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묵상(30) - 2022/2/28>
30. 물 위를 걸으신 분
막 6:4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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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6: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6: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6:48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6:49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6:50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6:51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6: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인류의 역사 가운데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수없이 일어났다. 우리가 잘 모르고 생각을 하지 않고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실제로 인류 역사란 초자연적인 기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기독교의 역사이다. 성경이 기적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기적의 연속이 기독교의 역사이다. 기독교의 중심점는 그 도덕이 아니다. 기독교의 중심점은 그 기적이다. 특히 기적적 인격인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의 기적적 출생, 그의 기적적 생애, 그의 기적적 십자가 사건과 부활이다. 그리고 부활 후 승천이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 오실 사건이 남아 있다. 이것들이 기독교의 기적의 역사이다.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일, 그의 거룩한 행적, 죽음, 부활, 승천, 재림, 이것이 기독교의 중심이다.
도덕도 여기에 근거한 도덕이라야 옳은 도덕이다. 그 위안과 환희와 소망도 이것을 믿는대서 오는 위안이요, 환희요, 소망이다. 기독교에서 그 기적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다. 인간의 모양으로 오셨다(빌2:6-8). 하늘과 땅이 만난 것이다. 또 한번 하늘과 땅이 만나는 일이 있을 것이다(계21:2).
삶이 죽음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고통을 이긴 것이다. 이 사실과 역사와 기적이 기독교인 것이다. 단지 높은 이상만이 아니다. 단지 순결한 도적만이 아니다. 단지 위대한 힘만이 아니다. 기독교는 기적이다. 신비이다. 초자연적인 사실이요 힘이다. 기적 아닌 기독교는 윤리, 도덕일 뿐이다. 그것이 기독교가 아니다. 구원의 종교가 아니요, 영생의 종교가 아니다. 성 어거스틴은 “기적이 없었더라면 나는 기독교인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의 신앙이 기적에 연연하면 안 된다. 기적에만 매달리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없는 것이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자. 예수님은 군중의 굶주림을 해결하신 다음, 군중을 해산 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즉시” 떠나 보내셨다. 제자들의 마음이 이적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중요한 것은 이적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시다. 제자들은 이적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제자들은 예수님께 순종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바다 건너 편 뱃새다로 보내셨다. 제자들에게 있던 장소에서 완전히 다른 장소로 가게 하신 것이다.
때때로 장소의 변화는 생각의 변화를 가능케 한다. 장소를 떠나지 못하면 생각도 바꾸지 않는다. 죄를 짓는 것도 그 장소(환경)를 떠나야 하고, 죄를 짓게 하는 무리(사람)를 떠나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배를 타고 뱃새다로 가는 것을 강요 하셨던 것이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하셨을까? 마가복음에서는 말하지 않지만, 요한복음 보면 군중이 먹을 것을 받은 후 예수님의 의사와 관계없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다. 아마 예수님을 붙잡아 둘 운동을 벌였을 것이다(요6:15). 그것은 예수님이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찍이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신 후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실 때에 거부해 버린 바로 그 권력의 길인 것이었다(마4:8-10). 예수님은 제자들까지 여기에 휩쓸려 동조하고 났을 수 있을 것까지 예견하셨다. 마귀는 군중심리를 일으키거나 이용할 때도 있다. 제자들을 여기에 동조하거나 휩쓸리면 안 된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예수님은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멀리 멀리 떠나가게 하셨다. 빨리 무리들과 거리를 두게 하셨다.
그리고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기도로서 무리와 거리를 두고, 기도로서 위기를 극복하고, 기도로서 마음에 안정을 찾고, 기도로서 쉼을 얻고, 기도로서 삶의 능력을 얻는다. 기도로서 어려움을 회복하게 된다. 우리도 도움이 필요할 때는 부르짖어 구해서라도 도움을 받아야 한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버티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도움을 받기 위해 사람을 찾거나, 다른 사람들이 하는 방식으로 위기를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 좋은 교훈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을 피해 조용히 하나님과 일대일로 시간을 보내셨다. 주님의 능력을 기억하고 그를 믿고 영접하여 주님의 도움을 기다리자.
제자들은 바다 가운데서 풍랑의 고난을 만났다. 이 단락에서 예수의 모습과 제자들의 모습이 첨예하게 대조를 보여준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조는 장소의 차이에서부터 시작한다. 제자들은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님은 육지의 높은 산에 계신다. 우리가 본문의 장면을 상상해 보자. 예수님은 지금 산에서 멀리 힘겹게 노를 젓고 있는 것을 보시고 계신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형편을 모르시는 것이 아니고 다 아신다. 우리가 요한 계시록을 보면 2장, 3장에서 일곱 교회를 향하여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 형편 처지를 안다” 라고 계속 반복해서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함으로써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지만(46절), 제자들은 힘겹게 노를 저음으로써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한다(48절). 예수님께는 제자들을 지켜보시지만, 제자들은 예수를 바라보지 않는다(48절). 제자들은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생각하지만(49절),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으로 나타내신다. 권능자로 찾아오신다(50절).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놀라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50절). 이렇게 모든 점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대조적으로 차이가 난다. 제자들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 진정한 소망은 오직 예수께만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제자들의 고난이 더 심해지는 것과 대조적으로 예수님의 구원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제자들의 고난은 점점 더 심해진다. 날은 저물고, 배는 바다 기운데 있으며, 바람이 그들을 거슬렸다(48절). 제자들은 시야와 방향을 놓치고 말았다. 제자들은 나아가기도 어렵고 되돌아가기도 어려운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제자들은 방어하기 힘든 자연의 공격을 당하게 되었다. 제자들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제자들을 구원하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점점 더 적극적인 행위를 하신다.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제자들이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향하여 물 위로 걸어 오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50절) 그리고는 제자들의 배에 오르신다. 그런데 놀랍게도 풍랑이 그쳤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함께 계셔야 한다. 주님이 내 속에 들어와 계셔야 한다.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주님은 “네 속에 내가 들어가고 싶다”고 하신다. 우리는 주님을 내 심령에 영접해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내가 가면 보혜사 성령이 오신다”고 하셨다. 그가 오시면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주님 곁을 떠나면 안 된다. 주님이 없는 세상을 이길 수 없다. 세상의 풍랑을 넘어설 수 없다. 갈릴리 바다는 제자들에게 고난과 절망의 장소였지만 예수님에게는 은혜와 구원의 장소였다.
바클레이는 본문을 이렇게 설교했다.
“어거스틴은 이 본문을 설교하면서 ‘예수는 파도를 밟고 오셨다. 그와 같이 예수는 인생에 닥쳐오는 모든 환란을 발 아래 밟아 버렸다. 성도들이여, 왜 두려워하는가?’ 라고 하였다. 이것은 인생의 단순한 사실이며, 모든 시대에 헤아릴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곳에 계실 때 폭풍은 그치고 혼란은 없어지고 불가능은 가능이 되고 견디기 어려운 것이 견디기 쉬운 것이 된다. 그리고 좌절하지 않고 극한점을 뛰어넘는 힘이 생긴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걷는 사람은 앞에 놓인 폭풍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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