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산상복음

43.[산상복음43]염려의 원인과 치료

☆ 주님의 머슴 2021. 4. 26. 17:28

주일설교(2016/6/5) - 산상복음(43)

염려의 원인과 치료

마태6:33-34 /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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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것을 보면서도 서로 다른 생각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긍정적으로, 어떤 사람은 부정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되는 이유를 찾고 어떤 사람은 안 되는 이유를 찾습니다.

 

2009년 강원도 횡성에 임야 7600평이 경매로 나왔습니다. 감정가는 35000만원인데 여러 번 유찰 끝에 7000만원까지 하락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투자를 목적으로 현장에 달려가 보았습니다. 막상 현장에서 보니 돌산이라 전원주택이나 펜션을 짓기가 어렵다고 생각하며 그냥 돌아갔습니다. 한 명만이 군청으로 달려가 담당자에게 이 지역의 돌을 다른 지역으로 반출해도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담당자는 자연석 반출에 문제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7450만원에 낙찰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트럭 100대분의 돌을 팔아 5000만원의 현금을 받았습니다. 그 땅을 담보로 3000만원을 대출받았습니다. 자기 돈 한 푼 안들이고 땅을 사게 된 것입니다. 돌이 없어지니까 바로 집을 지을 수 있는 땅으로 바뀌어 평당 15만원, 11억원이 넘는 땅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이 저 돌 때문에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할 때 이 사람은 저 돌만 해결하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은 염려에 대해서 좀더 깊이 있게 다루고,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염려에 대해서 여러 번 말씀하고 있습니다. 염려는 부정적인 사고를 가져오게 합니다. 염려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염려는 긍정적인 사고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머물러 있게 하고 발전을 가져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염려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염려는 기독교의 신앙과도 맞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생활에 치명타를 가하는 사탄의 방법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 라는 말을 세 번씩이나 말씀하고 있습니다(25,31,34). 그리고 염려라는 단어를 여섯 번이나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긴 지면을 할애해서 염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염려는 우리 인간의 삶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서 근심, 걱정,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특히 우리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문제인,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 입는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삶의 모든, 다양한 부분까지 영향을 끼치면서, 우리를 염려에 붙잡아 놓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중의 새, 들의 백합화를 예를 들면서 그들도 하나님이 입히신다. 그들도 하나님이 철저히 보호하신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도 이 들꽃 하나만도 못하였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 이렇게 염려하는 자들은 하나님 아버지가 없는 이방인들이다.” 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럼 왜 염려가 옵니까? 첫째는 자기의 존재의 가치를 몰라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을 몰라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르면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누군지 알고, 하나님을 발견하면 자기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존재가치는 이 땅의 피조물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 주셨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고, 돌보아주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존재가치에 대해 눈이 열릴 때, 염려와 근심,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믿음이 작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작으면 염려 속에 빠지는 것입니다. 믿음을 키워야 된다고 했습니다. 영혼구원만을 추구하는 작은 믿음에 머물러 있지 말자 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129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아홉 가지 성령의 은사가 있습니다.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믿음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하는 은사, 예언의 은사, 영 분별의 은사, 각종 방언의 은사, 방언 통역의 은사 이것들은 성령이 특별하게 주시는 은사입니다. 이 중에 믿음의 은사 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이 믿음은 영혼구원의 믿음이 아닙니다. 이 믿음의 은사는 별개의 은사입니다.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능력의 믿음입니다. 믿음 위에 있는 또 하나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전 인생, 전체의 삶에 적용시켜 능력있게 하는 믿음입니다. 이 큰 믿음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염려는 자신감을 빼앗아 갑니다. 염려는 부정적인 사고를 만들어 냅니다. 염려는 모든 우리의 실생활에 파고들어 한발자국도 미래로 전진해 나가지를 못하게 합니다. 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염려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많은 영향을 줍니다. 신앙이 자라지도 못하게 합니다. 믿음이 점점더 약해집니다. 우리의 영이 죽어갑니다. 흑암의 권세에 붙잡히게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복음에서 염려에 대해서 이렇게 길게 다루고 있는 것은 염려라는 것이 그냥 일반적인 염려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특히 우리 성도에게 오는 염려는 아주 영적 문제요, 우리 성도의 신앙생활에 아주 예민한 부분인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염려에 붙잡히면 신앙은 침체되고, 걱정과 근심이 더 몰려옵니다. 그리고 생기지도 않았는 문제를 만들어 내고 공상하게 되고, 그 공상에 사로잡혀 더 근심, 걱정으로 몰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염려는 사탄이 뿌리는 것이요, 사탄의 DNA가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염려는 상상 속에 있는 헛것이 아닙니다. 염려는 하나의 실체입니다. 염려는 악의 생명입니다. 그것은 힘이요, 세력입니다. 이 세력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인식하고 깨달을 때까지는 이 염려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소극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염려는 우리 속에 와서 우리를 움켜쥐고 우리를 통제하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염려는 조금씩, 조금씩 세력을 넓혀나갑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전 삶을, 전 인격을 사로잡아 염려와 근심과 걱정, 두려움으로 몰고 가서,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을 다 사로잡아 버립니다. 그래서 늘 염려에 사로잡혀 살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믿음은 없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지고, 인간과의 관계도 끊어지고, 인간으로서의 바른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폐인이 되고, 결국 자살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는 막강한 세력입니다. 어두운 세력의 힘입니다. 염려의 원인은 사탄이 뿌리는 것입니다. 염려는 사탄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늘 염려에 패배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염려가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면, 즉 우리에게 실제로 부딪쳐오는 삶의 문제들을 통해 우리를 염려하게 하고, 부담이 되게 하고, 압박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 다음부터 염려는 떠나 갈 것이고, 우리 속에 염려와 근심, 걱정이 우리의 삶을 사로잡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미래를 향해 계속해 발전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는 좀처럼 물러나지를 않습니다. 끈덕지게 달라붙어서 찌꺼기를 남겨 놓습니다. 성도들에게 염려가 있는 것은 이런 찌꺼기가 남아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찌꺼기가 또 누룩처럼 덩치를 키우면서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이 염려를 완전히 제거해 버리기 위해서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뿌리를 완전히 뽑는 치료를 해야 합니다.

