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산상복음

46.[산상복음46]영적 판단력과 분별력

☆ 주님의 머슴 2021. 4. 26. 17:35

주일설교(2016/6/26) - 산상복음(46)

영적 판단력과 분별력

마태7:6

366, 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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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판단력과 분별력이 있어야 하는 시대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사기치고, 거짓으로 유혹해서 돈을 빼가고, 상품을 팔아먹는 시대입니다. 며칠 전에 TV를 보니까, 헬스클럽을 개업하면서 최고수준의 헬스기구들을 넣고, 회원을 모집해서, 어느 정도 자기들이 원하는 회원이 모집되면, 고의로 폐업을 해버리고는 업주가 점적을 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또 다른 지역에 가서 또 개업을 해서 회원을 모집해서 어느 정도 인원이 차면 또 고의로 폐업을 해 버립니다. 이런 방법으로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노인들을 상대로 만병통치약으로 광고해서 건강보조제를 팔아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기에 걸려들어서 전 재산을 날리고, 알거지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요즘 제주도에 실버 관광이라고 해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아서 저가로 제주도 관광을 시켜드리고, 제주도 유명관광지마다 건강식품을 판매하는 코너로 가서, 건강에 대한 강의를 듣게 하고,- 그것도 노인들이 건강을 지키는 비결, 병들지 않고 오래 오래 장수하는 비결, 특히 노인들의 성생활에 대한 비결과 특효약(이 부분에 대해서는 노인들이 관심이 많아서 건강식품을 다 산답니다.) - 물건을 강매하는 경우가 너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보이스피싱이 점점 지능이 발달해서 아직도 보이스피싱에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회 구석구석에서 이런 거짓과 사기성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간판을 달고, 기독교라는 탈을 쓰고 사기를 치는 이단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단에 들어간 사람들의 대부분은 처음에는 이단인 줄 모르고 들어간 자들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성경연구원이라고 해서 다 성경을 가르치는 연구원이 아니고, 신학연구원이니, 신학연구소라고 해서 다 신학연구원 아닌 것입니다. 무인가신학교가 얼마나 많고, 이단들이 그럴듯하게 붙여 놓은 성경연구원이나 신학원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단들이나 사이비단체에 있는 사람들이 잘 사용하는 말이 사도 바울이 신학교 졸업했습니까?’ ‘예수님이 신학교 졸업했나요?’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주 무식한 억지입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라고 다 장로교가 아니고, ‘침례회라고 다 침례교가 아닙니다. ‘순복음이라고 다 순복음교회가 아닙니다. 이단들이 자기들의 정체를 숨기려고 기존의 교단들의 간판을 붙이고 교인들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단들은 처음부터 이단냄새를 풍기는게 아닙니다. 처음에는 정통기독교 교리와 똑같습니다. 끝에 갈수록 조금씩 달라져서 끝에 가면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단(異端)”이라는 말은 끝이 다르다라는 뜻입니다. “사이비겉으로는 비슷하나 본질은 완전히 다른 가짜라는 뜻입니다. 사이비 기독교는 겉으로는 기독교처럼 보이지만 속에는 예수를 이용해서 거짓 교리를 퍼뜨리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생긴 기독교 이단들은 이단과 사이비가 합쳐져 있습니다.

 

저희 교회가 속해 있는 교단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입니다. 이단, 사이비와 구분하기 위해서 교단 마크를 사용합니다. 녹색바탕의 두루마리 모양의 한반도 지도 위에 붉은 십자가를 새겨 넣었습니다. 그리고 각 지방의 노회와 시찰회에서 우리교단에 속해 있지 않은 교회가 이 마크를 사용하고 있는지 늘 감시합니다. 만약에 우리교단에 속해 있지 않은 어떤 교회가 이 마크를 사용하면, 법적으로 제재를 받습니다. 이것은 이단, 사이비 단체가 우리 교단 안에 붙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판단력과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거짓과 사기꾼들에게 말려들지 않으려고 그렇게 해야 한다면, 하물며 이 시대를 살아야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육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영적으로도 판단력과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전도를 떠나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10:16) 고 했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기독교의 복음, 진정한 하나님 말씀, 진리를 들으려고 애를 쓰십시오. 성경의 말씀을 벗어나 재미 있게만 하고, 세상적인 이야기, 세상지식, 철학, 윤리,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인생 이야기만 늘어놓는 설교를 듣기보다, 성경을 통해 주님이 전하기를 원하는 복음의 말씀을 들으려고 애를 쓰십시오. 할렐루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라라는 말씀을 하시고난 후,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라고 하십니다. 앞에 5을 보면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두 말씀을 합쳐서 보면, 내 눈 속에 들보(통나무)를 빼지 않고는 상대방이 개와 돼지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않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않으려면, 개와 돼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개와 돼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영적 분별력을 길러야 합니다.

