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2016/5/29) - 산상복음(42)
믿음이 작은 자들아
마태6:30-32 / 357,545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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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눈으로 온 세계를 바라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도 믿음의 눈으로 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 보는 것도 믿음의 눈으로 알고, 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우리보다 앞서간 믿음의 조상들은 이것으로 증거를 얻었습니다. 믿음으로 온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압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30절 마지막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나라 말로는 뜻이 잘 안 통하도록 번역했는데, 원문에나 영어에는 “아, 믿음이 작은 자들아!” 라고 탄식하는 식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여섯 번 나옵니다. 예수님은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한번도 “믿음이 없는 자들아!”라고 하신 일이 없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라고 하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있지만, 믿음이 크지 않다. 충분하지 않다. 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오늘 본문에서 하시는 말씀은 비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고,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 17절 이하를 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라고 책망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조용히 나와서 “우리는 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합니까?” 라고 물었을 때에는,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향하여는 믿음이 없다고 하시지 않고, 믿음이 작은 까닭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시는 산상복음의 말씀은 믿는 성도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믿음이 작으냐, 믿음이 크냐’ 가 문제이지 믿음이 없는 자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음이 있는 자입니다. 작은 믿음이지만 믿음을 가졌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 작은 믿음이 문제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주신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십시다. 할렐루야!
26절과 32절에 보면, “너희 하늘 아버지” 라고 두 번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분명히 적어도 하나님이 “너희 하늘 아버지” 에 해당되는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아버지가 있지만, 우리 아이들 한테는 나만이 아버지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믿음의 관계는 혈통과의 관계와 달라서 믿는 자와의 관계에만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면 믿음의 관계는 해당이 안 됩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관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로 믿어질 때, 믿음의 관계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으로, 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구세주로 믿어야만, 나의 주님으로, 나의 구원주가 되시고,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자들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늘 비판하고, 대적하고, 방해하는 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의 자식이다“(요8:44). 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복음은 항상 사람들을 두 그룹으로 나눕니다. 세상도 하나님의 세상과 마귀의 세상으로 나눕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지성을 가지고, 철학적이고, 지성적인 사람들, 윤리적이고, 윤리를 숭상하는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그들은 ‘사람은 다 평등하다. 사람의 인권은 다 중요하다.’ 라고 주장합니다. 맞습니다. 사람은 다 평등하고, 인권은 소중합니다.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 인권, 이런 것들도 다 기독교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기독교정신입니다. 기독교가 이런 것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영적세계,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로 들어가면, 분명히 사탄의 세계가 있고, 하나님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 두 세계는 항상 영적인 치열한 전투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과 사탄의 나라 확장을 위해 영적 전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항상 이 영적세계를 두 그룹으로 나눕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느냐, 아니면 세상에 속해 있느냐, 성령이 지배하느냐, 아니면 사탄의 영이 지배하느냐 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느냐, 아니면 마귀에게 속해 있느냐를 구분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는 이 세상은 비참과 불행만 있고, 참된 평화가 없다. 라고 외쳐야 합니다. 더군다나 오늘날과 같은 불신앙의 시대에는 더 확실하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며, 그 분이 다스리는 세계로 들어 와야 합니다. 이것을 강하게 확실하게 거듭 거듭 주장해야 합니다. 불신앙의 세계에서는 소망이 없습니다.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에게만 소망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오늘 말씀 32절의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고 하면서 기독교인들과 이방인들을 구별하여 비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이방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늘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별합니다. 그래서 산상복음은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산상복음을 시작할 때, 팔복부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팔복은 기독교인들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팔복이 주어진 자들에게만 산상복음이 해당되는 것입니다. 팔복이 적용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입니다. 우리 주님이 은혜를 부어주시고, 복을 부어주시기를 원하시는 자들이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고, 믿음의 관계를 이어 가는 자들이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믿음의 관계, 신뢰의 관계를 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오늘 주님은 “믿음이 작은 자들아!” 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믿음이 없다 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믿음이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작은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믿음이 충분하지 못한 믿음입니다. 구원의 믿음만을 가지고 있으며, 그 안에 머물러 서 있어 버리는 기독교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서,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 계속 영혼구원의 신앙에만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계속 구원, 구원, 구원 밖에 모릅니다. 구원에서 조금도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구원에 매여 삽니다. “내가 구원 받았는가?” “내가 구원 받을 수 있는가?” “내가 이렇게 믿어서 구원 받겠나?” 계속 구원을 고민하면서 구원 신앙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구원을 확신하지 못합니다. 늘 의심합니다. 그래서 이단에 잘 빠집니다.
