이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온전히 서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로 설 때 하나님께서 경험케 하시는 은혜의 분량이 다릅니다.
먼저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주신다” 라고 하셨듯이 천국을 실재로 누리게 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친밀하심도 경험적으로 누리게 하십니다. 여기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하신 말씀은 이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가 그의 자녀가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자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요 그 동안도 모든 것이 아버지의 은혜요 사랑과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멀리 계시는 아버지처럼 느껴졌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듯 살았습니다. 그러나 변화된 후로는 비로소 아버지의 친밀하심을 경험하게 하신다는 표현입니다.
그렇지만 이 귀한 복을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는 자들”입니다. 이기는 자의 반대지요?
8절에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했습니다.
이 구절은 한 마디로 불신자에게 임하는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내신 이 큰 구원을 배척한 결과는 지옥 불에 던져짐입니다. 그러나 이 상황은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영적 생활의 경계사항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믿는다 하면서도 불신앙의 속성이 존재한다면 버리시기 바랍니다. 이 불신앙의 속성 때문에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이면서 불순종의 길을 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불신하거나 말씀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은혜를 잊어버리고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의 길을 가지 마십시오. 혹은 완악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화를 소멸하여 자기 심령을 죽이거나, 세속을 사랑하고 옛 생활을 추구하여 영적인 간음을 하거나, 곁길로 나가 인간의 생각과 이단과 악신을 따르거나, 혹은 예수의 복음을 알고도 감사와 찬양으로 시인하지 않는 거짓말하는 자가 되어서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 인간은 종말의 시대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침노하듯이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복된 은혜를 체험 하는 것에 방해되는 것이 있다면 과감히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적극적인 믿음으로 이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의 은혜의 풍성함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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