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2016/5/15) - 산상복음(40)
염려하지 말라
마태복음6:25-34
38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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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돈 문제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고, 염려와 근심, 걱정이 많습니다. 인류 역사는 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문제였습니다. 우리나라도 반만 년의 역사동안 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였습니다. 인류역사는 다 이렇게 살아 왔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돈 문제, 물질 문제 때문에 염려한다 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다가 조금 여유가 생기고 살만해지면, 인간은 또 차원이 다른 고민과 염려와 근심으로 살아갑니다. 결국 사람은 여유가 있으면 있을수록, 더 풍성해 질수록 자기의 더 큰 영광을 만들기 위해서, 또 근심하고, 염려하고, 고민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염려가 많은 동물인 것 같습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입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가장 밑바닥에 있는 근본 문제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이 근본 문제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하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인간은 동물과 달라서 이 근본적인 문제에 붙잡히면, 인간은 더러워지고 저질 인간이 되고, 속물인간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 죄가 붙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이기심이 발동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마귀가 시험하고, 이것 때문에 믿음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시험도 먹는 문제였습니다)
죄는 사탄이 주는 것입니다. 죄는 인간의 전 존재에 달라 붙습니다. 죄는 인간의 전체에 달라붙어 오염시키고, 삶의 질을 떨어뜨립니다. 인간성을 악화시키고, 두려움과 근심, 걱정을 만들어 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과 죄의 무서운 교활함입니다. 사탄에게는 죄가 어떤 형태를 취하느냐, 어떤 종류의 죄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보물을 땅에 쌓던, 하늘에 쌓던, 세상일에 염려하든, 우리가 무엇을 먹든, 무엇을 마시든, 우리가 이 세상에 어떤 일을 하든, 잘 되든, 못되든, 사탄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그런 것에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오직 사탄의 관심은 인간의 마음을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세상에 붙잡아 놓고 관심을 가지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염려는 바로 사탄이 주는 것이며, 이 염려가 바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게 하는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이 왜 염려합니까? 돈 때문에 염려하는 것 아닙니까? 물질로 인해서 오는 염려입니다. 돈 때문에 온통 염려와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여 있겠습니까? 염려는 하나님께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을 향하게 하고, 세상 쪽으로 붙어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문장을 자세히 보면, “그러므로” 라는 말을 하고 “염려하지 말라” 라는 말을 세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25,31,34절). 이것은 아주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염려”라는 단어를 여섯 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염려”라는 말은 ‘분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염려는 사람의 마음을 찢고 분열시킨다’는 것입니다. 염려는 인간의 마음을 나누고, 분리하고, 어지럽히는 어떤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38-42절에 보면, 예수님이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머무는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이 중요합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 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 구나” 라고 하십니다. 마르다는 마음이 혼란해져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하고 염려와 근심이 뒤엉켜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준비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 일에 집중하고 만족하면 염려가 안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중하지 못하고 염려와 근심이 앞서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단순했습니다. 단일 목적, 단일 목표를 갖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많은 일로 혼란해 있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염려하는 것은 내가 지금 복잡하다 라는 증거입니다. 힘들다 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나보다 더 걱정 없이, 염려 없이 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비교합니다. 복잡합니다. 염려는 내가 지금 땅의 일에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단순화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땅의 일들, 세상의 일들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 노심초사하지 말라. 또 이런 일들을 바라보면서 염려에 깊이 빠지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주된 목적에서 빗나가는 삶을 살게 되고, 계속 반복해서 염려의 삶을 살게 된다 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염려가 왜 우리 인간의 마음을 망치고, 죄를 짓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지게 합니까? 그 이유가 뭡니까? 우리 인간의 구조가 영(sprit), 혼(soul, mind), 육신(body) 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인간의 정상적인 구조요, 기능입니다. 그런데 죄가 생기게 되면 이 사람의 정상적인 기능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어지럽고 혼란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믿음은 단순화 시키는 것입니다. 복잡한 일도 믿음이 있으면 단순화 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인도해 주시고, 해결해 주신다 라는 믿음은 복잡한 일도 간단하게 생각하고 단순화 시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에게 영, 혼, 육 중에서 혼(soul,mind)의 기능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 혼의 기능에는 지성(지), 감정(정), 의지(의)의 기능이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생각의 기능, 느낌의 기능, 결단의 기능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이 생각하고, 느끼고, 결단하는 것은 다 이 혼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지성(지)인 생각의 기능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이해한 만큼 행동합니다. 