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2016/7/3) - 산상복음(47)
구하고 찾으라
마7:7-11
36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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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만큼 혼탁하고, 미래가 불안한 시대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시대만큼 악하고, 범죄가 최고조로 달했던 시대도 없습니다. 아침 조간신문을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모든 면에 희망을 주는 소식, 긍정적인 소식, 삶을 약동케 하는 소식보다는 불안케 하는 소식이 더 많고, 불안케 하는 소식을 먼저 접하고,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중에는 아침에 신문을 보지 않고, 아무 뉴스라도 듣지 않고 하루를 출발하는 것이 하루를 평안하게 시작하게 해 준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TV와 신문을 펴면 범죄소식부터 먼저 들려오고, 사회를 불안하게 하는 소식이 먼저 들려옵니다. 제가 보면서 참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뭐냐 하면, 지금 도시 도로마다, 골목마다, 구석구석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거기다 개인 집, 상가, 개인승용차, 시내버스, 택배트럭, 온통 감시카메라입니다. 그런데도 성폭력, 강도, 살인이 계속 일어납니다. 요즘은 범죄수사는 CCTV 증거물에다가 과학수사까지 동원하여 거의 다 잡히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침에 나가 시내 볼 일을 보고 집에 들어오면, 내가 어디에 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내가 돌아다닌 행로가 다 추적되는 것입니다.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을 가던, 어디를 가던 CCTV에 다 찍히는 것입니다. 내가 내 차로 운전을 해서 가던, 버스를 타던, 기차를 타던, 비행기를 타던 다 찍히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범죄를 저지르면 안 집힐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자기는 안 잡힐 것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굳건한 믿음을 가지는 것 같해요. 우리보다 믿음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사는 시대는 평안을 주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불안과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는 시대입니다. 미래가 불안한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오늘 읽은 말씀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고, 기분 좋게 하고,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미래를 꿈꾸게 하는 말씀이요, 미래를 내다보고 살아가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게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7)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여러분! 이 말씀은 주님의 절대적 약속입니다. 우리 주님이 권위를 가지고 직접적으로 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것에는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이것은 절대적 약속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삶에는 세상적인 삶과 반대되는 성경적인 삶이 있습니다. 예수님 믿는 성도는 성경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사고도 성경적인 사고를 가지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성경적인 사고, 성경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인생관은 삶 그 자체가 여행입니다. 여행하는 인생에는 난처한 일과 골치 아픈 문제들이 많습니다. 이 여행의 삶에는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마주쳐 오는, 우리가 다루어야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적인 인생관은 앞에 놓여 있고, 닥쳐오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맞이하는 너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 라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삶에 대한 대표적인 샘플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우리의 “믿음의 조상”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성경은 하나님께 부름 받았을 때,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11:8)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도의 인생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 가는 것”입니다. 앞날에 대해, 자기 인생의 삶을 다 알고 나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성도는 순종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지만, 항상 하나님이 함께 동해했습니다. 항상 그의 곁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늘 곁에 계시면서,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한번도 가보지 않은 땅, 가나안,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 가나안 땅을 향하여 순종함으로 갔습니다. 불확실하지만, 아브라함은 행복했습니다. 평화로왔습니다. 두렵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과 닮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가장 믿었던 제자들마저도 두려워하여 그를 떠나버리고, 그들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일에만 급급할 때, 예수님이 이것을 미리 아시고,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16:32).” 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이 이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삶을 변화시키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어려움과 시련과 문제와 환란을 제거해 주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장미가시를 다 제거해 버리고 장미꽃과 향기만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삶을 현실적으로 부딪치며, 이것들을 이겨내기를 원하십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놀라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확신하라는 것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성경 전체에 골고루 퍼져 있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내가 원하고 소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말씀을 자동판매기나, 무엇이든지 원하면 다 생기는 도깨비 방망이쯤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이 본문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겠다고 보증하신 약속보다도 사실은 훨씬 더 큽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향하여 먼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한가를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는 믿음은 내가 부족함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것은, 왜 우리가 구하는데도 받지 못하며, 찾는데도 왜 찾지 못하며, 왜 두드리는데도 왜 열리지 않는가?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어째서 그렇게 연약하냐? 어째서 그렇게 빈궁하냐? 어째서 그렇게 그 모양이냐? 어째서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지 못하느냐? 어째서 그렇게 문이 열리지 않고, 구하는 대로 얻지 못하고, 찾지 못하느냐? 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는 말씀인 것이다. 이것이 주님이 여기에 기록하고 우리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의 목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도 믿음이 있다고 하고, 기도한다고 하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데 왜 얻지 못하고 찾지 못하고 열리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는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진짜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모릅니다. 