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산상복음

48.[산상복음48]남을 대접하라

☆ 주님의 머슴 2021. 4. 26. 17:41

주일설교(2016/7/10) - 산상복음(48)

남을 대접하라.

마태7:12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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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을 보통 황금률(黃金律)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산상복음의 가장 중심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한 구절의 말씀이 산상복음 전체(5:17~7:12)를 요약한 말씀입니다.

알렉산더 세베루스 황제가 궁전 벽에 금으로 새겨놓은 데서 '황금률'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나보다 남을 사랑하고,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자기 부정과 비이기적인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는 지를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표현입니다. 산상복음은 마음 그 자체에서부터 그리스도의 통치를 이루어 결국 순종하여 실천으로 이어지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유대교에 유명한 랍비인 샴마이라는 랍비와 힐렐이라는 랍비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이 두 랍비에 의해서 샴마이 학파’, ‘힐렐 학파라는 두 학파가 생기게 됩니다. 한번은 이방인이 먼저 샴마이에 찾아와서 내가 유대교로 개종할 테니 내가 한 발로 서 있는 동안에 완전한 율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때 샴마이는 대답할 말이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이방인을 쫓아 버렸습니다. 그 다음 이 이방인은 힐렐을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방법으로 내가 유대교로 개종할려고 하는데, 내가 한 발로 서 있는 동안에 유대교의 완전한 율법을 가르쳐 달라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때 랍비 힐렐당신에게 싫은 일은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마시오. 이것이 완전한 율법이요. 다른 것들은 모두 그것에 대한 해설서일 뿐이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샴마이는 성품이 대쪽 같고, 율법적이고, 문자적이고, 이방인이 유대교에 들어오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러나 힐렐은 성품이 온화하고, 개방적이고,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기를 원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힐렐과 같은 말을 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도 말하기를 당신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마시오.” 유대인으로 헬라의 철학자인 필로도 네가 원치 않는 것을 그에게 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동양으로 넘어 와서 공자도 자기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하지 말라.” 라고 했습니다.

이것들은 대부분 공통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공통점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이것들의 대부분의 공통점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 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소위 우리는 세상적인 의의라고 말합니다. 소극적인 의의 삶입니다. 세상의 법들이 갖고 있는 정신이 바로 이것입니다. 악을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어려운 일일까요? 쉬운 일일까요? 어쩌면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일은 쉬울 수 있습니다. 반면에 남을 위해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사람을 살리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만은 않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완악하고,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인간들의 마음에 균열을 일으키게 하여, 더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마음을 가지게하여 극도의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인간의 마음에 도전을 주기 위해서 오늘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 면에서 오늘 이 말씀은 크게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관계. 또 하나는 인간과의 관계입니다. 이 두 가지 관계 다 이기적인 관계로 접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36절을 보시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도 보시면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은 구약성경 전체를 말합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이라고 부르지만, 유대인들은 구약성경 전체를 율법과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구약성경 전체를 둘로 나누면, “첫째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에서 대접이라는 단어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대접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대접은 뭘 말하는 것입니까? 받는 겁니까? 주는 겁니까? 주는 겁니다.

대접은 환대하고, 섬기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받는 마음보다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더 강합니다.

누가복음 115부터 보면 밤 중에 자기 집에 찾아 온 친구를 대접하기 위해서 다 잠든 밤중인데, 옆 집 친구에게 찾아가서 떡 세 덩이를 빌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렇게 대접은 수고가 따르는 것입니다. 밤 중에 찾아 온 친구를 대접하기 위하여 다 잠든 밤에 옆집 친구에게 가서 문을 두드리며, 떡 세 덩이를 빌려 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대접이라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대접이 아니고, 마음에 우러나오는 대접입니다.