인간은 내 생각이 이해가 되고 느끼면,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내 생각, 즉 지성이 이해가 되면, 그 이해한 것의 지배를 받고 조정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가장 좋고, 가장 참된 것으로 이해가 되면, 사랑하게 되고, 좋아하게 되고, 그런 다음 그 모든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다 좋다고 해도 내가 마음이 안 드는 것은, 내 생각, 즉 내 지성이 그것을 받아 들이지 못하고, 이해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내 지성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여 이해가 안 되면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무엇이든 하기가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혼이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혀 있다거나, 두려움에 붙잡혀 있다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특히 내 혼의 지성, 즉 생각의 기능이 죄에 붙잡혀 있고, 염려와 근심, 두려움에 붙잡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의 삶이 온전해 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내 영과 교제가 되겠습니까? 인간은 영의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 사탄에게 붙잡혀 있고, 염렴와 근심에 붙잡혀 있는 혼은 영의 지시를 받지 않겠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왜 성도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염려가 내 혼을 점령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특히 내 생각의 기능을 점령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염려가 내 생각을 점령해 버리고, 감정을 점령해 버리고, 내 의지를 점령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육체는 그냥 따라 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는 내 영혼을 병들게 하고, 내 육체에 끌려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과 육이 하나가 되어 바울이 말한 대로 육에 속한 사람이 되고, 육체의 소욕을 이루며 살게 되고, 영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마음”이라는 말이 처음 나옵니다. 이 “마음”은 혼(soul/mind)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보물(물질)을 하늘에 쌓아 두라.... 네 보물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물질 때문에 염려하면 내 혼(마음)에 죄가 붙습니다. 내 혼이 병듭니다. 그러나 내 마음을 하늘에 두고 있으면, 염려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혼(마음)을 하늘에 두어야 눈이 밝아진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22,23절에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내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눈’은 육신의 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의 눈을 말하는 것인데, 인간의 영(spirit)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 혼과 영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 혼이 혼란하면 내 영도 어둡다는 것입니다. 내 영이 어두우면 혼도 어둠고 내 온 몸이 어둡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빛을 받아 밝아야 하고, 인간의 혼(마음)은 하늘에 두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했습니다. 이 눈들은 영들을 말합니다. 보좌 옆에 서 있는 어린양에게도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는데, 이것은 온 땅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했습니다(계5:6). 마찬가지로 22절의 ‘눈‘도 인간의 영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이 밝아야 합니다. 특히 성도는 영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왜 염려합니까? 영이 어두워서 그렇습니다. 혼이 염려에 붙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영이 밝은 사람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요? 온 몸이 밝기 때문입니다. 염려해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영이 어두운 사람은 밝히 볼 줄 모르기 때문에 염려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해 봐야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염려로 해결되는 게 아니고, 도리어 생명을 상한다 라는 것입니다. 염려하면 키라도 한 자 더 자랄 수 있는 게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염려는 아무런 유익을 주는 게 아니고, 도리어 마음(혼)을 상하게 한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염려하지 말라” 라고 한다고 해서, 문자적으로 그대로 적용해서, 물질에 대해서 조금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미래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하지 아니하고, 앞날을 위해 조금도 준비해서는 안 된다라고 생각하고, 교회사에 보면 은둔 생활을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으로만 살아야 한다 라고 하면서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그냥 그냥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 놓고 산다 라고 하면서 노력 없이 그냥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수도원 생활들의 출발이 세상 등지고, 염려 없이 경건하게 살자 라는 의미로 출발한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원이 가장 많이 발달한 중세시대를 암흑의 시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26절에서 공중의 새를 예로 들면서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라고 하십니다. 공중의 새들이 나무 위에나 장대 위에 앉아 음식이 그들에게 자동적으로 날라 들어와 지기까지 기다립니까? 새들은 음식을 위해 바쁘게 찾아 다닙니다. 공중의 새들은 정말 활동적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먹이를 찾아 다닙니다. 들의 백합화를 보십시다. 그들도 생존경쟁을 위해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염려하지 말라” 라고 하신다고 해서 소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농부들이 밭을 갈고, 써레질을 하고, 씨를 뿌리고, 추수를 거둬 곡식을 곡간에 거두어 드리는 것을 결코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미래를 위해 준비하며 땀을 흘리며 일하는 것을 염려하는 삶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에서 사도 바울은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근심과 염려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적군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성벽을 무너뜨리는 적입니다. 염려와 근심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의 영적인 성벽은 무너집니다.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믿음에서 멀어지게 하고, 세상의 염려와 복잡하고 혼탁한 일에 빠져 들게 합니다. 그래서 염려는 염려를 낳고, 근심은 근심을 낳고, 두려움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면서 우리에게 근심과 염려가 많을수록 내 속에 또 다른 성벽을 쌓습니다. ‘견고한 진’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 기도, 간구, 하나님의 평강,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마음, 생각을 밀어내 버리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있는 염려와 근심은 우리 속에 있는 견고한 진을 만듭니다. 점점더 높이 쌓아갑니다.
