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요한계시록

2018,9,16[요한계시록75]생명수의 강

☆ 주님의 머슴 2018. 9. 16. 15:19

주일설교(2018/9/16)-요한계시록(75)

생명수의 강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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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본문을 새 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1) 천사는 또, 수정과 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와서,

(2) 도시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를 흘렀습니다. 강 양쪽에는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 생명 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내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 쓰입니다.

(3) 다시 저주를 받을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그 도성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도성 안에 있고, 그의 종들이 그를 예배하며,

(4) 하나님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들의 이마에는 그의 이름이 적혀 있고,

(5)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주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추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릴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공간적이며 장소적인 것을 의미하지만,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거기에 들어가야 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어린양의 신부인 성도, 하나님의 백성, 즉 교회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장차 올 그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찬란하고 아름다운 보석처럼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될 것임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보석 같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면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고, 생명나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누구라고 했습니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성도가 바로 새 예루살렘입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이 바로 어린 양의 신부, 곧 남편을 위해 단장한 신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새 예루살렘에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생명나무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내가 새 예루살렘이고, 내가 어린양의 신부라면 내 속에 생명수 강이 흐르고, 내 속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묘사를 통해서 교회, 즉 하나님의 성도들의 생명은 바로 생명수의 강이다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생명의 근원은 따로 있다는 것이지요.

 

이 장면을 구약의 어디에선가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동산 중앙에서 강이 발원하여 동산을 적셨던 곳이 어디입니까? 에덴동산이지요?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2:10-14). 그리고 또 한군데 있습니다.

 

에스겔서 47장에 보시면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 온 새로운 성전에서 물이 흐르는 장면이 나오지요?

 

(47:1)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

 

그러니까 원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 회복된 에덴과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 온 새 성전이 성도 안에 구현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성도는 단순히 구원받은 한 개인일 뿐 아니라, 회복된 하나님 나라를 그 안에 품고 있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이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을 환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서에서는 생명수가 새로운 성전에서 흐릅니다. 오늘 본문1절에서는 그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흐르지요? 다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 본문에서 성전은 곧 누구라고 했습니까?

 

(21: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성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어린양입니다. 그러니까 에스겔서 471절이 오늘 본문과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내가 새 예루살렘이 되어 어린양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 내 속에 생명수강이 흐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우리가 계시록을 통해 배우신 것들을 잘 정리해 보십시다. 우리가 새롭게 창조된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충만하게 흘려 보내주시는 생명력은 생명수인 것입니다. 인간들이 타락함으로 원래 차단되었던 것을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부어주시는 생명력은 생명수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r'B;(바라크)’‘이라고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제 그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바라크’‘을 받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생명수의 강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성도들이 이미 이 땅에서 그 을 받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앞의 21장에서 배웠잖습니까? 새 예루살렘이 우리 성도들의 자신의 모습이라고, 새 예루살렘은 화려한 보석으로 꾸며져 있다고, 이 아름다운 이 보석으로 꾸며져 있는 내면의 모습이 성도들의 내면의 모습이라고,

 

그 안에 누구가 계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과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 안에는 해와 달의 비침이 필요 없고, 하나님의 영광이 비추고, 어린양 예수님이 빛이 되신다고 했습니다(21:22-23).

 