대접은 받기보다 주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과 관계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받기보다 드리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하나님을 대접하기를 좋아합니까? 신앙생활은 대접이 앞서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믿음이라는 그 중심에 먼저,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시고, “주시옵소서.”의 신앙이 앞서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살이 찢기시고,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 십자가에서 다 주셨잖습니까? 우리의 생명을 구원해 주시고,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내 주시고, 천국갈 수 있는 길을 열을 주셨잖습니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셨습니다. 믿음 없는 자를 믿음 있게 해 주시고,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드리는 삶, 섬김의 예배의 삶을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12절의 그러므로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앞의 말씀에 전제되어 기도의 결과를 설명하는 대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와 대접입니다. 기도와 대접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관계를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알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께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대접해야 기도응답이 일어납니다. 대접을 받고 싶거든, 먼저 하나님을 대접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에게도 격에 맞는 대접이 있듯이, 하나님께도 격에 맞는 대접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별도로 떼에 내어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대접을 받고 싶거든 먼저 대접하라는 뜻으로만 해석합니다. 물론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니지만, 본문 흐름상 보면,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바로 이어서 그러므로라고 하고서 대접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기도는 하나님을 바로 대접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먼저 감동시켜야 합니다. 헌금, 예배, 기도, 찬양, 섬김, 봉사, 모든 것이 하나님께 먼저 대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대접해야 합니다. 이기적으로 받으려고 하는 신앙이 아니라, 드리려고 하는 신앙, 하나님께 먼저 대접하는 신앙이 되십시오. 할렐루야!

 

그러면 두 번째는 인간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의 내용을 다 파악하지 못해도 오늘의 이 말씀만이라도 가슴에 새기고 살면 그 사람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이 랜드 박성수회장이 이 랜드를 창업할 때의 창업정신을 이 마태복음 712절의 이 말씀으로 창업을 했다고 합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대접하라.” 이 말씀 의 특징은 절대적이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남이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기를 원하거나, 나를 사랑해 주기를 원하거든, 내가 먼저 남에게 친절하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옛날에는 사는 것이 어려워 생일이 오고 가는지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삶이 좀 여유가 있다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일을 꼬박 꼬박 챙깁니다. 어느 가정의 아내가 자기 생일에 대하여 관심과 기대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생일이 가까이 다가 오면서 자기의 생일을 남편이 기억은 하고 있는지? 남편이 선물로 무엇을 사줄 것인지? 자기 생일에 대하여 기대가 많았습니다.

 

드디어 생일 날이 되었는데 아침에 남편이 아무런 소리도 없이 출근을 하더니 돌아올 때도 손에 아무 것도 없이 빈 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섭섭하여 속으로 "저런 인간을 내가 남편으로 믿고 산 것이 바보지!" 라며 자책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대와는 달리 생일날이 즐거운 날이 아니라, 마음이 상한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은 "왜 그렇게 사느냐? 그렇게 살지 말고 이렇게 살아라.“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받기를 원하거든 내가 먼저 사랑을 하라!’ ‘내가 먼저 주도권을 가지고 남편을 먼저 챙기고 나 같은 사람하고 살아줘 고맙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렇게 하라.’ ‘그렇게 하다가 보면 어찌 남편이 가만히 있겠는가?’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한번 찬양 하나 하십시다.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G.201)

1.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 내밀기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 간교한 나의 입술이여, - 더러운 나의 마음이여,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 볼 수 없는가.

 

오 늘 - 나 는, 오 늘 - 나 는,

주님 앞에서 몸둘 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며 서 있네.

어찌할 수 없는 이 맘을 주님께 맡긴 채로,

 

2.내가 먼저 섬겨주지 못하고, 내가 먼저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높혀주지 못하고, 이렇게 고집부리고 있네.

그가 먼저 섬겨주길 원했고, 그가 먼저 이해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높혀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 추악한 나의 욕심이여, - 서글픈 나의 자존심이여,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볼 수 없는가.

 

오 늘 - 나 는, 오 늘 - 나 는,

주님 앞에서 몸둘 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며 서 있네.

어찌할 수 없는 이 맘을 주님께 맡긴 채로.

