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2016/4/17) - 산상복음(37)
기독교인의 신앙행위 - ③금식
마태복음6:16-18
420장
=========================================================================
우리 기독교인의 생활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구제와 같은 방법으로 선을 행하는 삶입니다. 우리나라에도 기부문화가 많이 발달했습니다. ‘기아대책’이라든지, ‘유니세프’라든지,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월드비전, 한국 백혈병어린이재단 등 그 외에도 많습니다. 선교단체, 실로암안과병원의 개안수술 등, 많은 곳을 도울 수가 있습니다. 또는 자원 봉사 같은 것으로, 이런 선한 일을 많이 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과 우리의 친밀한 관계입니다. 곧 우리의 기도생활입니다. 기도생활 없이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만들어지지를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만들지만, 기도 없는 성경 묵상은 성경의 지식만 쌓을 수 있고, 신앙이 교만해 질 수 있고, 영성이 없는 이성적인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절제와 인내입니다. 이것을 훈련하는 것이 금식입니다. 이것을 인간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라고 봅니다.
오늘 본문은 금식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자신과의 관계와 자신에 대한 처리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레에 두 번씩”(눅18:12),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습니다. 세례요한과 그의 제자들도 정기적으로 자주 금식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산상복음에서 금식할 것을 기대하고 기독교인들에게 금식에 대해서, 그리고 금식하는 방법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금식을 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을 했습니다. 마가복음 9장 29절의 원문에서는 귀신들려 간질병에 시달리는 아들을 고쳐주시면서 제자들에게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공생애 3년 반 동안은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금식을 많이 했습니다. 오히려 핍박을 받고 교회가 위기가 올 때마다 금식을 더 많이 했습니다. 안디옥교회에서는 사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면서 얼마동안 금식하고 기도한 후에 그들을 파송했습니다.
그런데 3년 반 동안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랑 신부가 신혼 때처럼 3년 반 동안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이 때는 금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9장 14절 이하에 보면, 하루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 기독교인이 금식할 때를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땅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임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빼앗길 때는 금식해야 된다 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금식의 목적입니다. 왜 금식을 해야 하는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여기서 혼인 집 손님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 성도가 혼인 집 손님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은 혼인잔치와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신랑은 예수님입니다. 이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신랑을 빼앗길 때” 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승천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는 신앙의 위기가 오는 것을 말합니다. 환경이 바뀌어 예수 믿을 수 없는 처지가 될 때를 말합니다. 사탄에 의해서, 죄에 의해서, 예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신앙이 죽어가고, 신앙이 식어져 내리막길로 내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럴 때는 금식해야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금식은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들이 하니까 따라한다든가, ‘평생에 금식을 한 번은 해 봐야지, 한번도 금식도 안 해 보고 신앙생활 했다고 하면 신앙인으로서, 교회의 직분자로서 체면이 안서잖아!’ ‘나도 금식해 봤다’ 라는 것을 남기고 자랑하기 위해서, 이력을 남기기 위해서,, 이런 목적의 금식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금식은 어떤 특별한 이유나 처지를 맞아 기도나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내 신앙의 위기가 오거나 신앙의 침체가 올 때,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음식을 먹지 않고 온전히 기도의 생활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금식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성경에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금식을 자주 했습니다. 에스겔도 그랬고, 다니엘도 그랬습니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도 금식을 했습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인물들도 금식을 즐겨 했습니다. 금식을 경건을 위한 훈련으로 삼았고, 절제의 신앙을 만들어 내었고, 인내의 신앙을 가져 오게 했습니다.
