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묵상(27) - 2022/2/7>
27. 부도덕한 자들과 의로운 자들
막 6: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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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우리가 본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둘씩 둘씩 짝을 지어 나가서 예수를 전했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게 했다.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고 했다. 오직 예수님이 주시는 권세만 가지고 나갔다.
이렇게 제자들은 출발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빈털터리로 출발했다. 기독교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제자들이 권세를 가지고 나가서 예수를 전했는데 기적이 일어났다.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귀신이 물러가고 많은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
한 사람이 여러 곳을 뛰어다니면서 전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흩어져 뛰어다니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열두 제자가 흩어져서 각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순식간에 예수님의 소문이 이스라엘 전 지역에 퍼졌다.
본문 14절에 앞에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라고 했다. 온 이스라엘 지역에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다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온 이스라엘 지역이 예수의 소문으로 들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희안한 것은 열두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열두 제자들의 소문이 퍼진 것이 아니고, 예수의 소문이 퍼져나간 것이다. 말씀을 전하고, 전도하는 일에 전하는 자의 이름이 퍼져나가고,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이름이 퍼져나가고 예수의 소문이 퍼져나가고, 예수의 이름이 유명해 져야 된다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야” 된다는 것이다.
복음 앞에서 예수의 이름만 드러나야 한다. 섬기는 자의 이름은 드러나면 안 된다. 예수만 드러나야 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털터리들이 나가서 예수의 이름만을 전했는데, 기적이 일어나고 회개하고, 병이 낫고, 귀신이 물러갔다. 온 세상이 예수의 소문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기독교는 신비이다. 능력이다. 사실의 증거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가는 것이 기독교이다. 복음의 위력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선 오늘 본문의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첫째는 세례요한은 지금 마케루스(Machaerus)라는 성의 지하감옥에 갇혀 있다. 마케루스는 무서운 협곡에 둘려싸여 있으며, 사해의 동쪽 해안을 내려다보면서 고립되어 있는 산꼭대기 위에 세워졌다. 그곳은 세계에서 몇 안되는 고립된 곳이며 가장 쓸쓸하고 가장 험하고 가장 견고한 요세의 하나이다. 오늘에 이도록 보존되어 있다. 그래서 여행자들은 아직도 벽에 요한이 매였던 것이 분명한 꺾쇠와 쇠갈고리를 볼 수 있다. 요한이 생을 마지막으로 보낸 곳이 이 쓸쓸하고 황량한 요새 안이었다.
둘째는 헤롯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특히 그의 가계(家系)에 대해서 알아보자.
헤롯의 가족의 결혼은 서로 얽혀있다. 권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형제까지 얽혀있는 것이다. 서로 상호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의 왕은 ‘헤롯 대왕’이었다. 그는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했을 때에 2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학살한 자이다(마2:16-18).
헤롯 대왕은 여러 차례 결혼을 했다. 말년에는 그는 거의 미친 듯이 의심이 많아져서 그의 가족들을 하나하나 죽이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헤롯의 아들이 되기보다 헤롯의 돼지가 되는 것이 더 안전하다”라는 속담이 생기기까지 했다.
최초로 그는 도리스(Doris)와 결혼했다. 그녀에게서 아들 안디바데루(Antipater)를 얻었으나 죽이고 말았다. 다음으로 그는 하스모니안 집안의 마리암네(Mariamne)와 결혼하여 그녀에게서 두 아들 알렉산더(Alexander)와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를 얻었으나 그들마저도 살해하였다. 참고로 본문에 나오는 악녀 헤로디아는 이 아리스토불루스의 딸이다.
헤롯대왕은 다시 보헤더스 사람이라 불리는 다른 마리암네와 결혼하였다. 그녀에게서 헤롯 빌립(Philip)을 얻었다. 이 헤롯 빌립이 헤로디아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빌립의 이복형제 아리스토불루스의 딸이기 때문에 헤롯 빌립은 자신의 질녀와 결혼한 것이다. 헤롯 빌립은 이 헤로디아에 의하여 살로메(Salome)라는 딸을 얻었다. 이 살로메가 본문에 나오는 헤롯 앞에서 춤을 춘 헤로디아의 딸이다.
헤롯 대왕은 그후 말다게(Malthake)와 결혼하여, 그녀에게서 두 아들 아켈라오(Archelaus)와 헤롯 안디바(Antipas)를 얻었다. 이 헤롯 안디바가 본문에 나오는 갈릴리 땅의 지배자로 나오는 헤롯 왕이다.
