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2016/7/24)-산상복음(50)
좁은 길을 가는 자들
마태7:13-14
44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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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저력은 성경입니다. 성경은 우리 한글과 함께 했습니다. 전국에 성경을 보급하면서 한글을 모르던 사람들에게 한글을 깨우치게 되었고, 오늘의 한글이 있게 된 것은 성경이 일등공신입니다. 세계 어느 그리스도인들보다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 안에서 증언되는 복음에 감동받아 그 위에 신앙을 정립해 왔습니다.
한국교회는 그러나 양적 성장을 거쳐 질적 성숙 단계로 진입하지 못했습니다. 성경과 유리되는, 즉 ‘성경 따로, 행동 따로’라는 이중적 신앙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신이 아닙니다. 살아서 응답하시고 기도를 들으시고 나와 함께 사시는 분입니다. 인류의 최후 원수인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한 영원한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바로 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성경에 기록돼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말씀에 대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내 안에 살아 역사할 수 있도록 내 심령의 문을 열고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은 먼 역사의 현장에 떠돌아다니는 신기루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살아있는 말씀에 대한 믿음과 성경 안에서 증언되는 복음으로 내가 다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만이 나약해져버린 내 신앙을 성숙시킬 수 있는 길입니다. 할렐루야!
그런 면에서 저는 성경을 그대로 전하기를 원합니다. 원초적인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이 전하고 싶어 하시는 성경 그대로의 말씀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듣기 좋은 축복, 평안, 소망, 사랑만을 말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부활이 있기 전에 고난과 십자가가 있습니다. 부활절 예배는 있어도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성금요일 예배는 없습니다. 부활절예배는 크게 보고 행사를 하지만, 고난주일 예배는 크게 보지 않습니다.
십자가와 고난 뒤에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좁은 길 뒤에 천국이 있습니다. 천국은 좁은 길 끝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넓은 길을 간 후에 천국을 얻기를 원합니다. 누구든지 좁은 길을 거쳐야 천국이 있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좁은 문이요, 좁은 길입니다. 오늘도 지난주에 이어 좁은 문, 좁은 길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읽은 본문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와 기독교의 성격, 기독교인의 생활의 성격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성도들에게 복음의 진리에 참여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복음이 우리를 초대하는 것은 복음의 진리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참여하기를 싫어합니다. 어떤 전망 좋은 관람석에 앉아서 경기를 관람하는 관중의 삶을 좋아합니다. 그러다가 선수들이 실수하거나 마음이 드는 경기를 하지 않으면 야유를 보내고, 물병을 던지고, 소란을 피우는 군중들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나라 정치를 보십시오. 몇몇 사람의 선수들이 필드에서 뛰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특별석에 앉은 군중과 같습니다. 정치 잘못한다고 욕하고, 마음에 안든다고 욕합니다. 다 이기적입니다.
이러한 이기적인 사상이 교회 안에도 침투해 들어와서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예수 정신, 예수 사상을 가진 예수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데, 교회가 세상화(世上化)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시대에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여 결단과 이행(履行)을 요구합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신앙은 관람석에 앉아서 관람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더 잘 보이는 특별석, 일등석에 앉아서 관람하면 신앙이 좋은 줄로 아는 것, 이것은 기독교의 신앙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의 필수 요소가 결단과 이행입니다. 성경은 철학이 아니요, 지식이 아닙니다. 물론 성경은 최고의 철학이요, 최고의 지식인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위에 있는 최고의 진리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합쳐 놓은 것보다도 더 큰 하나님의 철학이요,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특별석에 앉아서 관람만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우리의 영, 혼, 육과 우리의 삶의 전체를 지배하기를 원합니다. 모든 인생은 기독교의 복음 앞에 완전히 압도당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우리의 전인적(全人的)인 삶을 압도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다가 갔을 때, 모든 사람들이 압도당하고, 지배당한 것과 같이 지배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길을 걸어 가실 때,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만났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무 공무원은 최고의 직업입니다. 돈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홀대당하고, 멸시받는 직업이지만, 로마제국 전체에서는 좋은 직업입니다. 평생을 보장 받을 수 있는 국가공무원입니다.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서 세금을 거두고 있는 마태를 보자마자 “나를 따르라” 라고 했습니다. 마태는 일어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습니다. 베드로도 그렇게 따랐고, 야고보와 요한도 부친과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항상 기독교의 복음은 결단을 요구하며 이행을 요구합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우리나라 초대교회 때에도 그랬습니다. 처음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인이 될 때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조용히 앉아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종이에 엄숙히 기록하고, 그리고 등록카드에 서명 날인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권리와 그들이 가진 모든 소유, 그들이 선택한 삶의 권리를 양도했습니다. 이후로는 자신들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흡사 군대에 입대하는 사람들이 자기에 대한 권리와 자기의 생명을 국가에 양도하는 것과 같이 언약서에 서명 날인을 했습니다. 이게 기독교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결단이요, 이행입니다.
