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2018/9/9)-요한계시록(74)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계21:9-27
23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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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마지막 청교도 설교자라고도 말하는 스펄젼 목사님 같은 분은 그 분의 최고의 전성기 때에 이렇게 일기를 썼어요.
‘하나님 혹시 나를 이렇게 설교자로 사용만 하시다가 지옥에 보내시는 건 아닙니까?’ 이런 일기를 썼어요. 왜냐하면 본인이 인도하는 집회에서 수백,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그런 기적을 매일 매일 보는데, 자기 속에서는 끊임없이 죄에 대한 욕구, 탐심, 이런 것들이 올라오는 거에요. 그 분이 무슨 대단한 죄를 지었겠습니까?
여러분. 그러나 말씀을 깊이 깨달아 가다보면, 그 말씀 앞에 내가 더욱 더 밝히 들어나게 되기 때문에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 ‘나는 이렇게 쓰임만 받다가 지옥에 가는 건 아닌가’ 이런 고민들을 하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죽기 3개월 전까지 그런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고민을 합니까? 저도 이런 고민을 하기도 합니다. ‘야! 목사가 이렇게 살아서 되겠냐?. 벌써 한 해가 몇 달 남지 않았네. 한 것 없이 세월만 흐르고 나이만 먹네!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뭐라고 말하지!’ 이런 고민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오래전에 불교계의 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성철 스님이 나중에 유언하고 간 것처럼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수많은 선남선녀를 속였기 때문에 내가 산채로 무한지옥에 떨어져 있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유언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자기가 살아생전에 한 말은 전부 거짓말이었다. 이렇게 유언을 하고 죽었습니다. 자기는 진리가 무언지 정확히 깨닫지 못하고 살고 이야기했는데 사람들이 저게 진리이겠거니 이렇게 믿어버렸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 분은 내가 거짓말을 했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괴로웠다고 했습니다.
저는 하루에 정말 몇 시간씩 성경만 봅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책만 봐요. 그러면서 자꾸 깨닫는 겁니다. ‘이렇게 믿어서는 안 되는데, 이렇게 믿다가 갑자기 주님이라도 오시기라도 한다면, 갑자가 내가 죽기라도 한다면, 정말 주님 앞에 설 수 있을까? 정말 천국 갈 수 있을까?’ ‘우리 성도들은 몇 명이나 천국 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성도들을 달달 볶아야 되는데’ 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21장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 대해서는 여러 사람들에 따라 주장이 엇갈립니다. ‘천년왕국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천년왕국이다. 천국이다.’ 이렇게 의견들이 다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새 예루살렘을 천국으로 봅니다. 그리고 8절에 나오는 “둘째 사망”은 지옥입니다. 21장에서는 한 마디로 천국에 못 들어가면 지옥에 간다는 말씀이 됩니다.
천국에 갔다 왔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천국은 확실히 있다” 라는 책을 쓴 ‘토마스 주남’ 여사가 쓴 책이나, ‘메어리 캐더린 백스터’ 가 쓴 “영적 세계의 비밀” 또는 “정말 천사는 있습니다”, “정말 지옥은 있습니다” 이런 책들을 보면 천국에 갔다 온 경험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약간 오해되어 있는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새 예루살렘인 천국은 장소적인 개념도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 표현하고 있는 부분은 장소적이고 공간적인 개념보다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모습은 바로 우리 성도들의 모습인거에요. 천국에서 찬란한 몸을 입고 그 영원한 곳에서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될 우리 성도들의 모습, 그것을 이렇게 보석으로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보석으로 표현해 놓은 부분이 더 많고요. 그리고 상징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크기를 보면 작고 제한적이요?
본문 16절, 17절을 보면 “(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17) 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은데 측량해 보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곽의 두께가 백사십사 규빗이라고 했습니다.
길이, 넓이, 높이가 ‘만 이천 스타디온’이라고, 일부러 스타디온을 썼단 말이에요. ‘만 이천 스타디온’ 이라고, 그리고 성곽의 두께는 규빗으로 표현하고 있지요? 의도적입니다. 일부러, 그리고 “천사의 측량” 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영적인 부분이 더 강하다는 겁니다.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같다라는 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정육면체란 뜻이죠? 정육면체하면 생각나는 게 또 있죠? 지성소! 지성소가 정육면체였잖아요? (열왕기상 6:19-20)
거기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지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곳이지요? 그리고 번제단도 네모 반듯하지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은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고, 완전한 곳이라는 의미이고 합니다. 보탤 것이 없다라는 의미에서 정육면체이기도 합니다.
새 예루살렘 성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만 이천 스타디온’, 그러니까 2,400km 정도 됩니다.
