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산상복음

44.[산상복음44]비판하지 말라(1)

☆ 주님의 머슴 2021. 4. 26. 17:31

주일설교(2016/6/12)-산상복음(44)

비판하지 말라(1)

마태7:1-5 /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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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의 여러 곳을 통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524절에 보면 에녹은 365세를 살았는데, “하나님과 동행했는데,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이 있지 아니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라는 말은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없지만, 외경인 묵시문서에는 에녹서가 있습니다. 이 에녹서에는 에녹이 하나님이 데리고 가시기 전에 평소에 하나님과 동행한 삶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특히 그 중에 하나님 나라에 갔다 온 이야기,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 천사의 이야기, 메시야의 이야기, 앞으로 전인류가 멸망할 것에 대한 이야기, 아담부터 메시야시대까지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 등등 많은 것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에녹이 천사의 인도를 받아 천상의 세계, 땅 위, 땅 아래의 세계를 여행하면서 사람의 사후와 미래세계까지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녹의 365세에서 태양력의 1년이 365일로 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평소에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신비로움과 천상의 세계, 하나님 나라를 미리 당겨서 경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 온 이야기를 합니다. 이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 온 이야기를 외경 중에 바울계시록 이라는 책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만 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행전을 다 기록했습니다. 베드로 행전, 요한행전, 바울행전, 안드레 행전, 도마행전, 빌립행전, 마태행전, 마가행전, 바돌로매 행전, 야고보 행전, 다데오 행전 등, 그 외에도 많습니다. 이런 행전들을 보면, 이들이 주님과 어떻게 동행하면서 살았는지를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예를 들면, 요한행전을 보면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기 전에 로마의 도미티아누스황제의 귀에까지 에베소에는 요한이라는 예수의 제자가 있는데, 이 사람 때문에 기독교의 가르침이 계속 퍼져 나간다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도미티아누수황제가 특명을 내려 사도요한을 잡아 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로마로 호송되어 갔습니다. 황제 앞에 선 요한에게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빈정 되면서 말합니다. “네가 나의 제국은 곧 멸망하고, 나 대신 예수가 지배하게 된다고 말했던 요한이냐?” 요한은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직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많은 기간 동안 당신과 당신의 후예들이 다스릴 것입니다. 그러나 지상에서 그 때가 되면, 하늘에서 영원하고 진실하신 왕,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이 오시고, 그분에게 모든 국민과 민족이 찬양을 돌리고, 그 분에 의하여 온 지상의 권력과 권위가 무력화 될 것이며, 이 분이야 말로 큰 권능의 주요, 영과 육의 왕이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말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증명할 무엇이 있느냐? 나는 말만하는 것은 믿지 않는다. 그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보여 다오그래서 요한은 당장 먹으면 죽을 수 있는 독약을 가져 달라고 합니다. 그 독약 사발을 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큰 소리로 기도 한 후에 마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죽지 않는 겁니다. 그 때 황제가 독약을 가져 온 자들에게 화를 막 냅니다. “더 독한 독약을 가져 오느라” “이것보다 더 독한 독약은 없습니다. 이것은 최고의 독한 독약입니다그 때 사도요한이 말합니다. “죄수 중에 한 명을 데리고 와서 이 독약을 먹게 하십시오.” 죄수 한 명을 데리고 옵니다. 요한은 그 그릇의 독약을 땅에 붓고, 그 독약그릇을 물로 씻은 후 그 씻은 물을 그 죄수에게 마시게 합니다. 그 죄수가 마시자마자 숨어 끊어져 죽어 버립니다.

그 때 다시 사도요한이 황제에게 말합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여, 제 부탁을 하나 들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살인자가 되고 맙니다. 이 독약을 먹고 죽은 죄인을 살려주면, 이 사람을 해방 시켜 주시오황제가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기도한 후 그 죄수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웁니다. 그리고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는 가시오. 오늘 당신을 감옥과 죽음에서 구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오

그 때 마침 황제의 여자 노예 중에 간질로 쓰러진 노예가 있었는데, 황제가 그도 고쳐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이 손을 잡고 주님께 기도한 후 일으켜 세우니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내가 너를 에베소로 다시 돌려보내면 황제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니 잠시 밧모섬으로 유배를 가라하면서 사도요한을 밧모섬으로 유배를 보냅니다. 요한계시록은 바로 그 밧모섬 유배지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해 주셨던 하나님의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간증집 중에 일본의 어느 자매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자매는 노처녀인데, 시집은 안 가고 예수님과 함께 산다는 겁니다. 늘 예수님과 손 잡고 다닌다고 그러고, 잠잘 때도 예수님과 함께 잠 잔다고 그러고, 길을 걸을 때도 예수님의 손을 잡고 걷는다고 하면서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는 것처럼 해서 다니는 겁니다.