특히 천주교는 수도원 생활을 통해 금식을 자주하게 하고, 권장했습니다. 천주교는 금식이 관행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절기일 중에 금식 절기가 있습니다. ‘금식영성체’ 라는 것도 있습니다. 재의 수요일이나 사순절 기간이나 고난주간에는 금식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개신교에서는 금식을 거의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난 후에도 경건한 신앙인들은 금식을 자주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천주교처럼 금식을 강제로 하게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서히 세월이 흐르면서 사라져 갔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주었기 때문에 육신의 편안함을 따라가 버린 것입니다. 개신교에는 금식의 교리가 없습니다. 개신교는 자기의 주관대로 , 자기의 생각대로 자기의 필요에 따라 금식을 하는 것입니다. 고난주간에 예수님이 고난당했으니 막연히 금식을 왜 해야 하는지, 금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냥 자기 주관대로 금식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도 40일 금식을 하셨으니, 나도 최소한 40일은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금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40일 금식을 몇 번 했는가? 40일 금식한 횟수를 따지면서 자랑하면서 자기의 영성의 깊이가 있는 것처럼 자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40일 금식을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은 신앙의 깊이가 없고, 영성이 적은 것 같이 취급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의욕만 앞서서 40일 금식을 끝까지 밀고 나가다가 문제가 생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40일 금식을 작정하고, 금식을 하다가 중간에 그만 두면 금식을 실패한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의 신앙이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억지로 40일을 밀어 붙이다가 문제가 생기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금식을 하다가 몸에 이상 신호가 오면 금식을 중단하고 빨리 병원으로 가야 되는데 끝까지 해 보겠다고 하다가, 사망하기도 하고, 뇌졸증이 오기도 하고, 몸의 일부분에 마비가 오기도 하고, 평생 불구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금식의 목적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했습니다. 신랑이 빼앗길 때, 신랑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모세 오경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 년에 한 번씩 금식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위급상황이 되거나 신앙의 위기가 왔을 때는 금식을 몇 번 더 지정해서 금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은 일 년에 한번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시대에 오면 바리새인들은 일 주일 두 번씩을 금식했습니다. 그리고는 금식하는 것을 유세를 떨었습니다. 모든 사람들한테 금식하는 것을 알렸습니다. 또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했습니다. 얼굴을 씻지도 않았습니다. 머리도 덥수룩하게 하고, 세수도 안하고, 얼굴을 찡그리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다니면서 금식 하는 표시를 낸다고 한번 상상해 보세요. 보는 사람마다 좋게 보이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17-18절)고 하신 것입니다.
왜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하십니까? 사람들에게 표시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금식 하는 것은 남에게 보이려고,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내 신앙의 위기가 와서 신랑되신 예수님을 빼앗길까 싶어서 금식하는 것인데, 다른 사람에게 표시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아하! 하나님이 싫어하는 나쁜 금식도 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금식 한다고 해서 무조건 다 좋은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금식도 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싫어하는 금식, 잘못된 금식이 두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오늘 읽은 본문의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금식, 자랑하는 금식 – 즉 금식을 통해서 신앙이 좋다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한 금식입니다.
또 하나의 금식은 이사야58장 3-5절에 나오는 금식입니다.
『(3)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5)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금식하면서 오락을 즐기고, 온갖 일을 시키고 – 내가 금식한다는 핑계로 다른 사람들에게 일을 시켰다 – 싸우고, 논쟁하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이익을 위한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금식은 금식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금식은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금식은 “신랑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외는 다 자기를 위한 금식이요, 자기의 이익을 위한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이어트를 위한 금식이나, 병을 고치기 위한 금식이나, 한 번도 안 해 봤으니 ‘이번에 나도 한 번 해 봐!’ 하는 식의 금식은 사실은 금식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금식의 목적은 예수님과 나의 관계를 더 가까이 하고, 관계를 회복하고, 사탄이 개입해 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신앙이 나태해지지 않고, 다시 제 충전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위해서 금식하는 것입니다. 이것 외의 금식은 다 자기의 이익을 위한 금식, 자기를 위한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 때문에 천주교에서는 아침을 먹지 않고, 점심은 든든하게 먹고, 저녁은 아주 작고 간단하게 먹는 방법으로 금식하는 것을 자주 합니다. 특히 신부들이나 수녀들에게는 이런 방법으로 금식을 자주 합니다. 물론 술 좋아하고, 먹는 것을 좋아하는 신부 수녀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금식을 자주 하면서 영적생활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신부들이나 수녀들, 그 외에도 신앙이 깊은 천주교인들은 살이 뚱뚱하게 찌면 하나님 앞에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성경에도 보면 금식에는 반드시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특별한 어떠한 일을 앞두고, 그것도 자기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 민족을 위한 큰 일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금식한 것이 많습니다. 예를들어
1) 모세 금식(출24:18,34:28)입니다.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일 사십야를 시내산에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미래를 위해서 하나님께 말씀을 받기 위해서 금식한 것입니다. 금식 후 십계명과 언약의 말씀, 성막의 설계도를 받게 됩니다.
2) 예수님 금식(마4:1-11)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면, 구원 사역의 완성을 위해서 광야에서 40일 금식을 하셨습니다.
3) 다니엘 21일 금식(단9장,10장)입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70년 후에는 해방된다는 그 비밀이 언제부터이며, 그 후부터는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자기 민족의 앞날을 생각하며, 21일 동안 금식했습니다.