헤롯 빌립은 원래 본문에 나오는 헤로디아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그는 본문에 나오는 헤로디아의 딸인 살로메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는 헤롯 대왕의 영토를 조금도 계승하지 못했다. 그는 로마의 부유한 시민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어느날 헤롯 안디바가 – 본문에 나오는 헤롯 – 로마에 있는 그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헤로디아를 만나게 되는데 헤로디아를 유혹하여 남편과 이별하고 자기와 결혼할 것을 설득하였다.
그리고 전에 헤롯 안디바는 아라비아의 한 나라인 나바데아(Nabataeans)의 왕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그녀 부친 곁으로 도망가버렸다. 그녀의 부친 나바데아 왕은 딸의 명예를 위해 복수하시 위해 헤롯 대왕 영토를 침범하여 헤롯을 맹렬히 격파했는데, 이것을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헤롯 대왕은 예루살렘의 크레오파트라(Cleopatra)와 결혼하였데, 그녀에 의해서 빌립 소왕이라 부르는 아들을 얻게 된다. 이 빌립 소왕이 헤로디아의 딸인 살로메와 결혼하게 된다.
이 살로메는 빌립 소왕의 이복형제인 헤롯 빌립의 딸이며 동시에 헤로디아의 딸이었고, 그리고 헤로디아는 다른 이복형제 아리스토불루스의 딸이었다. 살로메는 그런 까닭에 남편의 질녀인 동시에 질녀의 딸이기도 하였다. 이것을 다음의 표로 만들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헤롯의 가계에 있는 이 같은 일련의 결혼 관계의 혼란은 역사에 드문 일이다. 본문에 나오는 헤롯 안디바는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함으로 유대의 율법을 범했다(레18:16,20:21). 그리고 예의와 도덕의 율법을 어겼다. 이 음란한 결혼 때문에, 또 그의 동생의 아내에게 행한 계획적 유혹 때문에, 세례 요한이 그를 공공연하게 비난한 것이다. 생사의 권리를 가진 절대 권력자에게 공공연히 비난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대단한 믿음의 용기가 필요하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죄를 책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로와야 한다. 부도덕하지 않고, 의로와야 가능하다. 기독교는 이것을 요구한다. 세례 요한이 부도덕하지 않고 의로운 자였기 때문에 헤롯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자로 여겼고, 두려워 했고, 또 그의 말을 들으면서 번민하면서 달갑게 들었다(막6:20). 이것이 기독교의 위력이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본문은 한 단계씩 과거로 내려가다가 다시 한 차원씩 현재로 올라오는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다. 본문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세례요한의 죽음을 가장 상세하게 묘사한다.
본문은 세 가지 반응을 언급한다. 첫째는 헤롯의 반응이며(14, 16절) 둘째와 셋째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다(15 절).
1) 헤롯의 들음과 반응(14 절)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
헤롯은 예수의 제자들의 활동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물론 헤롯이 이렇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아래에서 자세히 소개한다. 헤롯의 반응은 정보입수에서부터 시작되었다"(14a절).
“헤롯이 들었다”(14a절). 예수의 이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예수의 제자들의 활동은 예수의 이름을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자들의 전도 활동으로 예수의 신분공개가 되었다. 제자들의 활동은 자신들의 이름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헤롯은 예수의 이름을 들었을 때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혼동하였다. “세례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헤롯의 말은 막연하기는 해도 그가 어떤 식으로든지 부활에 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헤롯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한 세례요한으로 이해한 것은 한 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이 말할 수 없이 강력한 것이었다는 것을 반증하며, 다른 한 편으로는 세례요한의 인상(또는 영향)이 사후에도 지울 수 없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더 나아가서 헤롯의 말에서 헤롯이 사람 속에서 활동하는 능력을 믿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수 있다.
