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2016/4/10) - 산상복음(36)
기독교인의 신앙행위 - ②기도
마태복음6:5-8
4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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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다시 산상복음을 설교하겠습니다. 1절에서 18절까지는 기독교인의 신앙생활면입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주제들은 예수님 당시의 신앙생활의 가장 대표적인 주제들입니다. 예수님은 1절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십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의 끝에는 반드시 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 받는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기독교인의 의의 생활이 곧 신앙생활인데,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너희 의의 생활”, 즉 신앙생활을 하지 않도록 해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사람에게는 칭찬을 받겠지만, 하나님께는 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중에 대표적인 것 세 가지를 뽑아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제는 사람들과 관계입니다. 섬김, 봉사, 낮아짐, 겸손 등, 인간관계가 여기에 포함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접촉하는 생활인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배, 기도, 헌금, 성경 읽기 등입니다. 금식은 육신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절제입니다. 인내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통털어서 의의 생활, 경건의 생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위선자들은 ‘기도하기를 좋아 했다’ 라는 것입니다. 5절에 “그들은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오히려 기도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는 일이요, 우리 신앙인이 해야 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면 서서 기도한 것이 문제냐? 그것도 문제가 안 됩니다. 유대인들은 다 서서 기도합니다. 그러면 회당과 큰 길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는 것이 잘못이냐? 그것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문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서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했다” 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가 문제였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기도의 동기, 신앙생활(경건생활)의 참된 동기가 무엇이냐 라는 것입니다. 정말 기도하는 것이 좋아서 하는 것이냐? 정말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것이냐? 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것은 그 경건 속에 숨어 있는 교만을 지적해서 끄집어내시는 것입니다. 그 속에 숨어 있는 교만, 내 속에 의로움이 있다 라고 드러내고 싶은 그 마음, 정말로 원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고, 경건의 삶이 아니고, 사람들의 칭찬을 듣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속에 있는 경건을 드러내어서 보여주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으니, “너희는 이미 자기 상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이미 자기 상을 받았으니, 앞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받을 수 없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도 모든 신앙생활이 여기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것도,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것도, 열심히 기도하는 것도, 헌금을 열심히 하는 것도, 우리의 종교생활, 즉 신앙생활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경건하다는 평판을 듣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칭찬 듣고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사람을 의식해서...’ 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선적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만을 만들어 냅니다. 자기의 이익만을 위한 신앙생활을 만듭니다. 그래서 자기를 안 알아주고, 자기가 드러나지 않고, 자기에게 이익이 없으면, 다른 교회를 찾아 다니는 겁니다. 나를 더 많이 유익하게 하는 교회를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오늘은 나한테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무엇일까?’ ‘나에게 어떤 말씀을 주시기를 원하실까?’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일까?’‘오늘은 나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실까?’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고, 나를 만족시키는 말씀, 나를 기분 좋게 해 주는 설교, 나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설교, 나의 감성을 자극시켜 주는 설교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인정해 주고, 나를 높여 주고, 나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나의 추한 부분, 죄, 들추어내고 싶지 않는 부분을 묻어두고 건드리지 않는 설교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나에게 흐르지 않게 합니다. 은혜의 샘이 나한테로 흘러내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는 더 자라나고, 나를 더 교만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오늘날 현대교인들에게 성령의 은혜가 흐르지 않습니다. 보혈의 은혜가 내 심령 속에 흐르지 않습니다. 교만의 나무만 자꾸 키웁니다. 나의 자아만 자꾸 살아나고, 내 영은 자꾸 죽어 가고, 하루를 더 살아도 선악과만 따먹고 사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생명의 나무는 손도 못 대 보고, 선악과만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의만 자꾸 드러내고, 나의 교만만 자꾸 키웁니다.