교회 담임목사님이 시집가라고 하니까, ‘나는 예수님과 결혼했기 때문에 시집 안 간다고 합니다. 길을 갈 때도 예수님과 함께, 일을 할 때도 예수님이 옆에 계신다는 겁니다. 밤에 잘 때에도 예수님과 함께 잠을 잔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루는 담임목사님이 진짜인지 시험을 해 보려고, ‘그럼 오늘 밤에 예수님이 오시거든 한번 물어봐라. 내가 총각 때 큰 죄를 지었는데, 그것을 예수님이 아시는지 한번 물어 보라고 했습니다. 몇 일 후에 자매님이 목사님을 찾아 가서 내가 예수님께 물어 보았거든요,’ ‘그래서 뭐라고 하시든?’ ‘예수님이요, 목사님이 옛날에 죄 지은 것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고 하시든데요그 말은 들은 목사님은 무릎을 꿇고 통곡하면서 울었습니다. 그리고는 자매님을 향하여 너가 나보다 낫다. 나는 목사인데도 주님과 늘 동행하지도 못하는데, 너는 나보다 낫다. 그리고 늘 옛날에 지은 죄를 예수님이 용서해 주셨을까? 하면서 의심도 했는데, 내가 회개하고도 확신이 안 왔는데, 너는 나보다 낫다.’ 하면서 울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지나간 죄들은 예수님이 기억 안 하신다는 말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기독교는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여러분, 산상복음 전체는 이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동행하는 삶의 가장 중요한 원리 중에 하나가, 우리는 늘 하나님의 눈앞에서 행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 하시는가가 입니다. 하나님이 늘 위에 계시고, 나를 늘 보신다.라는 의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은 여행이요, 순례길입니다. 이 삶에는 최종 목적지가 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의 결정은 최종 목적 앞에서 결정 납니다. 우리는 늘 그 최종 목적지를 향해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 이것을 기억하고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나타나는 문제꺼리의 절반이상은 이생과 이 세상만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고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항상 영원한 삶을 의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믿지 않는 자들은 영원한 미래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유일한 세상은 이 세상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을 위해 살며, 이 세상은 그들을 통제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이 세상은 잠간 있다가 지나가는 일종의 예비학교일 뿐입니다. 기독교인은 자기가 하나님의 존전에서 행하며, 그가 언젠가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 있다는 것과 이 생각이 그의 모든 생활을 결정하고 조종해야 한다는 것을 항상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은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시며, 늘 보고 계시며, 동행하고 계심을 믿고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은 사람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과 관계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맞추어 이 땅을 살아갑니다. 항상 하나님의 존전에서 행하고, 살고, 의식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혼하기 전에는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중심의 삶을 살지만, 결혼하면 아내나 남편을 의식하게 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자식이 생기면 항상 전 가족을 생각하게 되고, 의식하게 되고, 무언가 결정을 해도 내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생각하게 되고, 가족 중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내 마음대로 살았지만, 예수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면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고, 교회를 생각하게 되고, 주님과의 관계를 의식하게 됩니다. 동행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본문에서 비판하지 말라 라고 하십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남을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을 늘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이 보시고 계신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신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라고 하나님을 늘 의식하는 자들은 남을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판 이라는 말은 판단, 심판 이라는 뜻입니다. 헤아림 이라는 말은 측량하다. 재다. 무게를 달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비판이나 헤아림은 비슷한 뜻으로 상대방을 비판하고, 판단,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자라는가, 부족한가를 탐색하고 무게를 달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판헤아림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우리 신앙생활과 이 사회생활에 적용해 보십시오. 반드시 우리 기독교인은 이 비판과 헤아림두 가지로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반드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비판하고 헤아려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전혀 비판하지 말라. 헤아리지 말라.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예외조항이 있다는 말입니다. 무조건 100% 비판하지 말고, 헤아리지 말라 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를들어 6절에 보시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거룩성, 우리의 진주인 복음을 개나 돼지 한테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겉으로는 모릅니다. 개와 돼지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가운데 개와 돼지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룩한 것과 진주를 개와 돼지에게 주지 않으려면, 판단하고, 헤아려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전라남도 신안군의 한 섬의 여교사 성폭력 사건의 주범들이 이웃집 아저씨들이 잖아요? 겉으로는 그 속에 개와 돼지가 들어 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언제 어느 시에 개와 돼지로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늘 경계하고, 판단하고, 헤아려야 되는 것입니다.

 