영성신학이나 영성훈련에 들어가면 염려는 악령의 활동의 결과로 봅니다. 염려는 또 다른 인격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는 신체가 쇠약해진 상태에 있는 사람이거나, 또는 지나치게 염려에 붙잡혀 근심하는 성향을 가진 마음이 약한 사람들을 붙잡고 지배하고, 그 위에 군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빨리 깨달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점을 깨닫지 못하면 그 문제에서 빠져 나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깨닫고 알게 되면 목숨을 걸고라도 거대한 집단과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에서 우리 예수님이 관심을 가지시고 말씀하시는 염려의 치료방법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우선적으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 ”내일 염려는 내일에 맡길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 것으로 넉넉하다“(34) 라는 말입니다. 만일 현재도 많이 어렵다면, 어째서 미래 것까지도 끌어안고 괴로워할 필요가 뭐 있느냐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하루 하루 반복해서 살아가는데, 굳이 미래 것까지 미리 당겨서 괴로워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미래에 대한 염려는 철저하게 쓸데 없으며,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가치도 없고, 아무 일도 치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순전히 에너지 낭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염려한다고 해서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외에도 염려는 미래를 향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염려의 결과는 삶의 전투력을 상실해 버리게 합니다. 우리의 능률을 저하시켜 버리고, 인간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범죄한 이후에 이마에 땀을 흘리며 수고해야먹고 살 수 있게 해 놓았습니다. 사람은 이제 낙원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이제 열매를 따서 먹으며 편안하고 즐거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결과로 이 세상의 삶은 노역(勞役)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수고하며 시련과 괴로움에 직면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두 동일한 시련과 고난을 받기 쉽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시련과 고난이 있습니다. 이 시련과 고난을 어떻게 대처하고 살아가느냐가 성공과 실패를 좌우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활에서 염려까지 합산해서 끌어안고 살아갈 필요가 있느냐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인간에게는 그날 그날의 삶의 문제와 어려운 문제들이 할당되어 있다 라는 것입니다. 매일 짊어져야 하는 그날의 문제가 있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매일 매일 그날의 삶을 할당해 주셨습니다. 그 날의 일을 붙잡고 열심히 살자 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서 내일의 할당량을 오늘 끌어와 끌어 안고 미리 염려하지 말자 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문제는 그 다음에 넘기고 그날의 문제, 그날의 삶만을 충실하게 살자 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18-9절에 보면,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듣고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하니, 제자들이 말라면서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그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라고 대답하십니다.