그런데 그 새 예루살렘 성의 그 성곽을 척량했는데 144 규빗입니다. 144 규빗이면 65미터거든요. 높이가 2,400km의 높이 인데, 성곽의 두께가 65미터면 어떻게 되는 거에요? 2,400km 높이의 성을 무슨 65m짜리 두께가 그 성을 보호합니까? 높이가 100m에 두께가 65m 같으면 튼튼하겠지요? 옛날 고대사회의 성곽의 두께가 65m 같으면, 마차가 두 대, 세 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었습니다. 바벨론이나 페르시아 같은 나라의 성곽은 마차가 두 대, 세 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높이가 2,400km에 두께가 65m이면 무너져 버립니다.
그러면서 길이, 너비, 높이를 ‘스타디온’으로 표현해 놓고 , 성곽의 두께를 규빗으로 표현해 놓은 것은 어마어마하게 크다라는 의미에 상징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은 영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 성도들에게 너희들의 마지막이 이렇게 아름답게 완성이 될 것임으로, 그 소망을 붙들고 오늘을 잘 이겨내라고 격려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커다란 장독에다가 물을 반쯤 채우고 거기다 생쥐를 넣습니다. 그리고 뚜껑을 닫아버리고 열지 않으면, 그리고 소리를 다 차단시켜 버리면, 생쥐가 정확히 3분 만에 죽습니다. 절망에 빠져서 그래요. 그런데 똑 같은 독에다가 생쥐를 넣고요. 가끔 뚜껑을 열어서 빛을 비춰 주면은, 이 생쥐가 희망이라는 것이 생겨서 36시간을 헤엄을 친대요. 그 안에서. 이렇게 희망이라는 것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아주 강력한 힘인 거에요.
하물며 희망도 아닌 소망을 갖고 있다라는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소망은 확인된 희망을 소망이라고 하는 거에요. 희망은 일어 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을 바라는 것이 희망이라고 하는데, 소망이라는 건 반드시 일어날 것을 바라는 것을 우리가 소망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소망을 갖고 있나요? 그게 믿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소망을 갖고 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사셔야 합니까? 당연히 여러분의 처지나 상황이나 현실을 이겨내야지요. 오늘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롬8:24-25) “(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그렇죠? 그래서 이렇게 요한계시록에 수많은 그 소망의 장면을 하나님이 그림으로 그려서 우리에게 부여주시는 거에요. 오늘 본문도 바로 그 소망의 장면을 하나님께서 그림으로 쫘악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C.S. Lewis는 ‘이 요한계시록 21장을 역사의 마지막 장이 아니라, 새 세상의 첫 장이다’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영문학자가 아주 멋있게 묘사를 했지요? ‘새 세상의 첫 장이다.’ 맞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장면대로 새 세상은 시작될 것이고,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그 영광스럽고 찬란한 세상이 영원히 시작될 것입니다. 그래서 새 세상의 첫 장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이 소망이 없으면 믿음도, 사랑도 우리들 속에서 발휘되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하늘에 쌓아둘 소망이 믿음과 사랑을 잉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그 하늘을 향한 소망을 굳건히 다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 소망을 다지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 진정한 사랑할 수도 없을 뿐더러 믿음을 발휘하는 삶을 살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매일 믿음 없는 삶을 살게 되고,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매일 실패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새 예루살렘에 대한 말씀은 한 절 한 절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대한 소망을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여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과 신앙생활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9절과 10절을 보시면요.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장소적이며 공간적인 하늘 나라를 의미합니다. 장소적이고, 공간적인 것을 말하지만, 무엇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느냐 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신부가 되어야 하고, 신부라면 신부 단장을 해야 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천국에 대해 오해하는 부분이 참 많습니다. 천국은 좋은 곳이고, 아름다운 곳이고, 우리는 다 거기에 들어간다 라고만 생각하지 정작 거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신앙생활 해야 되는지는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습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뭐냐? 어린 양의 신부인 교회라는 것입니다. 신부 단장하지 않으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9절, 10절을 보십시다.
“(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신부, 어린 양의 아내는 누구지요? 성도들, 교회, 하나님의 백성이지요.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신부를 보여줄게’ 그래 놓고, 무얼 보여 줍니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보여 주지요? 그러니깐 신부는 누구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그러니깐 우리 성도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되는 거예요.
문제는 우리가 신부단장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21장 2절을 보시면,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라고 했지요?
그리고는 오늘 본문 9절에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는 10절에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읽은 본문 전체는 신부가 신랑을 위해서 신부 단장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21장의 핵심되는 절은 2절과 9절입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어린양의 신부”라는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에 대해서 길게 설명하고 있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면, “어린 양의 신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신부가 되지 않으면 여기에 못 들어간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11절부터 보시면,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고 합니다. 그리고 12절부터는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고, 문에는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는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있고,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으로 되어 있는데,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하지요?
여기에 열두 문이 있는데, 열두 지파의 이름이 있다고 하지요? 또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구약교회와 신약교회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신구약 성도들의 신부 단장한 모습을 말합니다.