우리가 아직 멀찍이 서서 따라가면서 자기를 설득시키면서 좁은 문을 멀리서 바라 보기만 하고 있다면, 아직 기독교인이 되지 못한 것이며, 좁은 문의 신비로움과 영광, 그리고 경이로움과 축복을 맛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아직도 넓은 길로 가기를 좋아하고, 좁은 문 앞에서 결단하지 못하고, 넓은 길을 바라보는 자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는, 좁은 문을 찾고, 좁은 길에 관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좁은 문, 좁은 길에 대해서는 관심도 가지지 않습니다. 전혀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습니다. 전혀 마음 조차도 없습니다. 오직 넓은 길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렇게 요구합니다. “좁은 문을 찾으라” 라고 하십니다. 오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왜 찾는 이가 적습니까? 사람들이 그리로 가지 않고, 찾는 이들이 적기 때문입니다.
음식점에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북적거리면, 좋은 식당인 줄 알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립니다.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많이 몰리면 유명하고 좋은 줄 알고, 계속 그 쪽으로 몰립니다. 교회도 교인이 많으면 좋은 교회요, 진리가 선포되는 줄 알고 그 교회로 몰립니다. 그래서 요즘은 큰 교회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 교인 한 500명 정도를 떼 주면서 교인이 500명 정도 와서 교회가 제대로 자립하면, 다시 본 교회로 돌아 오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넓은 길을 좋아하는 현대인의 마음을 이용한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교인이든 교인이 아니든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을 좋아합니다. 거기에 뭔가 있는 줄 압니다. 그 길이 진리인 줄 압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숨을 수가 있기 때문에 거짓이 더 많고, 속임이 더 많고, 오염이 더 많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좁은 문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좁은 길을 찾으십시오. 오늘 우리 기독교인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우리 기독교의 위기가 무엇입니까? 진리를 듣고 진리에 대해 동의합니다. 복음을 듣고 복음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진리를 인정합니다. 은혜 받았다고 하고,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듣는 것으로 끝납니다. 더 이상 변화가 없습니다. 더 이상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앉아서 예배하고 밖으로 나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이제부터 복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제 좁은 문을 찾아야 합니다. 좁은 길로 가고자 각오를 해야 합니다. 좁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이게 기독교입니다. 할렐루야!
셋째는, 이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문을 찾아 들어 갔으면 이제는 계속 그 길을 가야 합니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큰 길을 생각하지 말고, 계속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이제는 내 몸을 그 좁은 길에 맡겨야 합니다. 그 좁은 길의 오묘함과 그 좁은 길의 신비로움과 그 좁은 길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느끼고 맛 보며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아무나 택할 수 없는 그 기쁨과 신비로움을 발견하고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성도의 생활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회의가 찾아오고 불신앙이 나의 믿음을 흔듭니다. 저 세상에서 넓은 길을 가고 있는 저 사람들과 자기를 비교하며 내가 꼭 이 길을 가야 하는가 하는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우리 성도는 이 좁은 길을 가면서 더 많은 자신과의 싸움과 더 많이 자신에게 독백하며 물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신분은 무엇인가?’를 더 많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할 뿐만 아니라, 이 좁은 길을 계속해서 간다는 것은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쉽지 않습니다. 편안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과의 싸움, 세상과의 싸움, 사람들과 싸움, 세상 물질과의 싸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매일 아침 깰 때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 나는 하나님의 가족의 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돌아가셨고, 나를 흑암의 나라에서 그의 나라로 옮겨주셨다. 나는 지금 천국으로 가고 있다. 나는 천국에 반드시 가게 되어 있다. 나는 이 세상을 지나가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시험과 시련이 있는 것도 안다. 사탄이 지금도 나를 넘어뜨리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나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고, 나의 주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요, 나는 이 길로 나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따라 가고 있다. 이 길 끝에는 반드시 주님의 나라가 기다리고 있다” 라는 사실을 늘 생각하면서 우리의 몸과 마음과 모든 삶을 주님께 맡기고 이 길을 계속가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우리가 좁은 길로 가지 않는 것은 우리가 이미 넓은 길 위에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둘 중에 하나입니다. 두 가지 다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넓은 길과 좁은 길을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넓은 길로 가다가 나중에 나이 들어 늙어서 좁은 길로 가야지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두 길 다 갈 수 없습니다. 넓은 길과 좁은 길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기독교인이 되려면 반드시 두 길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협착하고 좁은 길 위에 있지 않으면 우리는 크고 넓은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좁은 길을 간다는 것은 담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좁은 길로 간다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과 모든 삶을 예수님께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넓은 길로 가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요, 맡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고 주님께 맡기지 못하면, 기독교인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가 좁은 길로 갈 수 있는 믿음이 생기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보다 먼저 가신 그 분이 이 길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는 세상을 등져야 합니다. 주님을 등지고 세상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우리는 세상을 등지고 주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등지는 자는 다 하나님과 원수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자는 마지막이 비참함으로 끝납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같은 선지서를 보면, 하나님을 등지고, 태양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등지고 담무스 우상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등지고, 앗수르를 바라보고, 애굽을 바라보고, 바벨론을 바라 본 자들은 다 우상숭배자요, 하나님을 버린 자였습니다. 끝은 멸망이었습니다.