특히 헤롯의 말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비록 헤롯이 세례요한을 죽였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인물이지만 이적의 능력을 부인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아무도(심지어 헤롯까지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2) 다른 이들의 말함과 반응(15 절)
“어떤 이는 그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다른 의견들과 반응을 보자. 이것들은 두 가지 로서 헤롯이 보여 준 반응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헤롯과 달리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엘리야라고 생각했다(15a 절). 당시에는 유대인들이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부활 엘리야 사상”은 당시의 종말론에서는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한 사상이었다(막 9:9-13 참조).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을 보면서 부활한 엘리야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본문이 이렇게 부활 엘리야 사상에 관한 어떤 사람들의 의견을 슬쩍 언급하고 만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런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면서, 동시에 예수님은 부활한 엘리야가 아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지자로 간주했다'(15b절). 예수 그 리스도가 선지자들 가운데 하나와 같은 선지자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16장 14절에서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라 하느냐?” 라는 물음에 “이르되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한다. 당시에는 유대교의 안팎에 다양한 선지자 사상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런 시각으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당시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등장했다. 당시의 선지자 사상들 중에서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 종말 선지자에 대한 기대 사상이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당시에 유행하던 한 선지자로 여겼거나 종말 선지자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본문이 간단히 이런 의견을 소개하고 만 것은 그 당시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말해 주면서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는 것을 말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3) 헤롯의 생각(공상)(16절)
“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헤롯의 생각을 요약해서 다시 한번 강조한다. 예수는 부활한 요한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헤롯은 “내가 목 밴 요한”이라고 말한다. 세례 요한이 어떻게 죽었는지 말하는 것이다. 부도덕한 자가 의로운 자를 죽였다는 것을 헤롯 스스로 자기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 목 베임 당해서 죽었다는 것은 절대로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헤롯은 이렇게 부인할 수 없는 죽음에서 세례요한이 살아났다고 생각한 것이다. 부도덕한 자가 의로운 자를 죽였음으로 이런 공상을 하는 것 같다. 신앙 없는 불의한 자는 이런 공상이 저절로 생기는 것 같다. 아마 헤롯은 굉장히 두려웠을 것이다. 이어 다음 부분은 요한이 헤롯에게 목 베임을 당했던 역사적인 사실을 증거한다.
<요한의 투옥(17절)>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헤롯이 세례요한을 목 베어 죽인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이야기를 역사적으로 한 단계 과거로 되돌린다. 헤롯은 세례요한을 목 베어 죽이기 전에 먼저 체포하여 투옥했다. 세례요한이 투옥된 이유는 헤로디아 때문이었다. 헤로디아는 본래 헤롯의 이복형제 빌립의 아내였는데 헤롯이 그녀를 유혹하여 혼인했다. 이것을 세례 요한은 유대교 율법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책망한 것이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보면 선지자는 당연히 이렇게 했고, 또 이렇게 해야 한다. 모든 권력자들은 율법을 버렸을 때 선지자들의 책망을 들었다. 그 중에 여러 선지자들은 권력자에게 처형당하기도 했다.
세례요한의 투옥도 헤롯의 잘못된 결혼을 책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례요한이 감금된 원인은 헤로디아에게 있었다. 그 사실이 바로 다음에 자세히 설명한다. 사실상 이 단락의 모든 설명은 헤로디아가 가장 악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다. 심지어 헤로디아는 헤롯을 이용했다. 헤롯은 헤로디아 때문에 원치 않는 일을 저질렀다. 이것은 여성 앞에서 헤롯의 유약함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남성 앞에서 헤로디아의 완악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세례요한은 의로운 인물로 묘사되고 헤로디아는 극악한 인물로 묘사된다. 본문의 주제는 의인이 악인에게 고난을 당한다는 것이다. 공의를 따르는 지는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 고난을 받는다.
본문은 비참하게 된 한 악한 여인이 할 수 있는 악한 일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선량해지려면 끝없이 선량해 지지만, 악해지려면 끝없이 악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대 랍비의 전승에 의하면 ‘선량한 여자는 악한 남자와 결혼해도 좋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드디어 그 남자를 그녀 자신과 같은 선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선량한 남자는 결코 악한 여자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녀가 그를 그녀 자신의 수준까지 끌어내려 악한 남자로 만들지 않고는 못 베기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헤로디아는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악한 죄악을 버리고 회개할 것을 지적해 준 용기 있는 한 의로운 선지자를 말살시키고 말았다. 훗날 헤롯과 헤로디아는 고올(Gaul)로 추방되어 거기서 쓸쓸히 인생을 마감했다.
<요한의 책망과 헤롯/헤로디아의 반응(18-20절)>
이제 이야기를 다시 한 단계 과거로 후퇴시켜 헤로디아 때문에 요한이 투옥된 것이 어떤 사건이었는지 설명한다.