이 땅에 존재하는 우리 성도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안에 이미 영광의 빛을 비추시는 예수님이 계신다는 말은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 생명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4:10-15)에서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에서 예수님 자신이 이미 생명수라고 밝히고 있지 않습니까?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랬더니 그 여인이 그 샘물을 달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잘 보시면 세상 사람들이 요구하는 생명수와 예수님이 주시겠다고 하시는 생명수가 완전히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하는 샘물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달라고 하는 샘물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우물에서 나온 기적 같은 세상의 물이었습니다. 세상의 물,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이 꼭 이 사마리아 여인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예수 님 자신이 생명수라고 말씀하시는데, 오늘날 교회들은 그 예수님에게 자기 육신의 목을 축일 기적 같은 물만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시면 그 사마리아 여인이 주님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라고 하지요? 이렇게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서 엉뚱한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그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생명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이 여인이 기뻐 어쩔 줄 모르며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서 자기 목을 축이는데 없어서는 안 될 물동이를 버리고 마을로 달려갑니다. 이게 바로 생명수의 강이 그 속에 흐르는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 앞에서 세상의 물동이를 들고 이 물동이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기적 같은 물을 채워주세요라고 징징대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 세상의 힘인 물동이를 버리고 예수라는 그 참 생명수를 받아 세상에 소개하고 전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세상 것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고 사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생명으로 삼고 사는 자들을 성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영생(신적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요일5:11-13)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생명은 오직 예수 안에만 있습니다. 내 안에 예수가 계시면, 내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이 거하시는 새 예루살렘이라면, 내 안에 생명수가 흐릅니다. 생명나무에서 열두 가지 열매가 맺힙니다. 저주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와 예수님의 보좌가 내 안에 있습니다. 항상 주님의 얼굴 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내 이마에 새겨져 있습니다. 어둠이 없습니다. 항상 빛만 있습니다. 하나님이 빛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그 안에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는 성도들은 세상이 아닌 오직 예수에 목숨을 걸고 사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하면 달마다 열두 가지 실과를 맺으며 살 수 있는가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지, 그 예수를 이용해서 내 육신의 목을 축이려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21장과 22장은 사도요한이 세 번의 환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환상은 최후의 백보좌 심판이 있은 후 처음 하늘과 처음 땅, 처음 바다가 변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게 211절이지요. 두 번째 환상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한 그 위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것을 봅니다. 그게 2절부터 27절까지입니다. 그 새 예루살렘에는 각종 보석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세 번째 환상은 오늘 읽은 221-5절입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생명수강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그 생명나무에서 열두 가지의 열매가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는 만국을 치료하기 위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에덴에는 생명수 강이 동서남북으로 흘렀습니다. 동산중앙에는 생명나무가 있었습니다. 또 하나가 있었지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인간을 타락시켰고, 마귀의 종이 되게 했습니다. 선악을 아는 인간의 지식이 생명수 강이 흐르는 것을 멈추게 하고, 생명나무를 차단시킨 것입니다. 공급 받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계시록 22장에서는 이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는 없어져 버렸습니다. 생명수 강과 생명나무만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 내게 그대로 적용해 보십시오.

첫째는 내가 처음 하늘과 처음 땅, 처음 바다가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나에게 새 예루살렘이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신부 단장한 보석으로 꾸며져 있어야 합니다. 각종 희귀한 보석으로 단장한 새 예루살렘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내 속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수 강이 흘러야 합니다. 그래서 달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맺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악과는 없어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새 예루살렘인 천국은 장소적이고 공간적인 개념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 들어가려면 21장과 22장의 말씀처럼 우리 속에 적용되어져야 하고, 우리 삶에 재현되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하고, 각종 보석으로 단장한 것과 같은 신부단장이 되어야 하고, 내 속에 생명수 강이 흘러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첫째는 내 속에 생명수강이 흐르게 하라는 것입니다.(1)

7:37-38“(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내 속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명수 강이 흘러내려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동산의 4대강이 회복되어 흘러내려야 합니다.

 

둘째는 온전한 은혜를 가져야 합니다.(2)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고, 열두 가지 열매가 맺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잎사귀는 치료하기 위해 있다고 했습니다.

생명수가 성령이라면, 열두 가지 열매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5:22-23)

 

우리 속에 성령의 열매가 맺히면, 우리의 심령부터 육신까지 치료함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가 안수를 받지 않아도 우리 속에 성령과 말씀이 꽉 채워져 있고, 생명수 강이 흐르면, 심령과 육신의 질병들이 치료함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셋째는 저주가 없습니다(3).