 

여기서 거룩한 것진주복음의 진리를 말합니다. 기독교의 메시지, 천국의 메시지를 말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를 믿지 않는 불신자에게 제시하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불신자들에게 기독교의 진리를 제시하지 않으면, 그들이 어떻게 예수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개는 이스라엘 땅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개가 아닙니다.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 같은 것이 아닙니다. 개는 마을의 썩은 고기를 먹는 짐승이요, 들개와 같은 성격의 개입니다. 사납고 위험한 반()야생동물입니다. 그리고 돼지는 유대인들에게 불결하고, 울타리 밖에 있는 모든 것을 표상(表象)합니다.

 

개와 돼지 라는 이 두 말은, 사람을 분별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해 사용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복음을 들고 있는 자들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거룩한 것이고, 진주와 같은 보물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 거룩한 진주를 들고 있습니다. 이것을 아무렇게나 취급하지 말고, 아무에게나 던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기독교의 진리가 거룩한 것이요, 진주와 같은 보물인 것을 아는 자만이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44이하에 보면 예수님이 밭에 감추어진 보화, 값진 진주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여기서도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기독교의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보화요, 값진 진주인 것을 아는 자만이 그 값어치를 알고,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그것을 사는 것입니다. 복음의 값어치, 진리의 값어치를 아는 자만이 기독교인인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복음은 그렇게 값어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보다 시시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하늘의 보화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와 돼지는 진리의 값어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복음 앞에 개와 돼지는 행동하는 것을 보면 압니다. 복음을 아주 경멸합니다. 멸시하고 시시하게 대합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아주 정확하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발로 밟고, 돌이켜 (복음을 제시하는)너희를 찢어 상하게 한다.” 라고 하십니다. 복음도 발로 밟아버리지만, 전하는 자도 박해하고 찢어 상하게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를 멸시합니다. 시시하게 여깁니다.

 

개와 돼지의 특징이 뭡니까? 물고, 찢고, 밟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아무리 복음을 제시해도 변화가 안 일어납니다. 끝까지 고집스럽게 그대로 갑니다. 초지일관 변화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돌이켜 찢고 상하게 합니다.

아마 대표적으로 예수님시대에는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 헤롯당파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아마도 이런 사람들을 염두해 두고 하시는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가 사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을 똑같이 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대하시는 방법을 보면, 우리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대할 때와 니고데모를 대할 때와 사마리아 여인을 대할 때는 전혀 다르게 대했습니다. 나다나엘을 대할 때는 그를 그대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의 고민을 아시고 그 고민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요,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1:47).” 라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니고데모에게는 그가 밤에 찾아 왔기 때문에, 그 마음의 고민을 꽤 뚫어 보고, 진리가 무엇이며, 구원의 길이 무엇이며, 죄가 무엇이며, 성령이 무엇이며, 하나님 나라에는 어떻게 들어가는지, 니고데모가 학자였기 때문에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사마리아여인에게는 유대인에 대한 삐딱한 마음과 여러 남자들에게 버림받고, 여러 사람들에게 왕따 당한 것 때문에 마음에 깊은 상처가 있음을 알고, 그녀와 토론을 피하고, 그녀의 영혼구원에 초점을 맞춥니다.

세리와 창녀를 대할 때는 함께 식사도 하면서, 그 영혼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너희도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사두개인을 대할 때는 아주 책망했습니다.

 

특히 누가복음 233절과 9을 보면, 빌라도와 대면할 때는 묻는 말에 대답을 합니다. 그러나 헤롯왕 앞에서는 전혀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무시해 버립니다. 빌라도를 대할 때는 빌라도에게 궁금증 유발시킵니다.

요한복음1833절이하에 보면, “네가 왕이냐?” “그래 네가 말한대로 내가 왕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나는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러 왔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진리가 무엇이냐?” 십자가를 앞두고 재판을 받고 있는 예수님이 이방인인 빌라도에게 진리를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스스로 진리를 찾아 발견해 가도록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마 빌라도는 이방인이고, 로마의 권력자였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가 하나님을 발견하고 진리를 깨우치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훗날 빌라도가 친구들이나 로마에 보낸 편지에 보면, 빌라도는 예수에 대해서 굉장한 관심이 많았고, 궁금한 것도 많았고, 예수에 대해 호의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이요, 유대 율법에 대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는 아주 가깝게 지내고 친분이 있었던 헤롯왕과 대면했을 때에는 묻는 말에 전혀 대답하지 않고, 철저히 무시해 버렸습니다. 상대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도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님처럼 했습니다. 예를들어 사도행전 1346절 이하를 보시면,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반박하고, 비방하며 대적합니다.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담대히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바울은 그들에게는 더 이상 말씀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거룩한 복음의 진리를 거부하는 그들에게는 더 이상 계속해서 복음을 제시해 주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사도행전 186에 보면, 바울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라고 담대히 전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방해했습니다. 대적했습니다. 말씀을 전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했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니, 수 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힘써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고린도 교회인 것입니다.

