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산상복음

35.[산상복음35]기독교인의 신앙행위 - ①구제

☆ 주님의 머슴 2021. 4. 9. 17:50

주일설교(2016/3/13) - 산상복음(35)

기독교인의 신앙행위 - 구제

마태복음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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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계속해서 산상복음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산상복음의 말씀을 전할 때,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전한 것이 아니라, 아주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순서 있게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5장에서 제일 먼저 팔복을 말씀합니다(5:1-12). 이것은 기독교인의 영적상태, 기독교인이 추구해야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팔복이 내것이 되면, 산상복음은 자연스럽게 내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 단락(5:13-16)은 기독교인이 실제적으로 세상에 나타내야 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해야 한다. 너희는 숨길 수 없다. 산위의 동네요, 등경 위의 등불이다. 그래서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십니다. 세 번째 단락(5:17-48) 부터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기독교인과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잘못 가르친 것과 대조하면서 율법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해석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6장부터는 새로운 단락으로 넘어 갑니다. 6장 전체는 우리 기독교인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 존전에 살며,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복종하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특히 6장에는 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거듭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인과 하나님의 관계는 친밀한 관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철저한 믿음의 관계요, 철저히 의지해야 하는 관계요, 의심이 조금도 없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6장은 두 가지 면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째 면(6:1-18)은 기독교인의 신앙행위, 즉 신앙생활의 모습, 예배, 기도, 금식, 헌금, 섬김, 봉사, 구제, 경건생활의 모든 부분을 포함해서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인가를 적극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전체를 다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당시에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세 가지를 샘플로 뽑아서 예를들어 제시하고 있습니다. 구제기도금식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신앙행위의 정신은 다 이렇게 되어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면(6:19-33)은 이 땅에서 일반적인 생활, 즉 세속적인 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이 이 땅에서 일반적인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들을 통해서 기독교인은 이 세상에 속해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고,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보이지 않는(不可視的)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요, 여행객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속물 인간이 아니며, 다른 사람들처럼 이 세상에만 속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살며, 기독교인은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인은 이 땅에 잠시 이기는 하지만, 발을 붙이고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여러 가지로 영향을 받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니, 기독교인이 대적의 표적이 되기도 합니다.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향하여 포악의 화살을 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로 영향을 받습니다. 염려와 근심이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기도 합니다. 가정과 양육해야 할 자녀 때문에 생활인으로서 세상 근심을 안고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신다고 합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오직 말씀 붙잡고 살자고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기독교인은 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관계를 먼저 생각하고 귀하게 여겨라고 하십니다.

 

오늘 읽은 61절은 2절부터 18절의 말씀에 대한 서론역할을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경건생활, 신앙생활을 말합니다. 본문에서는 이것을 구체적으로 구제, 기도, 금식 이라고 실례를 들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이외에도 많습니다. 예수 믿는 기독교인들의 삶 자체가 의의 생활이요, 경건생활이요, 신앙생활입니다. 이것을 축소하면 위의 이 세 가지 안에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구제는 사람들과 관계입니다. 섬김, 봉사, 낮아짐, 겸손 등, 인간관계가 여기에 포함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접촉하는 생활인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배, 기도, 헌금, 성경 읽기 등입니다. 금식은 육신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절제입니다. 인내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통털어서 의의 생활, 경건의 생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너 자신을 돌아보면서 이 것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첫째는, 의의 생활은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목적이 뭡니까? 사람에게 영광 받기 위해서입니다.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교회)과 거리(교회 밖에서)에서 나팔을 불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나팔을 붑니까? 사람들이 쳐다봐 주고, 알아주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지, 자기가 영광 받고, 자기에게 주목을 끌기 위해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든 교회 밖에서든, 자기가 영광 받기 위해, 자기의 영광 만들기 위해 몰입하면 결국 마지막에는 비참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세주로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지만, 사람들에게 영광 받기를 거절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떡을 먹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하실 때에도 조용히 무리를 떠나서 한 적한 곳으로 피신해 가셔서 기도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선한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10:17)” 하고 물었을 때, “너가 왜 나를 선하다 하느냐?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선생님이라는 말 조차도 듣기를 싫어했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가장 듣기가 싫고 거북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설교하러가든, 누구가 나를 소개할 때나, 또 여러분들이 나를 위해 기도하실 때에도, “하나님의 사자님, 사자 목사님이라고 부를 때나, “하나님의 종님으로 부를 때입니다. 목사를 예의를 갖추어 높여 주기 위해 그렇게 불러 줍니다만, 나는 하나님의 사자님도 아니고, 하나님의 종님도 아닙니다. 종이면 종이지, ‘종님은 또 뭡니까? 종 뒤에 자가 왜 붙습니까? ‘종 놈이면 또 몰라도, 종이 무슨 자가 붙습니다. 원래 할 것 같으면, 소개할 때에, ‘우리 영은교회 목사님이신 하나님의 종놈이렇게 원래 소개해야 맞는 거지요. 그저 저는 우리 교회 목사님, 영은교회 목사님이라고만 불러 주어도 감사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영광 받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것 조차도 거부했습니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5:41)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한다”(8:50)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조그마한 일을 하나 해 놓고도 자기의 영광을 다 받으려고 했습니다. 모든 영광을 끌어당겨 자기에게 집중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5:44). 자기 영광 만드는 사람, 자기에게 영광을 집중 시키려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12:43) 라고 말씀합니다.