이단들이 와서 정통교회와 좀 다른 것을 가르치면 ‘그것이 진리라고 하면서 그것이 나를 깨닫게 하고, 구원의 길을 알게 했다‘ 고 하면서 그 쪽으로 빠져 버립니다. 이단에 빠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원에만 매달린 신앙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 구원의 확신이 없고, 믿음이 충분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열심은 있습니다. 무언가 진리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항상 구원이 불안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나의 죄를 다 용서해 주셨다고 하는데, 무언가 내 마음이 시원하지를 않습니다. 무언가 2%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언가 더 확실한 응답이 필요합니다. 무언가 더 나은, 더 샌 응답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파에 빠지고, 신○지, 하○○의 교회 등등 여러 이단에 빠지는 것입니다.) 아직 구원 못 받았다고 하고, 자기 생일은 알면서, 구원 받은 날짜도 모르느냐 하고, 구원이 없는 교회에 다녀서 그렇다고 하고, 구원 받지 못한 목사 밑에서 교회를 다니니까 구원을 못 받는 거다 라고 하면서 그 교회 다니면 결국 구원 못 받고 지옥 간다. 그러니 우리 교회에 오느라. 라고 하면서 꼬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이런 믿음이 작은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십니다. 왜 염려 합니까? 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합니까? 믿음이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이 우리를 향하여 하고자 하시는 말씀이 뭡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바는,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서 보다 깊은 신앙, 보다 더 큰 믿음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큰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이 땅에서 우리가 많이 빼앗기고 삽니다. 그리고 큰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이생에서 우리를 향해 공격해 오는 걱정과 염려와 근심에 굴복하고, 시험에 빠지고, 흔들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기독교인의 염려는 궁극적으로 항상 믿음이 부족하거나 작은 믿음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목표해야 할 것은 큰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 큰 믿음을 획득하는 제일 첫 단계가 바로 “작은 믿음”이 무슨 뜻인지 인식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의 상태가 한 쪽에만 국한된 믿음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 구원 문제에만 국한 되고 그 이상 넘어가지를 못하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생활 전체, 더 나아가서 우리의 눈이 저 하나님의 나라까지 확대되고, 영적세계에까지 넓게 볼 줄 아는 믿음이 확대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 우리 예수 믿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전반적인 신앙의 상태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의 영혼구원에 대해서 등한히 여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의 영혼구원에 대해서는 분명해야 합니다. 확신해야 합니다. 흔들리면 안 됩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죄가 무엇인지도 깨닫게 되었고, 죄악으로 인하여 버림받은 인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원의 길은 오직 한 길,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만이 구원의 길임을 깨달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이렇게 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고 현재와 영원 세계를 연결시켜 주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요, 우리에게 그것을 믿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이 믿음이 없이는 구원 받을 수 없고, 이 믿음만이 우리를 기독교인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구원문제에만 멈추어 버렸습니다. 오직 구원문제에서 더 이상 확대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구원을 받았으니, 더 이상 신앙의 발전이 없습니다. 이제 구원 받았기 때문에 안일하게 삽니다. 그러다가보니 일상생활에서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과 별로 차이점이 없습니다. 그들처럼 염려하고, 근심하며 삽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매여 삽니다. 여러 가지 점에서 세상과 일치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오직 구원만을 위해 있는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무한대로 확대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이 구원에만 범위를 축소 시켜 놓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생활전체에 확대되어집니다. 이 세상의 어떤 삶에도 적용됩니다. 모든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까지도 적용됩니다. 심지어 저 영적세계에 까지 내다보게 하고, 영적전투의 현장까지도 보게 하고, 저 하나님의 보좌까지도 만나게 하고, 심지어 저 하나님의 나라, 메시야의 나라까지도 보고 오게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저는 제가 목회해 오면서 느낀 점은 처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믿음이 좋습니다. 점점 세월이 흘러 예수 믿는 신앙의 연조가 많아질수록 믿음이 점점 줄어듭니다. 예수 믿는 방법은 더 잘 알고, 교회생활에는 익숙해져 있겠지만,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일수록 믿지 않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 교회 교인들은 오래 교회에 다닌 교인일수록 하나님을 의식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사실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혼구원의 문제, 천국 가는 문제는 믿는지 모르겠지만, 그 외에는 안 믿습니다. 이것이 점점더 세월이 흘러 마지막 때에 주님이 오실 때가 되면, 영혼구원도 안 믿고, 천국도 안 믿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천국 가는 것, 영혼이 구원 받는 것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전 생애, 우리 삶의 전체에, 모든 일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문제와 염려를 여전히 우리가 안고 살아 갑니다. 이것들로 말미암아 압도당하고, 좌절당하며,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우리들을 함께해 주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믿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처지에 있을 때는 주님은 나에게 오라고 하십니다. 나를 의지하라고 하십니다. 믿고 의지하고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에서 우리를 향하여 요구하시는 주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재로 기독교의 믿음은 우리의 실생활의 환경까지도 지배합니다. 우리 영혼구원에만 매달려 있는 믿음은 실생활의 환경에 지배를 당해 버립니다. 진짜 기독교의 믿음은 우리의 환경을 지배해 버립니다.
