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장
속죄의 필요성
The Necessity of the Atonement
1. 대속적, 형벌적 속죄의 증거(계속)
1.1 십자가의 죽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음을 강조하는 성경 구절들
1) 대속적, 형벌적 속죄만이 죽음 앞에서 주님이 하신 행동들을 설명할 수 있다
a. 십자가상의 죽음이 그 방법상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음을 증명하는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논증
-주님이 지상에서 하신 유일하고 예외적인 요청 : 단순한 육체적 죽음이 아님, 만약 그렇다면 순교자의 죽음보다 못한 분이된다. 주님은 자신의 죽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미리 아셨고 가능하다면 그 일을 피하기 원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 "이것이 정말로 필요한 일입니까? 다른 방법으로 이 일을 하는 것도 가능합니까? 가능하다면 이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 피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순종 하겠습니다.”
b. 또 하나의 중요하고 결정적인 논증
-우리 주님은 하나님께서 버림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주님과 영원하신 성부 사이에 교제가 일시적으로 중단 되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 : 단순한 육체적 고통 때문에 이런 부르짖음이 나온 것이 아니다.
2) 대속적, 형벌적 속죄만이 로마서 3장 25~26절을 설명할 수 있다.
-하나님 정말 순결하셔서 악과 죄는 바라보실 수도 없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를 용서하시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영원토록 의로우신 성품을 유지하실 수 있을까?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5~26) : 이 전체 주제에 대한 표준 문구(locus classicus)이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 안에서 죄를 벌하셨기 때문에 죄를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은 여전히 의롭고 공의로우신 분으로 남아있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성품이 스스로 조화를 이루고, 온 세상 사람들 뿐 아니라 하늘의 통치자들과 권세들 앞에서, 심지어는 마귀와 모든 지옥의 거주자들 앞에서까지 정당함을 입증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이 영원토록 공의로우심을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예부 믿는 자들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
3) 십자가상의 죽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음을 시사하는 다른 성경 구절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의 모든 쓰라림과 공포를 맛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아낌없이 아들에게 부어졌다. 성부께서 주님을 고뇌와 수치 가운데로 보내셨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 하나님이 그 아들과 사이의 영원한 교제가 깨어지는 지경까지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다.
1.2 보조적 논증들
1)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에 대한 교리는 형벌과 대속의 필연성을 보여 준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교리를 믿는다면, 죄는 분명 벌을 받아야 한다. 형벌적 요소가 개입할 수밖에 없고, 대속의 필요성이 뒤따라온다.
-하나님의 율법의 엄위함과 불변성에 대한 논증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5:18)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
2) 죄책을 인정하면 형벌적 대속이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
-우리가 죄가 단순히 부정적이거나 연약한거이나 이론이 아니라 죄책이라는 사실에 동의 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처벌받아야 한다는 사실에도 분명히 동의해야 할 것이다.
3) 대속적, 형벌적 속죄만이 그리스도를 반드시 믿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어떤 이론도 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필수적이며 왜 우리의 구원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달려 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오직 대속적 관점만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1.3 반론과 답변들
1) 죄책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죄가 우리에게 죄책을 지게 만든다. 죄가 곧 죄책이다. 이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들과 논쟁 가치 없음
2) 사랑의 하나님은 대속이 없이도 용서하실 것이라는 주장
-하나님이 사랑이시기만 하다면 이 논증도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빛이시고, 거룩하시고 , 공의로우시며, 의로우시다.
-사람의 경우에 비추어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은 큰 오류이다.: 우리의 부족한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참으로 딱한 일이다. 사랑에 대한 우리의 감상적이고, 엉성하고, 불공정하고, 불의한 개념을 영원하신 하나님께 적용하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시도이다.
3) 대속은 하나님의 성품들을 손상시킨다는 주장
-하나님이 무죄한 자를 벌하는 것은 불의한일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무죄한 자가 하나님께 그 죄를 자신에게 전가시켜 달라고 요청하였다면, 여기에는 어떠한 불의도 없다.
-대속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영원하신 협의를 통해 내려진 위대한 결정이었다. 성자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말씀하셨으며, 하나님은 그에게 육체를 제공하셨다. 완벽한 합의가 있었으며 그렇게 때문에 아무런 불의도 없다.
4) 대속의 개념은 바울이 만들어 냈다는 주장
-대리적 형벌이 진실이었다면 주님도 가르치셨을 것인데 이 개념이 서신서에만 나오고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함.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주님이 십자가에서 속죄를 완성하시기 전에 속죄 교리를 충분히 설명하실 수 없었던 이유 : 우리 주님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 하실 때 마다 그 가르침을 오해 했다. 그들은 낙심하고 반대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요 16:12)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 후에야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라는 궁극적 진리를 확신하였다. 부활 후에 주님은 구약을 설명했고 제자들은 그 설명을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대속적 관점을 주님이 가르치지 않았다는 주장은 아무 근거가 없어진다.
-사람들이 대속의 교리에 대해 갖는 진정한 어려움은 그들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전체적인 시각이 적절히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한 가지 측면의 성품만 강조하다 다른 쪽은 배제시켜 버린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깨닫는다면, 그들이 가진 어려움들은 사라질 것이다.
5) 대속은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을 설득하여 우리를 용서하시도록 했음을 의미한다는 주장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를 만들어 내었다. 이것이 바른 순서이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셨나? 왜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셨나?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가 답이다.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자기 아들에게 지우시고,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벌하셔서 모든 고통을 당하게 하셨다는 사실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보다 더 잘 보여 주는 것은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대속하여, 우리가 초래했고 우리가 받아 마땅한 율법의 형벌을 당하시는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다.
2. 속죄 교리의 핵심
2.1 예수님의 수동적 순종과 능동적 순종
1)수동적 순종 :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주님께 지우셨습니다. 주님은 수동적이셨고 하나님이 그 일을 하셨다.
2)능동적 순종 : 주님은 자기의 삶 가운데 능동적으로 순종하셨다.
-주님은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다. 율법의 일점일획까지 행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2.2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에게 전가된 의
-로마서 5장의 진술 : 우리가 아담 안에 있었던 것처럼,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다. 아담이 행한 것이 우리에게 해당되듯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이 우리에게 해당된다.(의의 전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순종의 행위로 율법을 존중하고 지키셨을 때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을 위한 행동일 뿐 아니라 나를 위한 행동이기도 했다.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쫒지 않고 그 영을 쫒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심이라”(롬 8:3~4)
**주님이 능동적으로 행하신 일, 수동적으로 행하신 일 모두 우리에게 전가됨.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그와 하나 된 우리는 아무런 두려움이나 떨림, 흔들림이 없이 율법을 바라볼 수 있다.
3. 결어
율법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나와 아무 관계없네
내 구세주의 순종과 피가
내 모든 범죄 보이지 않게 숨기시네
-아우구스투스 토플레디-
오직 자비에만 빛진 자
언약의 자비를 찬송하네
당신의 의를 입어 두려움 없이
나 자신과 제물을 드리네 -찬송-
-죄를 범한 한 사람이 “율법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그는 “나와 아무 관계 없네”라고 말해야 하고 우리도 역시 그렇게 말해야 한다.
-왜? “내 구세주의 (능동적)순종과 (수동적)피” 때문입니다.
-칭의는 내가 완전하게 속죄되고 가리움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죄가 씻어졌고 나는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했기 때문이다.