또 18절부터 보면,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고,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 둘째는 남보석, 셋째는 옥수, 넷째는 녹보석, 다섯째는 홍마노, 여섯째는 홍보석, 일곱째는 황옥, 여덟째는 녹옥, 아홉째는 담황옥, 열째는 비취옥, 열한째는 청옥,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나오는 각종 보석을 본 일이 있습니까? 만져는 봤습니다. 저도 본 일이 없습니다. 너무 너무 귀하고 희귀한 보석들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성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만큼 어린양의 아내, 즉 성도는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보석과 같습니다. 세상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귀한 보석입니다. 신부 단장한 어린양의 아내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21절에는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고 합니다.
진주, 맑은 유리, 정금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은 우리가 성도, 즉 어린양의 아내는 맑고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아내, 성도는 맑고 깨끗하고 티 없는 순결함을 말합니다.
그리고 15절부터 17절까지, 금 갈대 자로 성과 문들과 성곽을 측량합니다. 측량은 완성, 완전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측량은 완성되었을 때 측량하고, 또 완전히 부수어 버릴 때 측량하는 겁니다. 전혀 문제가 없고, 하자가 없는 완벽한 완성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천국인 새 예루살렘은 완전한 신부로, 신부 단장한 자들만 들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인 새 예루살렘은 장소적이고, 공간적인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동시에, 화려함, 온갖 보물로, 완벽한 완전성, 그리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름과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어린양의 신부가 되어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완변한 완전성으로 신부 단장한 자들만이 이 새 예루살렘에 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또 22절, 23절을 보시면, “(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이것은 새 예루살렘 안에 하나님이 와 계시고, 예수님이 와 계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성전이 되시고, 하나님과 예수님이 해가 되어 주시고 등불이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빛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인 내 속에 와 계시는 것입니다. 내 속에 와 계시면서 나를 거처 삼으시고, 내 속에 와 계시면서 내 속에서 빛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내가 완전한 성전이요, 내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요, 내 속에 오셔서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완전한 신부가 되고, 완벽한 신부 단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영적인 새 예루살렘이 되고, 내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원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엡2:22에서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회막, 성막)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라고 한 것입니다. 내가 바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바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보여 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 21장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구약부터 예언되어 있는 그 찬란한 땅에 반드시 들어가게 될 거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러분이 신부로서 이 땅에서 무얼하고 있어야 된다구요? 단장을 하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 단장을 하는데 신경을 쓰지 않고, 제 단장은 안하고 하나님한테 어떻게 땡깡을 부려갖고 그 분을 내 힘으로 사용해서 병이나 낫고, 부자나 되고, 내 소원을 성취할까? 여기에만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돈 없고, 가난해지고, 병들고,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신랑 버리고 도망가 버리잖아요. 돈만 바라고 시집 갔다가 돈 없으면 집 나가 버리는 신부들이 많습니다. 영적으로도 똑 같습니다. 가난해지고,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수님 버립니다. 이런 신부들이 많습니다.
이런 악한 성도들, 그런 신부들은 신부 단장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신부 단장 안하고, 준비 안하고 어디 신랑 앞에 갈 수 있나요? 결혼식 날 신랑이 신부를 딱 봤더니, 눈꼽이 이만한 게 달려있고, 이빨도 안 닦고, 입에서 냄새가 나고, 머리에 새 둥지가 이만한 게 달여 있어... 그럼 그걸 어떻게 해요? 신랑이 받아 주겠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그러고 있단 말이예요.
여러분, 우리는 거룩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한 신부로 사셔야 합니다. 신부 단장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온다는 것은, 바로 신부가 단장한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화려한 보석으로 신부 단장한 모습이 새 예루살렘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 자신의 신앙상태요, 우리 자신의 거룩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거룩을 준비하면서 어린 양의 신부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을 보면, 거기에 못 들어가는 사람들이 나오잖습니까? 보세요.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여기서 “속된 것”, “koino;n 코이논”은 우상숭배자들을 가리키는 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예수님 말고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사람들, 그게 “코이논”인 거에요.
그리고 “가증한 일”, “bdevlugma 브델뤼그마”란 뜻은 우상숭배자나 배교자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진리 이외의 것을 추구하고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거짓말 하는 자들”, “ yeu'do" 퓨스도스”은 거짓 선지자를 말합니다. 거짓을 진리라고 속여서 전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거짓 교리로 엉터리 기독교를 가르치는 자들, 다 어디있는 자들이에요? 예배당 안에 들어와 있는 자들입니다. 이게 예배당 안에 들어와서 신부 단장하지 않고, 그 신랑의 재산을 빼 먹을려고 하는 인간들, 그들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이게 우상 숭배자, “코이논”, 배교자, “브델뤼그마”, 거짓 말 하는 자들 “퓨스도스” 인 거에요.
기독교는 뭐에요? 단장하는 거에요. 신부로 단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부 단장 안하고 남편 앞에 섰다가 나중에 큰 낭패 당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생활은 신부 단장입니다. 거룩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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