더 나아가서 기독교의 믿음은 우리의 생각을 지배해 버립니다. 우리의 생각이 믿음을 지배하면 안 됩니다. 내 생각에 지배당해 버리는 믿음은 작은 믿음입니다. 내 믿음이 생각을 지배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악한 사탄의 생각과 성령의 생각이 공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목회를 하면서 교인들을 보면, 이렇게 사탄의 생각에 붙잡혀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령이 완전히 우리를 지배해야 합니다. 사탄의 생각, 사탄의 활동이 우리 속에 침투해 오지 않도록 우리의 믿음을 확대시켜야 합니다. 할렐루야!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는 목적이, 영혼구원은 분명하게 확실하게 해 놓고, 조금, 약간 확대되기는 했는데, 내 믿음이 병 고치는데 집중합니다. 아니면 내 믿음이 사업에 성공하거나, 축복을 받는데 집중합니다. 아니면, 내 소원을 이루고, 내 성공을 위한 한 곳에 집중합니다. 이것도 작은 믿음입니다.
여러분, 큰 믿음은 내 영적, 육적세계로 넓혀나갑니다. 내 인생전체로 확대시켜 적용해 나갑니다. 예를들어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1:17-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 말씀은 믿음이 확대되어 전인적(全人的) 삶에 적용되어 나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이 부어지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발견하게 되고, 내 영의 눈이 밝아져서 확실하게 보게되고, 그리고 내가 부름받은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되고, 또 하나님이 주신 내 기업의 기업의 풍성함, 영광스러움을 알게 되도, 또 내 믿음이 더 커져서 나에게 베푸신 능력과 그 능력이 지극히 큼을 알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구원에만 머물러 있는 믿음이 되지 말고, 영적세계의 깊이 바라보며 체험하는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쉽게 표현하면, 구약시대의 성막을 보면 네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일 바깥에 있는 것이 바깥마당입니다. 이곳은 일반백성들만 올 수 있습니다. 두 번째가 안 마당입니다. 여기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들어옵니다. 여기는 세마포 휘장 안입니다. 여기는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습니다. 세 번째가 성소입니다. 여기는 제사장만 들어옵니다. 여기는 떡상도 있고, 일곱 촛대도 있고, 향단도 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가 지성소입니다. 여기는 하나님의 속죄소인 법궤가 있습니다. 여기는 대제사장만 들어 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의 신앙상태가 이렇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막은 내 심령 속에 심령성전이 세워지고, 내 심령이 최고의 신앙, 지성소의 신앙으로 들어가야 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바깥마당의 신앙으로는 그 이상을 모릅니다. 이 바깥마당의 신앙이 구원에만 국한되어 있는 신앙입니다. 더 이상의 깊은 영적세계는 모르는 것입니다. 한 번도 그 안으로 들어간 본 일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의 신앙의 깊이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마당의 신앙도 바깥마당의 신앙보다는 더 낫지만, 그 이상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성소의 신앙이 있습니다. 이 성소의 신앙도 그 다음의 단계 지성소에 한번도 안 들어 가 봤기 때문에 지성소의 신앙은 모르는 것입니다. 물론 바깥마당, 안마당의 신앙보다는 낫지만, 지성소의 신앙보다는 낮은 신앙입니다. 최고의 신앙이 지성소의 신앙입니다. 최고의 신앙은 법궤 앞에서 하나님을 마주 대하는 신앙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신앙입니다.
사도바울도 (고후12장)에서 셋째 하늘의 신앙을 체험합니다. 셋째 하늘의 신앙을 체험해 보지 않은 신앙은 최고의 신앙, 최고 경지의 셋째 하늘의 신앙을 모르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한번만 살짝 말할 뿐입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봐야 셋째하늘의 신앙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셋째하늘의 신앙이 있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17장과 마가복음9장에 보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가서 신비한 것을 체험합니다. 예수님이 신령한 몸으로 변모되어 구약의 위대한 인물인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는 것을 보게됩니다. 너무너무 황홀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여,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님이 원하시면, 내가 여기에 집을 세 개 짓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를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겠습니다.” 그리고는 홀연히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제자들은 이 소리를 듣고 엎드리고, 심히 두려워 했습니다.
이후 예수님은 산을 내려 오시면서 세 제자에게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라고 하셨습니다. 말해봐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음에서 바깥마당에 머물러 있지 마십시오. 영혼 구원만을 위한 믿음이 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전 생애, 전체적인 삶에 적용시키십시오. 더 나아가 우리의 인격과 전인적인 삶, 육적인 삶을 벗어난 영적인 삶, 영적인 세계까지 적용시키십시오. 얄팍한 믿음에만 머물러 있지 마십시오. 할렐루야!
그러므로 기독교의 믿음을 나의 모든 삶의 전반에 적용하십시오. 나의 영혼구원에만 만족하지 말고 이 진리를 깨닫고 이 진리를 우리의 모든 일상생활에 적용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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