15절이하를 보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삼가라는 말은 주의해라, 경계해라. 는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거짓 선지자들, 즉 사이비, 이단들을 삼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했으니,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가, 나쁜 열매를 맺는가를 늘 헤아리고, 경계하고, 판단해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사, 기독교역사를 보면, 이 헤아리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단으로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기독교의 교리를 치켜내고, 교회를 지키고, 말씀과 성경을 지키고, 오늘의 기독교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을 지키고, 진리를 지키고, 내 신앙이 변질되지 않고, 이단 사슬과 죄악에 매이지 않게 되는 것은, 이 판단하고, 비판하고, 헤아리는 일을 잘했기 때문에 신앙을 지키고 내가 변질되지 않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우리도 진리와 비진리을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망치는, 우리의 신앙을 변질시키고 빼앗아가는 악의 세력, 사탄의 세력을 판단하고 헤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 말이 사탄의 말인지, 믿음으로 하는 말인지, 저 말은 자기가 만든 말인지, 다른 사람의 말인지, 사기인지, 거짓인지, 참인지 분별해야 됩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또 하나의 판단과 헤아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비판하지 말라라고 하시는 것은 정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남을 정죄하면서, 반대편으로 극단적으로 몰아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나와 의견이 맞지 않거나, 나와 같은 편이 아니거나, 나의 주장을 지지해 주지 않으면, 나를 반대하는 자라고 보고, 가차 없이 잘라버립니다. 정죄하고, 함께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나라가 그렇습니다. 내 편이 아니고, 나를 동조해 주지 않거나, 나와 같은 생각, 사상이 아니면 적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백이냐, 흑이냐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나하고 다르면 무조건 배척하고, 죽이고, 원수가 되어 버립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못하게 하고, “못한다. 차라리 하지 마라없던 것으로 백지화 시키려고 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못하게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북이 나뉘고, 동서가 나뉘고, 좌우로 나뉘고, 정치, 사회 모든 것이 나뉘고 있습니다.

 

교회에도 보면, 회의하다가 내 의견대로, 내 주장대로 안 받아 들이면, 끝까지 반대하고, 회방을 놓고, 못하게 계속 반대로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시대에는 주로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극단적으로 치달려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말씀도 바리새인들을 의중에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과 다르게 생각하거나 다르게 행동하면 다 반대하고, 정죄하고 배척했습니다.

요한복음 87절에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향하여 돌로 쳐 죽이려고 하는 것을 보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하셨습니다. 정죄하는 모습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짓는 죄 중에 가장 많은 죄가 이렇게 남을 정죄하는 죄라고 합니다. 남을 비판하고, 편 가르고, 남을 정죄하는 일을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망치고, 우리 속으로부터 행복을 빼앗아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막대한 피해를 끼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도 막대한 피해를 끼칩니다. 하나님의 복음 전파에도 피해를 줍니다. 교회를 분열시키고, 교회 공동체가 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여서 다른 사람을 욕하거나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마십시오. 특히 누구한테 들은 것을 -확인되지 않은 것- 이야기 하면서 정죄하고 비판하지 마십시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판하고, 정죄하는 뒤에는 정죄의 영, 비판의 영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의 장난입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 비판, 정죄 자체는 일종의 악한 영의 활동입니다. 특히 자기는 옳고, 의롭고, 다른 사람은 나쁘다고 생각하는, 자기 의 (self-righteousness) 때문입니다.

여러분, 비평비판의 차이가 뭡니까? 비평은 상대방을 더 좋게, 더 좋은 방향으로 그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판은 점점더 나쁘게 그 사람을 망하게 하고 죽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적 세계의 신비를 아십니까? 우리 기독교인은 영적세계를 인정하고, 영적세계의 신비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100% 영의 영향을 받습니다. 문제는 좋은 영의 영향을 받느냐?’ 아니면 나쁜 영의 영향을 받느냐?’ 인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영, , 육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혼이 중요합니다. 혼의 기능에는 생각의 기능, 느낌의 기능, 결단의 기능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 , 의 기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나쁜 영을 가진 사람을 만나, 계속해서 그 사람의 말을 듣게 되면, 그 사람의 영이 나의 지, , 의를 만져서 결국 내가 그 사람의 사람이 되어 버리고, 그 사람처럼 따라 살게 되고, 그 사람의 말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영도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의 영이 들어와 내 영과 연합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대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좋은 영, 하나님의 영, 성령을 충만하게 받은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말을 듣게 되면, 그 사람의 영이 나의 지, , 의를 만져서 내가 결국 그 사람처럼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내 영이 그 사람의 영향을 받아 나도 성령의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기독교 2,000년의 역사에 성령에 붙잡힌 사람들은 다 이런 사람들입니다. 오늘 여기에 있는 여러분과 저는 다 이렇게 누군가의 영향을 받아 내가 그리스도인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만나, 예수님의 말씀에 영향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누구든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들고, 성령을 가진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영향을 받아 오늘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만약 나쁜 영, 악한 사탄의 영을 가진 자가 나에게 접근하여 나에게 나쁜 영을 심기 위해 활동하고, 내 지, , 의에 영향을 주어 나를 자기의 사람으로 만든다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끔직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말을 듣지 마십시오. 나의 믿음을 해치는 말은 듣지 마십시오. 남을 비판하는 것이 들어 있는 말은 듣지 마십시오. 이것은 나쁜 영, 악한 영의 활동입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누구도 여기를 피해 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말한 것부터, 행한 것까지 다 심판을 받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도 비판을 받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도 비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12: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12: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 말에 대한 심판입니다.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 행위에 대한 심판입니다.

 

우리 주님도 우리를 향하여 나도 너희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도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의 의를 의지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함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정죄를 통과한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며, 그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십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