무엇이 필요한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작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진짜 가난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진짜 가난하고, 진짜 죄인임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죄는 자기가 부족하다는 사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 자기가 가난뱅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자기가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난하다고 하면 오히려 모욕을 당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애절하지 않습니다. 갈망이 없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기서 강조하시는 말씀은 우리가 궁핍을 의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에 대해 세 마디로 표현했습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려라.” 이것은 조금씩 강도가 높아지는 것을 말합니다. 구하는 것보다 찾는 것이 한 단계 강도가 더 높은 것입니다. 찾는 것보다는 두드리는 것이 더 강도가 높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합치면, 끈기, 끈덕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누가복음 11장 5절이하의 간청의 기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 밤중에 친구가 찾아 왔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친구에게 대접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옆집 친구에게 찾아가서 떡 세 덩이를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옆집 친구는 다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며 떡을 빌려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주님은 간청의 기도를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도 보면, 간청하는 과부, 끈덕진 과부의 비유의 말씀이 있습니다. 과부가 재판장에게 찾아 와서 날마다 간청합니다. 그 재판장이 날마다 찾아 와서 간청하는 그 과부의 요구를 결국 들어 주었다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기 전에 먼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눅18:1)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고난 후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7)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끈덕짐”입니다. 끈질긴 간청입니다. 기독교인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은 간청의 기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싶다면,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만나고 싶고 알고 싶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하시려는 축복을 받고 싶다면, 날마다 끈덕지게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신앙이 없고, 간청의 기도가 없다는 것은 내가 궁핍하지 않다는 것이요, 나에게 필요한 것이 없다는 것이요, 간청할 정도로 답답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지 않기 때문에 받지 못하고, 찾지 못하고, 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믿고 인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9절부터 보면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믿고 인식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땅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좋은 것 주고 싶고, 귀한 것 주고 싶은 것처럼 하나님은 얼마나 더 잘 해주시겠느냐?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안 되면, 모두가 마귀가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정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8:42,44)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면, 다 마귀의 자식이요, 마귀가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11절에 “너희가 악한 자라도” 라고 하십니다. 본성으로 다 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성으로는 부패하고 악합니다. 본성으로 부패하고 악한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입니다. 본성으로는 진노의 자녀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지 않으면, 본성으로는 다 진노의 자녀이기 때문에 원수 마귀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마귀가 나의 아버지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아버지가 될 수 있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장 11,12절에 예수님께서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것은 하나님께로 난 자라고 합니다. 이것을 거듭난 자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들이 지각이 열리며,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다’ 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8:14,15). 우리의 마음에 성령을 부어 주어서 내 입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 성령이 와 계시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면, 또 하나님으로부터 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내 스스로, 내 입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불러만 봐도 그 사랑에 눈물이 나요,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아버지,
온 종일 울어봐도 감당할 수 없는 그 사랑, 그 크신 사랑을 어찌 말로 표현하리,
아버지, 아버지 내 영혼 깊은 곳에서, 불러보는 내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 생명 다하는 그 날까지 지키시고, 인도하실 참 좋으신 나의 아버지,
아버지 생각만 해도 그 은혜에 감사해요, 날 위해 십자가 대신지신 그 사랑,
아버지 그 사랑이 강물처럼 흘러 넘쳐요, 그 크신 사랑을 어찌 말로 표현하리,
아버지, 아버지, 간절히 두 손을 잡고, 불러보는 내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 생명 다하는 그날까지 지키시고, 인도하실 참 좋으신 나의 아버지.“♬
(115번)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나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나를 염려하시고, 나를 돌보십니다. 항상 축복하고 도우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악한 것은 주시지 않습니다. 선한 것만 주십니다.
셋째는, 하나님은 선한 것, 좋은 것, 특히 성령의 은사를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11절). 여기서 “좋은 것”이 뭘까요?
누가복음11장13절에서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주심으로 모든 것을 다 주시는 것이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 모든 은혜, 모든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성령 안에 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1장3절을 보시면,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영혼의 구원을 위한 것, 우리의 완전을 위한 것, 우리의 삶에 가장 귀한 것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바로 알고 구해야 하며,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알고 믿어야 하며, 궁극적으로 내 인생에 가장 귀하고 좋은 것, 성령을 구하고,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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