노래 가사가 꼭 나한테 하는 것 같습니다. 내 마음에 꼭꼭 찔리는 노래입니다.

인간관계도 하나님과의 관계처럼 대접입니다. “너희가 먼저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내가 먼저 해 준 것은 없으면서도 대접받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먼저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율법을 잘 몰랐습니다. 율법이 오해를 받아 왔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할 규칙의 집합체쯤으로 생각했습니다. 율법의 정신을 잊어버렸습니다. 율법을 기계적으로 준수해야 할 것으로 배웠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우리가 전자제품이나 어떤 기계를 사면 사용법을 읽고 배우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어쩌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와 같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율법은 어째서 이웃의 재물이나 소유물을 탐내지 말라고 하십니까? 어째서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단순히 우리를 억제하기 위해서, 우리를 지배하고 조정하기 위해서 입니까? 율법 이면의 목적과 정신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관계 아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서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들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 그래서 오늘 본문은 남을 먼저 생각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 보라는 것입니다. 너 자신의 처지가 어떠냐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이냐?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나를 도와주고 격려해 주는 것들은 무엇인가? 내가 싫어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내 속에서 가장 나쁜 것은 무엇인가? 내 속에 가증하고 낙심적인 것들은 무엇인가? 이것들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들을 생각해 보고, 다른 사람에게 내가 싫어하는 것은 하지 말라는 말인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가? 나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생각해 보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에게 유쾌한 것은 하고, 불쾌한 것은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이 말씀을 좋아합니다. 기독교의 중심되는 진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감탄하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행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좋아하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것은 자아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나니인간은 타락의 결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이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기중심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한테 하는 말에는 분개하면서도 다른 사람들도 우리와 같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황금률을 지키지 못하고, 이 황금률을 따라 살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자기중심적으로 살기 때문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 황금률을 지킬 수 있습니까? 오늘 복음적인 대답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순서에 주목하십시오. 세상은 이웃부터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인은 이웃으로부터 시작하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개인이든, 국가이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국가의 제반문제, 개인의 문제가 풀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까지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교회이든지, 가정이든지,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황금률이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웃을 사랑합니다. 모든 국가의 문제도, 가정의 문제도, 개인의 문제도 모든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높일 때, 민주주의가 바로 되고, 복지도 바로 되고, 정치부터, 경제, 도덕, 교육 등 다 바로 되는 것입니다.

 

북한 보십시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로 한 개인을 신격화하면서 발버둥을 치지만 나라는 점점 쭈그러 들고, 불량품 나라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나라에 경제가 안 돌아가 돈이 없으니까, 모든 지하자원을 다 팔아 먹습니다. 이제는 서해, 동해 고기들을 다 중국 어선들에게 팔아 먹습니다. 중국 어선들이 북한 해역에 다 들어와 고기들을 씨를 말루는 것입니다. 지하자원, 석탄, 철 등등할 것 없이 다 팔아, 먹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가공해서 쓸 기술과 능력이 없는 겁니다. 똑같은 한민족이고, 똑같은 땅에서, 지하자원은 오히려 더 많은데 어떻게 저렇게 가난합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윤리와 도덕과 학문, 정치, 경제, 문화, 과학, 교육, 모든 면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면,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전이되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핵심 말씀이 이렇습니다.

남이 이해해 주길 바라면 내가 먼저 이해해 주어라! 남이 참아주기를 바라면 내가 먼저 참아 주어라! 남이 인정해 주기를 바라면 내가 먼저 인정해 주어라! 남이 나를 존경해 주길 원하면 내가 먼저 존경해 주어라! 사랑받기를 원하면 내가 먼저 사랑을 해라! 대접을 받고자 하면 남을 먼저 대접하라!! 이것이 황금률이다.’ 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 말씀을 교훈으로 삼고 하나님을 먼저 대접하고, 사람을 먼저 대접하고 산다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산다면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축복의 말씀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