우리는 낮에는 열두 시간을 살아야 합니다. 그 이상은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루 낮을 열두 시간만 할당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런 염려는 내일 하고 오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 하니, 나사로 집으로 가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고 오늘의 염려는 오늘만 하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영적신앙의 대가(大家)들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했습니다. 세상을 향하여 쓸데없는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을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과거를 잊어 버렸습니다. 과거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과거에 과오를 범했습니다. 과거에 깊은 상처들이 다 있고, 죄악과 허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의 허물들을 벗어 던졌습니다.

 

오늘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은 내일도 같은 하나님이 되시며, 내일도 우리를 도우시리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오는 영적 위기는 우리가 하나님을 대체로 믿긴 하면서도 평생 동안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신앙은 특별한 사건,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도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항상 먼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에 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42:11).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관심, 우리의 마음, 우리의 전인적(全人的) 삶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의에 쏠려 있으면, 염려에 붙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한번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십시다. 우리의 믿음이 큰 믿음입니까? 아니면 작은 믿음입니까? 우리는 너무 지나치게 세상적인 삶에 매여 있지 않습니까? 목사님들 중에나, 성도들 중에 이번 4.13총선에서 여당(새누리당)이 과반수도 확보 못하고, 참패를 당하는 것을 보고, ‘살 맛이 안 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살 맛이 안 날 정도가 되어 있을까요? 거기에 너무 깊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는 누가 정권을 잡던, 누가 대통령이 되던, 나에게는 작든, 크든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야당이 정권을 잡든, 여당이 정권을 잡던 국민들에게는 삶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한 때 야당이 정권을 잡으면, 나라가 위기가 올 것이고,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고, 경제가 어려워지게 될 것이고, 미군이 철수 하게 되고, 외국 기업이 다 떠나가고, 외국 돈이 다 빠져나가 경제에 위기 온다고 떠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 일에 너무 매이면 안됩니다. 세상 근심, 걱정에 빠지면 안됩니다. 오늘 말씀대로 너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빠지면 안됩니다. 여기에 너무 관심 가지지 마십시오. 이렇게 사는 자들을 하나님이 없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가난합니까? 돈이 없습니까? 돈이 잘 벌리지 않습니까? 일 자리를 달라고 기도 하십시오. 많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열심히 일하십시오. 열심히 돈 버는 일을 하십시오. 옛말에 개처럼 벌어서 정승 같이 써라.’ 는 말이 있습니다. 온갖 일을 해서라도 열심히 돈을 버십시오.

그리고 있는 것으로 족하게 여기고 감사하며 알뜰하게 사십시오. 돈 때문에 고민하고, 돈 때문에 염려, 근심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그런다고 돈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염려와 근심은 아무런 보탬이 되지를 않습니다. 염려는 세상으로 더 빠지게만 합니다. 세상 염려에 더 매이게만 합니다.

 

여러분, 그날 그날에 충실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바라보면서 구하는 삶을 사십시오. 그리하며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할렐루야! 이 믿음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