저주는 죄와 마귀로부터 나옵니다. 죄가 없고, 마귀가 역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주가 없습니다. 저주로부터 해방되고,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기 전에는 예수님께서 채찍을 맞으사 우리가 나음을 얻고 나무에 달리심으로 저주를 담당하셨다는 말씀을 믿지만, 그 실재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 원인을 모르면 복음과 실재 사이에서 방황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성령으로 충만하면 우리 심령에서부터 치유가 임하고 저주가 사라짐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은혜 안에서 살면서 저주가 미치지 않을 뿐더러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넷째는 하나님께서 중심이 되십니다(3).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했습니다. 새 예루살렘의 중앙에는 아버지와 어린 양되신 예수님의 보좌가 위치해 있습니다. 마치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진중에 여호와의 성막이 위치함과도 같습니다. 이 위치가 상징하는 뜻과 아울러 성도들을 종이라고 호칭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새 예루살렘에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될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것이 현재의 우리의 삶과 연결된 삶입니다. 이것은 성령 충만하면 하나님 중심으로 살게 되어 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5절에 보면 세세토록 왕 노릇한다.” 라고 했지요? 그런데 3절에는 종으로 섬긴다라고 합니다. 206절에 있는 말씀대로 천년왕국에서도 왕 노릇은 하지만, 제사장적인 왕 노릇, 섬김의 왕 노릇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천년왕국에서처럼 새 예루살렘에서도 섬김의 왕 노릇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며 살게 됩니다(4).

4절에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그것은 죄인으로서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할 수 없어 죽기 때문이요(10:28), 또 이 더럽고 추한 자연인의 육체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체, 변화체, 새롭게 변화된 영광스러운 신령한 자로 바뀌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성도들의 이마에 예수 이름이 있습니다(4).

4절에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새 예루살렘은 이 땅에서의 삶과 연결된 삶이어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시록1317절에서 짐승의 표, 즉 짐승의 이름(666)을 오른손이나 이마에 받아야 매매를 할 수 있다고 했지요? 그래서 이 땅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짐승의 표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한다고 했습니다(20:4).

 

이 세상에 살 동안에 짐승을 따르는 자들은 짐승의 표, 즉 짐승의 이름을 이마에 받은 자들이지만, 어린양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느 표를 받느냐에 따라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가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21, 22장에 나타나는 어린양 신부들은 이 땅에서 살면서부터 오직 예수의 이름만을 받은 자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일곱째는 어둠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5).

5절에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했습니다.

 

여기 다시 밤이 없겠고에서 암시하는 대로 인간의 삶에 얼마나 밤이 많았습니까?(30:5) 그런데 내 속에 새 예루살렘이 이루어지고, 생명수 강이 흐르면, 성령 충만하면 어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에서 암시하는 대로 하나님 말고 얼마나 다른 빛을 추구했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누구의 위로 없이도 소망이 충만할 뿐 아니라 도리어 남에게 소망을 주기까지 이르렀습니다(고후1:6).

그리고 엡5:9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비취심으로 밝은 생활과 아울러 거룩한 삶이 이루어졌습니다.

 

21, 22장의 천국의 말씀에서 천국은 성경의 모든 진리를 함축해서 보여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천국을 설명하실 때, “천국은 마치 무엇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천국, 새 예루살렘의 여러 모습을 통해서 기독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천국을 사모해야 되지만, 우리 자신들이 새 예루살렘이라는 점을 우리 안에 늘 각인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예루살렘의 복, 생명수 강이 흐르는 복과 열두 가지 열매를 맺는 복을 누리는 은혜의 지복성이 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차 이러한 은혜로운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소망을 가지십시다. 뿐만 아니라 이 은혜가 지금도 성령 안에서 체험되어집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믿음의 길로 가야하고, 여러분의 심령에 성령의 생명수가 터지고 생명 나무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축복이 경험되고, 상한 심령이 치유되고 날마다 밝고 행복하게 사는 귀한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