왜 예수님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하십니까? 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고 하십니까? 왜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그 속에는 죄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죄가 분출해 내는 행동들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날 수 록 힘이 강해지고, 인간의 마음 밖으로 죄의 욕구를 분출해 내는 것입니다. 죄는 너무 무서운 것이어서 우리 주님께서 폭로하신 것처럼, 우리를 천국 문에 까지 따라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천국 문 안으로까지 따라 오려고 합니다.
죄는 아주 영리한 사탄이 뿌리는 마약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인간에게 뿌립니다. 사탄은 천국에 거하던 아주 영리한 일종의 천사였습니다. 죄는 사람이 죄에 타락하기 전에 먼저 타락한 천사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사탄은 자기가 타락할 때처럼, 인간을 똑같은 방법으로 타락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를 밖으로 나타난 행동의 결과로만 평가하면 안됩니다. 죄는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는 아주 고상하고, 아주 선하고, 아주 의로움 속에서도 웅크리고 숨어 있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성격, 체질, 전존재를 오염시키고, 아주 고상한 일을 할 때에도 인간 속에 웅크리고 숨어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할 때에도 그 마음속에 웅크리고 숨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본문을 통해서 죄가 인간 속에 숨어서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가를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결국 인간 자신을 높이게 하고, 인간 자신을 교만하게 하고, 인간 자신을 경배 받게 하고, 모든 영광을 자기에게로 끌어 당기 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가장 귀하고 고상한 모습입니다.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과 교통하며 접촉을 가지는 최고의 모습입니다. 프랑스의 초고의 미술 작품은 장 프랑스와 밀레의 “만종”입니다. 이 그림은 프랑스의 바르비종 마을 앞의 넓은 들판에서 일하던 한 부부가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기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인생 최고의 업적이요, 사람의 가장 고귀한 행동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장 가까운 길입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가장 가까운 길이요, 하나님과 교제하는 제일 좋은 길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어린이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런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기도를 못하게 하십니까? 이 기도는 거짓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도는 마음속에 숨어 있는 죄가 밖으로 분출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하! 이것을 보면 기도에도 “거짓된 기도”가 있고, “참된 기도”가 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거짓된 기도”와 “참된 기도”를 동시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거짓된 기도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를 받으실 분에게 보다도 기도하는 사람 자신에게 주의를 집중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것을 여기서 매우 생생하게 인상적인 방법으로 보여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9-14절에 보면, 이것과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바리새인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서 가장 좋은 앞 자리에 따로 서서 – 사람들이 잘 보이는 곳 - 손을 높이 들고 큰 소리로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라고 기도했습니다
한편 세리는 너무 부끄럽고 뉘우침이 가득해서 “멀리 서서” -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는 곳, 사람들의 관심 밖의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곳에서 –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하면서 울었습니다. 하나님은 세리의 기도를 받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이 왜 큰 길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을까요? 이곳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길목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성전에 올라가는 이유는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바리새인들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서서 자기가 그토록 독실한 신앙을 가진 인물임을 보여 주고 싶고, ‘내가 독실한 신앙인이기에 성전에 도착하기 까지 기도를 기다릴 수 없다. 기도가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 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에 올라가는 큰 거리 어귀에 서서 손을 높이 올리고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에 도착해서도 가능한 한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곳으로 가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짓된 기도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거짓된 기도의 장면이 나옵니다. 7절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라고 하십니다.