4) 유대인들의 하루 금식(레16:29,34)입니다. 유대인들은 매년 7월 10일을 대속죄일로 정하고 하루 금식을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요, 그동안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용서함 받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기회를 만들고, 신앙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보면 기독교가 말하는 금식, 성경에 나오는 금식은 내 자신의 이익을 위한 금식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한 금식,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기 위한 금식, 예수님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신앙을 지키고, 우리 주님과 더 가까운 관계를 가지기 위한 금식이 성경이 말하는 금식이요, 우리가 금식을 하는 목적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 성도가 금식을 하면 왜 좋습니까? 금식을 하면 어떤 유익을 줄까요?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의 육과 영의 관계 때문입니다. 사람은 육신(body)과 혼(mind,정신,마음)과 영(spirit)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혼(마음)은 가장 많은 활동을 합니다. 혼의 기능에는 지, 정, 의, 즉 생각의 기능, 느낌의 기능, 결단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혼은 영의 영향을 받아야 경건의 삶,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혼이 육신의 영향을 받으면, 추한 삶을 살게 됩니다. 육신의 만족만을 위한 육신을 따라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점점더 육신의 힘은 강해지고, 육신의 욕구를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영적인 생활, 믿음의 생활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혼과 육신이 영에게 끌려가는 삶을 살게 하는 훈련이 금식입니다. 금식은 육신의 욕구와 육신의 욕구의 지배를 받는 혼의 욕망을 제어해 버립니다. 그래서 금식은 영을 따라가고, 영을 맑게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고, 나의 영을 하나님께 이끌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에 속에 사람은 금식을 통하여, 나의 혼과 육신을 영에게로 붙이고, 영에게 협력하게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금식은 영과 혼과 육신을 건강하게 하고, 인간의 인격과 전인적 삶을 건강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금식은 육신도 정신도 영도 다 맑고 건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단식과 금식은 전혀 다릅니다. 기독교의 금식은 나의 육신의 이익, 병을 고치기 위한 이익을 위한 금식이 아닙니다. 살을 빼기 위한 금식도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관계와 우리의 전인적(全人的)인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의 삶을 위해서입니다.
살을 빼기 위해 금식을 하는 분들이 있는데, 순전히 살만 빼기 위한 목적의 금식은 내 영과 혼에 별 유익이 없습니다. 이런 금식은 얼마 있지 않아 또 다시 살이 찌고 맙니다. 원상회복이 됩니다. 그러다가 또 살이 찌면 또 금식을 해서 살을 빼려고 금식을 하는데 그러면 우리의 육신은 눈치를 채고 더 빠른 속도로 살이 찌도록 해서 우리 몸에 지방을 비축시켜서 더 빨리 살이 찌도록 합니다. 이렇게 해서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이런 금식은 사실 영, 혼, 육에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결론으로 기독교의 금식은 금식을 위한 금식이 아닙니다. 자연스러운 금식입니다. 표시내지 않는 금식입니다. 다른 사람이 모르는 금식입니다. 나의 영과 혼과 육이 건강하게 하는 금식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만드는 금식입니다. 신앙이 회복되게 하고,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님을 빼앗기는 위기가 올 때 금식하는 것입니다. 이런 금식을 금식기도라고도 합니다. 금식기도라고 하니까 늘 엎드려서 안 움직이고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을 하면서 내 영과 혼과 육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말씀을 보면서 마음으로 기도하며 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식기도입니다.
보통 일반적인 금식은 아침은 먹지 않고, 점심은 평소에 보통 먹는 양으로 먹고, 저녁은 소식으로 작은 양으로 간단하게 먹는 정도로 금식하는 것도 좋습니다. 천주교의 수도원이나, 수녀원, 또 천주교인들이 사순절이나 고난주간에 주로 많이 하는 방법입니다. 그들은 금식기간이 되면 주로 이런 방법으로 금식을 합니다.
10일 금식, 20일 금식, 30일 금식, 40일 금식, 이런 금식은 특별한 경우에, 하나님이 특별하게 쓰시기 위해서 부름받은 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모세나, 예수님이나, 에스겔, 다니엘, 그리고 영적인 거장들은 이런 금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보통의 신앙인들은 하루에 한 끼씩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한 끼 안 먹고 그 다음 점심, 저녁 때에 더 많이 먹으면 금식의 의미가 없습니다. 그럴려면 안 하는 게 낫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성숙과 순종의 삶을 살기 위해, 경건의 삶을 살기 위해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주님을 기쁘게 하고, 주님과의 동행의 삶을 살기 위한 금식기도가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설교 원고 > 산상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39.[산상복음39]하나님이냐, 재물이냐 (0) | 2021.04.09 |
---|---|
38.[산상복음38]하늘의 보물, 땅의 보물 (0) | 2021.04.09 |
36.[산상복음36]기독교인의 신앙행위 - ②기도 (0) | 2021.04.09 |
35.[산상복음35]기독교인의 신앙행위 - ①구제 (0) | 2021.04.09 |
34.[산상복음34]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0) | 2021.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