여러분, 좁은 길을 가는 자는 세상을 등집니다. 넓은 길을 가는 자는 좁은 길을 등집니다. 넓은 길을 가는 자는 점점더 좁은 길과 멀어집니다. 그래서 좁은 길을 가는 기독교인은 자기에게 소중한 것을 버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자기 자신과 옛 자아를 버려야 합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여 좁은 길을 가게 되면 고독하고, 외로울 수도 있습니다. 세상 재미는 다 버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길에는 또 다른 친구들이 있습니다. 세상 재미가 아닌 또 다른 재미가 있습니다.
“찾는 이가 적음이라” 넓은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만큼 많지는 않지만, 깨끗하고, 거룩하고, 삶의 목표가 분명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모든 사람에 앞서 그 길을 먼저 걸어가신 분, “나를 따르라”고 말씀 하신 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분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의 친구가 되어 이 좁은 길을 걸어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다섯째는, 내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내가 좁은 길로 걸어간다고 해서 내가 구원을 결정하고, 내가 나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좁은 문을 선택하고, 내가 좁은 길을 가는 것이니, 사람은 자기 자신의 결정과 행동으로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의해 구원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의인은 없다니 하나도 없습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있습니다. 아무도 자기 행동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의는 아무리 노력하고 깨끗하다 해도 하나님의 기준 되는 의 앞에는 ‘누더기’요, ‘걸레’일 뿐입니다. 우리는 행실로가 아니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면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내가 좁은 문으로 들어감으로써 나 자신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을 가는 것은 내가 구원 받은 사실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가는 자만이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할렐루야!
좁은 길 위에 있는 자만이 구원 받은 자입니다. 이 길을 그냥 쭉 가면 끝에는 새 예루살렘, 주님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거기에 없을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고전2:14),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은 좁은 길로 가는 것이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에 좁은 길로 가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좁은 문을 선택했기 때문에 내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내가 구원 받았기 때문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중요한 게 하나 있습니다. 좁은 길을 가는 자는 이제 완전한 자가 아닙니다. 죄가 하나도 없고, 실수도 전혀 안 하는 자가 아닙니다. 늘 나약합니다. 실수 합니다. 넘어집니다. 죄도 짓습니다. 오히려 넓은 길로 가는 자들보다, 길이 협착하고 좁기 때문에 더 잘 넘어집니다. 더 많이 실수합니다. 더 잘 미끄러집니다. 그래서 낭떠러지에 떨어지기도 하고, 다시 힘껏 기어 올라오기도 합니다. 몸에 상처가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는 많은 점에서 실패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좁은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죄 지었다고, 실수 했다고 좁은 길에서 넓은 길로 되돌아간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좁은 길을 가는 자들은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자들이요, 따르려고 애를 쓰는 자들입니다. 좁은 길에서는 잘 넘어집니다. 문제는 ‘내가 넘어졌구나, 낭떠러지로 미끄러졌구나’ 라고 자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말씀을 하나를 더 드리겠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그러면 소수의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는 자만이 구원 받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 좁은 길 끝에 주님의 나라, 주님이 이루실 메시야의 왕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구원받는 자는 심히 적은가?
이것에 대한 답변은 누가복음 13장 23-24절에 있습니다. 『(23)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이 말씀이 답변이 될 것입니다. 들어가고 싶지만 못 들어가는 사람도 많다는 것입니다. 아마 구원 받은 자가 적다는 말씀도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씁시다. 할렐루야!
저와 여러분은 지금 좁은 문을 통과하여 좁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싫어하는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좁은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배입니다. 주일을 성수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이 첫 번째 증거입니다. 두 번째는 헌금입니다. 현대인들에게 자기 생명처럼 여기는 것이 돈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주님 가신 좁은 길을 가지 않는 자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순종입니다. 넓은 길로 가는 자는 극도의 이기적이기 때문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현대인의 특징이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 자기중심, 자기 멋에 사는데 순종할 수 없습니다. 특히 말씀에 순종하고, 교회 권위에 순종하는 것은 좁은 길을 가는 자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3장 24절에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라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 것입니다. 구원 받고 싶고, 좁은 길을 가고 싶어도 바로 이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예배와 헌금과 순종, 이것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마음은 있어도 못하는 것입니다. 좁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좁은 길은 내 의지와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가진 연약한 인생이기에 좁은 길로 간다는 것은 힘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를 불러 주시고, 이끌어 주시고, 이 좁은 길로 가게 해 주신 우리 주님과 성령의 능력이 끝까지 이끌어 주시고, 일으켜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힘 빠지고, 실패하고, 미끄러져도 다시 일어나 이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을 잘 걸어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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