 

그 다음 바울은 에베소로 갔습니다.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유대인 회당에서 석 달 동안 담대히 말씀을 전합니다. 거기도 대적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을 비방했습니다. 더 이상 거기서 말씀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 바울을 비방하고, 바울을 대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따르는 자들을 데리고 나와서 두란노 서원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여기서 2년 동안 날마다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교회가 에베소 교회인 것입니다.

 

여러분, 개와 돼지는 말씀의 가치를 모릅니다. 복음의 가치, 진리의 가치를 모릅니다. 그들은 복음의 가치, 말씀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그 말씀을 짓밟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이켜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향하여 대적하고, 비방하고, 찢고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개와 돼지는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이방인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 믿지 않는 자, 예수 모르는 세상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세리나, 창녀나, 죄가 많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복음의 말씀, 기독교의 원색적인 진리의 말씀, 예수님이 전하고 싶어 하시는 복음을 믿지 않고, 받아 들이지 않고, 오히려 대적하고, 멸시하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 복음의 가치를 몰라서 짓밟고 전하는 자들에게 대적하고, 비방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개와 돼지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시대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헤롯당파와 특히 율법학자라 불린 서기관들이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든 시대에는 가는 곳마다 반대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 개와 돼지가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도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 이라고 하는 자들 속에도 있는 것입니다. 대구의 어느 큰 교회에 목사님이 고백하기를 주일에 성령에 대해서 시리즈로 설교했더니, 장로님들 중에 성령 설교는 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설교하면서 종말을 설교했더니, 그런 설교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복음의 가치, 성경의 가치를 모르고, 전한 말씀을 짓밟고, 전한 자에게 돌이켜 찢고 상하게 하는 자들이 개와 돼지인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에 있는 말씀, 사건,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성경 66권 전체를 믿지 않습니다. 이들은 내 마음에 드는 말씀만, 내 생각과 사고로 이해되고, 내 정서에 맞는, 듣기에 좋은 말씀만 받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이 본문 말씀을 우리가 중요하게 기억해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아주 중요하게 우리에게 알아라’, ‘깨달으라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오늘 본문 말씀은 인간의 죄가 얼마나 가공스러운 영향을 주며, 무서운지, 인간이 타락하면 어떤 현상을 일으키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타락의 결과로 사람에게 온 죄와 악의 결과는 사람을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개와 돼지로 만들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성에게 끼친 죄의 결과가 이런 것입니다. 죄는 사람에게 진리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8:7)고 했습니다. 이것이 개와 돼지의 성품입니다. 개와 돼지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육신의 생각을 먼저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육신의 생각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미워하게 하며,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자를 디도서 33절에서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않는 자요, 속은 자요, 여러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가증한 자요, 피차 미워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제시해 보십시오. 그들은 으르렁거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보혈과 성령의 역사를 이야기해 보십시오. 그들은 비웃고, 조롱하고, 침을 뱉고, 밟아버립니다. 죄가 사람에게 주는 영향이 이와 같습니다. 죄가 사람의 성품에 이런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죄가 사람의 깊은 곳과 중추부(中樞部)에 까지 침투해 들어가 사람을 가증스럽게 만들고, 하나님과 진리에 대하여 철저하게 적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우리에게는 이런 죄의 찌꺼기가 없겠습니까? 우리 속에 이런 죄의 DNA가 없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는 해당되는 말씀이고, 나 한테는 해당이 안 되는 것입니까? 우리에게는 진리의 말씀에 거부 반응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우리도 사탄과 죄의 지배 아래 있으면서 마귀의 속임수 아래에서 그 속임수를 모르고 살지 않습니까? 죄가 나를 비틀어서 오염시켜서, 나의 영이 반응하지 못하고 죽어 있지 않습니까? 내 속에 있는 복음의 진리, 거룩한 진주가 진가(眞價)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복음 앞에 반응해야 합니다. 진리 앞에 내 심령이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생활 속에서 복음의 진리를 짓밟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복음의 가치를 모르고, 돌이켜 복음을 짓밟고 찢어 상하게 하려고 하는 자들과 토론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헤롯왕에게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상대해 주지 않았던 것처럼 토론하지 마십시오. 대화하지 마십시오. 오직 이들에게 말을 해야 한다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 예수만이 우리의 구원주요, 예수만이 우리의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다는 것, 인간이 예수로 말미암아 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만 말씀하십시오.

 

특히 이단, 사이비와는 토의하고 논쟁하지 마십시오. 특히 따지고 달려드는 자들과는 대화하지 말과 입을 굳게 다무십시오.

 

여러분, 우리 성도는 복음의 진가(眞價)를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시시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내 마음에 들고, 듣기에 좋은 말씀만 들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내 마음에 속속 드는 말씀만 진리가 아닙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고, 듣기 싫은 진리도 있습니다. 모든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