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마가복음

28. 목자가 없는 자들

☆ 주님의 머슴 2022. 2. 17. 11:22

<마가복음 묵상(28) - 2022/2/14>

28. 목자가 없는 자들

6: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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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6: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6: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6:33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오늘 본문 30절에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둘씩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신 이후 제자들이 나가서 주님의 복음을 증거했다.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의 소문이 온 지역에 퍼지게 되었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12-14).

엄청난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의 소문이 온 지역에 퍼졌다.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열 두 제자들이 피곤하고 지친 몸으로 돌아왔다.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예수님께 보고했다. 제자들은 전도를 마치고 돌아와 예수님께 두 가지를 보고했다. 그것은 그들이 행한 것과 그들이 가르친 것이었다. 결국 이것은 12-13절에서 언급한 제자들의 사역을 요약한 것이다. 제자들의 사역은 행위와 교훈이 철저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공로를 인정하고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31) 고 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을 직접 이끌고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건너갔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다. 제자들에게 휴식이 필요한 이유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31). 사역에 휴식이 동반되는 것이 좋다. 휴식은 결코 낭비나 사치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휴식을 배려하시면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셨다. 첫째는,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따로휴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휴식의 방식에 관한 설명이다. 휴식이란 것은 사람들과 격리되어야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휴식은 특별한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는, “한적한 곳에서 휴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휴식의 공간에 관한 설명이다. 휴식은 복잡한 일상생활을 떠날 때 주어진다. 그러므로 휴식은 변화된 생활이다. 셋째는,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잠깐휴식할 것을 권면하셨다. 이것은 휴식의 정도에 관한 설명이다. 휴식은 제한된 정도로 취해져야 한다. 제한된 정도를 넘어선 휴식은 이미 휴식이 아니다. 이렇게 볼 때 휴식은 일시적인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휴식은 영성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조용한 영성의 시간을 갖는 것, 영적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소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의 리듬이라는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사람들과 부딪치며 살다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또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서 부딪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조용한 하나님과 영적시간, 조용한 휴식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육체는 수면과 노동의 리듬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인간은 영적 휴식이 필요하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의 위험이 있다. 하나는 너무 지나치게 계속해서 일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너무 지나치게 게으른 것이다. 행동으로서 보여주지 않는 헌신은 헌신이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행동이 없는 기도는 기도가 아닌 것이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행동하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들이 싫어서,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사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과 사귐을 더 잘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사귐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의 리듬은 신비로운(조용한) 장소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것과 세상에 나가서 부딪치면서 열심히 자기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한적한 곳에서 쉬는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32) 갔는데, 많은 사람들이 보고 모든 마을로부터 걸어서 그곳에 달려와 제자들보다 먼저”(33)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는 동안 잠깐쉴 수 있었을 정도다.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 상륙하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님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무리들을 보면서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34)고 했다. 그것도 때가 저물어갈 때 까지....”(35)

 

사명자들은 일하면서 휴식을 가지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여러분, 목자 없는 양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목자 없는 양!” 목자가 없는 상태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인가? 정말 이 세상에는 목자 없는 상태의 사람들이 많다. 자신들이 목자 없는 상태로 살고 있음을 모를 뿐이다. 방황하며 무엇을 위해 사는지도 모른다. 길이 없고, 방향이 없다. 목표가 없다. 뭔가 이룬 것 같은데, 아직 이룬 것이 없다.

 

1)목자 없는 양은 길을 발견할 수 없다. 방황한다.

2)목자 없는 양은 목장과 먹을 것을 발견할 수 없다. 그래서 굶주리고 목 마르다. 만족이 없고, 기쁨이 없고, 감사가 없다.

3)목자 없는 양은 양을 위협하는 위험으로부터 무방비 상태에 있다. 내가 위험한 길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목자 없는 양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당황해 하며 유리한다. 그래서 그들은 아주 쉽게 길을 잃고 돌아가지를 못한다. 목자이신 예수님이 없는 사람들은 방황한다. 두려워한다. 어디에서 왔는지, 자기가 온 길도 모른다. 어디로 가는지, 방향 감각도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성경 예레미야 50:6에서 내 백성은 잃어 버린 양 떼로다 ...........그들이 산에서 언덕으로 돌아다니며 쉴 곳을 잊었도다했고,

에스겔 34:6에서는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 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 고 했다.