 

두 번째는, 항상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 중에 양자택일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같은 말입니다. 구제는 왜 합니까? 우리가 교회(회당)에서나 밖(거리)에서 섬김과 봉사를 왜 합니까?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내가 좋은 일을 했는데, 누가 안 알아 주거나 칭찬을 안 해 주면, 하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는 겁니다. 그러면 하기 싫어지고, ‘언제까지 이것을 해야지하면서 지겨워지는 겁니다. 그러면 억지로 하게 되고, 억지로 하면, 심신이 피곤해지고, 내 마음에 상처가 자꾸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내 속에 개입해 들어오고, 내 신앙도 병들고, 시험에 빠집니다.

 

구제와 섬김, 봉사를 안 한다고 누구 말하는 사람도 없고, 안 한다고 욕하는 사람도 없고, 천국 못 가고 지옥 가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 내가 칭찬 받고 싶어서, 사람들에게 내 자신을 보여 주고 드러낼려고, 이 일을 시작했는데 아무도 안 알아주고, 칭찬도 안해 줍니다. 특히 목사님한테 잘 보이려고 했는데, 목사님도 칭찬도 안해 줍니다. 내 마음이 기쁘기는커녕 더 안 기쁘고, 더 무거운 짐이 됩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만 둘 수도 없고, 부담만 늘고, 마음에 상처만 더 옵니다. 처음부터 차라리 안했으면 나을 걸, 이제 와서 마음에 상처만 더 오고, 시험만 더 생깁니다.

 

원래 구제나 섬김, 이런 봉사는 처음에는 나팔을 계속 불면, 알아주고, 칭찬을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나팔을 불어도 마음들이 덤덤해져서 또 나팔을 부는구나 하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안 알아주는 겁니다. 그러나 칭찬에 메마른 사람들, 자기에게 사람들의 눈길을 맞추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계속 그렇게 해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계속 그 사람에게 고정되고 머물러 있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 나를 기쁘게 할 것인가를 택일해야 합니다. 나를 기쁘게 할 목적이면, 처음부터 안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의 관심은 차차로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이 땅에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뿐 아니라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신앙 뿐 아니라 무엇을 하든지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가 깨어지거나 잘못될 때인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처음 예수 믿을 때는 은혜가 넘치고, 기쁨이 있고, 하나님이 나만 사랑하는 것 같고, 신앙생활이 너무나 즐겁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언제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신앙이 식어져 버리고,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마음은 점점더 굳어집니다. 은혜의 샘이 흐르지 않습니다. 신앙생활도 재미가 없습니다. 그저 형식적인 신앙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따로 따로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으니, 생각으로는 믿는 것 같고,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으니 생각으로는 기도하는 것 같고, 생각으로는 교회에 와서 예배하는 것 같지만, 내 마음 속에 영혼은 하나님과 멀어져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늘 관계를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늘 주님을 의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존전에 있습니다.

 

네 번째는, 보상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상 받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 6장은 상 받는 말씀을 계속합니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하나님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1).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2,5,16절하).

오늘 주님은 우리는 하나님께 상 받는 자가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4) 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판하기를 상 받기 위해 섬기고, 상 받기 위해 예수 믿고, 축복을 받기 위해 의의 일을 하느냐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든 목적을 여기에 맞추면 안되지만, 성도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살면 하나님의 보상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오는 칭찬과 인간에게서 오는 위로와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과 영광과 보상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들에게 보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수많은 곳에서,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이 상을 위하여 달려 갔다고 합니다.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3:13-14). 바울도 주님이 주시는 을 바라보았습니다.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11:24-26). 모세도 주님이 주시는 을 사모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말씀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2) 했습니다. 예수님도 기쁨의 상을 위하여 모든 것을 견디고 참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모두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의 상을 생각했고, 상을 바라보고 살았는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더 나은 부활을 사모했습니다.

 

히브리서 116절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또 하나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우리가 훗날 하나님 나라에 갔을 때, 반드시 주님 앞에서 상급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적게 매 맞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많이 매 맞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공적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 공적이 금이나 은이나 보석인지, 나무나 풀이나 짚인지 드러날 것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고전3:12-14) 했습니다.

 

하나님께 상 받기를 바라는 신앙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욕구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아니하고,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려 하지 않고, 성결을 원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아래 있기를 원한다면, 그러한 보상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보상을 구하거나 보상을 받는다면, 하나님께로부터 보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미 상을 받았느니라.” 이 땅에서 사람에게 보상을 받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마태복음 25에서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우리를 감동을 일으키는 장면이 있습니다. 주님이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그들이 대답합니다. “우리가 어느 때에 이런 일을 했습니까? 우리는 이런 일을 했는지 우리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너희가 이런 일을 했느니라.”

 

좋은 일을 했는데, 섬기고 봉사의 일을 했는데, 나팔도 불지 않았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도 모르게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알지 못하지만, 나도 기억하지 않고 있었기에 잊어버렸습니다. 좋은 일 해 놓고,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다 잊어 버렸는데, 나만 기억하고 있으면 더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잊어버리니 섭섭하고,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 더 섭섭합니다.

 

우리는 눈을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존전에, 하나님 앞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먼저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