그래서 견고한 진을 높이 쌓은 심령 속에는 세상의 것을 가득 품고 있고, 신령한 것, 영적인 부함은 점점 없어지고, 점점 아집과 고집만 높아 갑니다. 염려와 근심은 점점더 자기의 자아를 높이 쌓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세상에 꽉 붙잡혀 있고, 돈에 꽉 붙잡혀 있고, 이기심에 꽉 붙잡혀 있고, 관계의 소통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이고, 은혜의 말씀, 하나님을 믿고 의지 하는 믿음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복잡한 삶을 단순화해야 합니다. 복잡한 생각을 단순화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은 하나로 집중해서 모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하나로 모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예수님 쪽으로 나의 생각, 즉 나의 혼의 기능을 모으는 것입니다. 생각의 기능, 느낌의 기능, 결단의 기능을 예수님 쪽으로 모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의 혼의 기능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 살아집니다.
원래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했습니다. 노아 홍수 후에도 새롭게 시작하는 노아 후손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번성하라”(창9:7) 고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 속에 죄가 들어 왔습니다. 인간이 사는 땅에는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먹고 살기 위해 땀 흘려 수고해야 했습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싸워야 되고,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된다는 말은, 예수님이 말씀한 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자들이라”(마11:28)는 말입니다. 이것은 인생의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을 가득 안고 산다는 것입니다.
죄 지은 가인도 한 평생 두려움 속에서 살았습니다(창4:12-14).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에 갇혀 살았습니다. 그래서 가인이 제일 먼저 한 것이 성을 쌓은 것입니다.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자기만을 위한 높은 성을 쌓은 것입니다(창4:17).
여러분, 사람이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곁을 떠나면 그 떠나는 순간 두려움과 염려가 몰려오는 것입니다.
생명은 누가 주신 것입니까? 생명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그 답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람은 생명을 창조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 몸을 낳을 수 없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이 세상에 오기로 결정하고 온 사람은 없습니다. 이 순간 우리가 살아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목숨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고 유지시키시고 인도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염려하고 근심하고 걱정한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특별히 더 나아질 것도 없고, 더 좋아질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괜히 몸만 상하고 힘만 더 듭니다. 믿음만 떨어지고, 마귀의 시험만 들고, 영육 간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자처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32절에서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 32절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공중의 새를 보고,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시는 것은 뭘 말하시는 것입니까? 새들은 먹이를 찾아 다녀야 합니다. 그러나 새들을 위해 먹이를 공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새들을 위해 먹이가 그 곳에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들의 백합화도 땅 속에서 뿌리가 열심히 영양분을 빨아 들여야 합니다. 햇빛을 빨아들이고, 산소를 빨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영양분이 계속 그곳에 있게 하고, 햇빛과 산소가 그곳에 있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추수를 해야 합니다. 땀을 흘려야 합니다. 바쁘게 뛰어야 합니다. 돈을 열심히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명을 공급해 주시고, 물질을 주시고, 길을 열어주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갑자기 내 생명을 유지하기에 충분하지 못하기라도 한 것처럼 염려하고 근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하나님을 철저히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염려할 일이 많고, 세상이 변해가도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신다 라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에게 기적을 일으키듯이, 주님의 성도들에게도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어며,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이 눈에 보기에는 어떠하든지, 이미 얻은 증거대로 늘 믿으며,
이 맘에 의심 없이 살아갈 때에 우리 소원 주 안에서 이루리.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나가세 나가세 의심버리고,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눈과 귀에 아무 증거 없어도“ (54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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