1) 세례요한의 책망(18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사건은 요한이 헤롯에게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의는 자신을 공개할 뿐아니라 불의를 공격한다. 의는 자신을 숨기지도 않고 불의를 간과하지도 않는다. 요한은 최고의 권력자인 헤롯의 불륜을 강도 있게 비판하였다. 가장 낮은 자라고 해서 의인의 공격적인 시각을 벗어날 수 없듯이 가장 높은 자라고 해서 의인의 비판적인 안목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초야에 사는 평민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듯이, 왕궁에 사는 군주도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므로 요한은 헤롯의 죄악의 가장 중심부를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2) 혜로디아의 반응(19절)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그런데 이와 같은 요한의 비판 앞에서 정작 분노한 것은 헤롯이 아니라 헤로디아였다. 헤로디아는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했다. 악인은 의인을 기뻐하지 않는다. 불의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의 비판을 수용하지 못한다. 죄악을 비판히는 의인을 원수로 여기고 죽이고자 하는 것이 불의한 세상의 원리다. 그래서 의인이 악인의 행위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만큼 악인도 의인의 비판에 강력하게 반응한다. 헤로디아는 요한 살해 계획에 실패했다. 헤롯이 요한에 대해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3) 헤롯의 반응(20절)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헤롯은 요한에 대해 다양한 반응을 나타냈다. 무엇보다도 헤롯은 요한을 두려워했다. 그 이유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이 말은 의롭고 거룩한 요한이 뿜어내는 위염과 기풍 앞에서 헤롯이 압도당했다는 의미일 수 있다. 둘째는, 이 말은 헤롯이 실제로 요한을 두려워했다기 보다는 의롭고 거룩한 요한을 처형했을 때 나타날 백성들의 비난을 염두에 두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어쨌든 불의한 헤롯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요한을 교묘하게 이용했던 것이 틀림없다. 이런 이유로 헤롯은 요한을 보호 했던 것이다.
사실상 요한의 책망 앞에서 헤롯은 두 가지 모순적인 반응을 보였다. 헤롯은 요한의 말을 듣고 한 편으로는 번민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달갑게 들었다. 이것은 헤롯이 요한의 말을 내면적으로는 반발하였지만 외면적으로는 수긍하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의미다. 이것은 모두 정치적인 제스처였다. 결국 헤롯은 의롭고 거룩한 요한의 말까지도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이용했던 것이다.
<세례 요한의 처형(21-29절)>
“21 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22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소녀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23 또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24 그가 나가서 그 어머니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머니가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25 그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니
26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27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28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다가 소녀에게 주니 소녀가 이것을 그 어머니에게 주니라
29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
이 본문은 헤롯의 생일잔치(21절), 헤로디아의 딸의 무희(22절), 헤롯의 요청(22b-23절), 헤로디아의 조언(24절), 헤로디아의 딸의 요구(25절), 헤롯의 처형 허락26-28절), 요한의 제자들의 장사(29절)로 이어진다.
결국 요한은 헤롯과 헤로디아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 이 본문은 요한이 죽임당한 것에 관하여 다른 복음서보다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자세한 설명은 요한을 죽이기 위하여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즉 일시(헤롯의 생일, 21절), 증인(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 21절), 동기(헤로디아의 딸의 춤에 대한 보답, 22-25 절), 정치적 제스처(세례요한 처형에 대한 근심과 허락, 26-28절) 등이 준비되었다.
여기서 본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의인이 얼마나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는가를 알려 주는 것이다. 의인은 악인들에 의하여 장난거리로 죽임을 당한다. 헤롯은 소녀의 춤 때문에 요한을 죽인다.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귀인들은 요한의 죽음에 대해 침묵한다. 헤로디아는 딸의 춤의 대가로 요한의 목숨을 요구한다. 많은 경우 의인은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하지 못한다. 오히려 의인은 보통 사람보다도 못하게 죽는다. 하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의인이 이렇게 장난거리 처럼 죽는다 해도 그는 악인들의 마음속에 언제나 두려움으로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헤롯은 예수 그리스도의 소문을 들었을 때 자신이 목 베어 죽인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부도덕하고 불의한 사회에 의로운 자들이 살기에는 너무 힘들다. 바벨론 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과 같이 얼마나 힘이 드는가? 바벨로 사회에서 살아남는 것은 내 힘으로 되지 않는다. 전적인 하나님의 힘이요, 도우심 뿐이다. 부도덕한 사회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바벨론에서 유대인으로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곧 순교자의 정신과 각오로 사는 것이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은 순교자의 믿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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