“중언부언”이라는 용어는 동방에서 온 종교들 중에 ‘기도윤당(祈禱輪堂, 기도문이 들어 있는 빙글빙글 도는 북)을 의미합니다. 계속해서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유래된 것이 불교의 염주를 돌리는 것, 천주교에서도 염주를 돌리는 것, 다 여기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7절에서 “이방인과 같이...”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빙빙 돌리는 것은 다 이방인 종교에서 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의 특징이 뭡니까? 계속 반복해서 오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길게 오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의 분량, 기도하는 시간의 길이를 가지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똑같은 말로 계속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기도를 오래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은 거짓된 기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뭐냐하면,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고, “정말 신앙이 좋으네! 정말 기도 많이 하네! 정말 경건한 사람이네!” 라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는 것이 기도하는 목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았으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 때 하는 공중기도(대표기도)만큼 신뢰성이 떨어지는 기도는 없습니다. 미사여구를 넣어서 물 흐르듯 잘 흘러가는 유창한 기도, 사람들이 그 기도를 들으면서 은혜의 눈물이 나고, 심령의 감동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그 분 참 기도를 잘 하네, 유창하게 말을 잘 하네, 그 분의 음성이 참 좋으네, 다듬어진 문장과 다듬어진 기도네” 라고 평가를 한다면, 그것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하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기도이니,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기도가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창한 말솜씨의 기도, 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식의 기도는 신뢰성이 없는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기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시에 공중기도(대표기도)는 문제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하는 기도인지, 사람에게 들으라고 하는 기도인지 알 수 없는 기도가 많습니다. 이 대표기도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개혁교회에서 대표기도는 없습니다.
이 대표기도는 처음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우리나라 말을 잘 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인들 중에 연장자에게. 그리고 신앙이 좋은 교인에게 기도를 대신 하게 한 것이 관례가 되어 지금까지 전해내려 오는 것입니다.
우리 개혁교회에서는 예배시에 목회자들이 기도하는 것은 모두 축복의 선포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예배를 위해서, 교인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중재자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배시의 목회자의 기도입니다. 이것을 대표 기도하는 분들이 따라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표기도를 꼭해야 된다면, 길게 하면 안됩니다.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하는 식의 중언부언해도 안됩니다. 미사여구를 넣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식으로 기도를 하면 안됩니다. 아주 간단하게, 예배의 진행을 위해서,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기도는 어떤 것인가?
“골방기도”입니다. 골방기도가 중요합니다. 성도는 골방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이 가르치시는 기도의 본질은 “골방기도”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절)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어느 곳에서 기도하든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접근하고 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라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인식이 중요하다 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 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문을 닫고..”라는 말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에 “방해거리와 산만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을 차단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인간 구경꾼들의 곁눈질보다 기도를 더 망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구경꾼들을 의식하거나, 구경꾼들에게 관심을 가질 때 하나님의 임재가 일어나지 않는 거짓 기도, 쭉정이 기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은밀하다”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은밀한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과의 은밀한 관계를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그 은밀한 관계를 남들에게 드러내고, 떠벌리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와 나와의 관계는 너와 나와만 알면 되지 왜 다른 사람들 한테 떠벌려 알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기도는 자랑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뭐냐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단 둘이 있고 싶은데, 여자가 옆에 누구를 데리고 나오는 것입니다. 친구를 데리고 나온다든가, 동생을 데리고 나온다든가, 그렇게 해서 그 데리고 나온 사람 것 까지 식사대금을 본이 아니게 남자가 더 부담하게 될 때, 제일 기분 나빠한답니다. 여자들이 이것도 모르고, 친구를 데리고 나왔다가 그 친구한테 남자를 빼앗길 수도 있겠지요. 하나님은 너와 나와의 관계를 다른 사람한테 드러내고 떠벌리는 것을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신앙생활에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입니다. 신비한 비밀의 교제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기 전에 벌써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느니라” 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하는 그 자체를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에스겔36:37에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에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해서 가장 복된 자들로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각자에게는 “그래도 너희는 이것들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는데, 기도 안 해도 되잖습니까?’ 그런데 이것들을 위해서 구하라고 하십니다. 왜 기도하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그 구하는 것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나와 기도하는 그 자체를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내가 단 둘이 깊은 교제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어떤 것도 중간에 끼여들지 않는 순수한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좋아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하나님은 없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생각하지 않고, 나의 기쁨을 먼저 생각하고, 나의 만족과 나의 이익을 위해 신앙생활하지 말고, 나의 명예와 사회의 직위에 손상되지 않는, 나의 만족과 유익만을 찾는 신앙생활을 버려야,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신앙생활의 진정한 참맛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일대 변화가 일어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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