 

목자 없는 양들은 목장과 먹을 것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굶주리게 된다. 필요한 만큼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한다.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들은 굶주리게 된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영혼을 먹이고 채워줄 뿐만 아니라 평화와 사랑과 기쁨에 대한 내적 갈망을 만족시켜 줄 목자이신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 그들은 인생의 갈급함 채우는 데 그들 자신 밖에 의지할 것이 없다. 뭔가 대단한 사람이 그를 의지하고, 자기 갈급함을 채워줄 것 같았는데, 결국 그것으로 실망하고 눈물을 흘린다. 인간은 그 누구도 의지의 대상이 아니며, 만족을 채워줄 수 있는 능력자가 아니다. 세상은 자기 자신 때문에 실망하고, 믿고 의지했던 사람 때문에 실망하고 돌아선다.

 

그래서 목자가 없는 자들은 삶의 목적은 외로움과 낙심이요, 삶의 방향은 공허함과 방황과 아픔이다. 또 삶의 확신은 혼란과 후회와 괴로움이다. 그래서 지금의 확신이 내일의 후회요, 또 오늘의 확신이 내일이면 후회로 돌아온다. 이렇게 인간의 이성은 항상 불완전하다. 이성의 불완전! 이것을 빨리 깨닫자.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6:35-36)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6:48) 하셨다.

 

또 목자 없는 양은 피난처, 안전한 곳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항상 위험으로부터 무방비 상태에 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파멸에 이르기가 쉽다.

그래서 시편57:1에서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그리고 시편91:1에서는 성도들을 향하여서는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라고 불렀다.

 

그래서 찬송가 중에도

“1.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자 이리오라. 땅들이 변하여 물결이 일어나 산 위에 넘치되 두렵잖네. 2.이방이 떠들고 나라들 모여서 진동하나 우리 주 목소리 한번 발하시면 천하에 모든 것 망하겠네. 3.만유 주 하나님 우리를 도우니 피난처요. 세상의 난리를 그치게 하시니 세상의 창검이 쓸데 없네. 4.높으신 하나님 우리를 구하니 할렐루야. 세상이 심하고 환난이 극하나 피난처 되시는 주 하나님.”(70)

 

예수님은 많은 무리를 보면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보았다. 그래서 불쌍히 여기셨다. 저물 때까지 말씀을 가르치셨다.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34).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보면서 배고픔과 위로와 안전을 한꺼번에 해결해 주신다.

 

사람은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람에게는 불쌍히 여김을 받을 필요가 없다. 사람은 무시하고 멸시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시며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갈증을 해결해 주시고, 주리고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고, 길을 열어 주신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다. 그들은 더 이상 목자 없는 양이 아니다. 목자가 있는, 주님이 계시는 양이다. 주님께 나아오면 주님이 해결해 주시는 것이다.

 

여러분은 주님께 나아와야 한다. 굶주림도 주님께 나아와야 한다. 어려워도 주님께 나아와야 한다. 모든 문제를 안고 있어도 내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와야 한다.

 

제자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다. 날이 저물고 굶주려 있는 사람들을 보고 제자들은 무리를 보내서 각자 알아서 해결하게 하자”(36)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리를 내보내면 안 된다.”(37)고 하신다.

 

인생은 때가 저물 때”(35)가 문제이다. 주변이 어두워지면 갈 곳이 없다. 갈 때도 없고, 오라는 곳도 없다. 젊음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이 저물어가면 인생은 처량해 진다. 아무도 불쌍히 여겨주는 자도 없다. 사람들은 네가 스스로 알아서 살아라.”고 한다. “네 인생은 네가 알아서 해야지...” 한다. 그러나 인생은 스스로 알아서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때가 저물면 주위가 다 어둡다.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방향 감각도 없다. 주님께 있어야 한다. 젊을 때는 혈기로, 자신감으로 뭔가 다 할 수 있고, 자유로이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인생의 황혼이 되면 주님께 나아와야 하고, 주님께 붙어 있는 자는 떨어지지 말고 잘 붙어 있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모른다. 인생이 저물어 가는데도 주님께로 오지 못하는 자들은 주님의 위대하심을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의 목자이시다. 우리에게 안전을 주시고, 먹을 것을 주시고 길을 열어 주신다. 이제 우리는 주님을 꼭 붙잡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맡기고 살아야 한다. 할렐루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23:1-2)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4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